Friday, September 11, 2009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한겨레 2009.9.11 


최근 미국 정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에릭 홀더가 지난 부시 행정부의 중앙정보국이 불법 고문을 했는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지요. 조사 대상인 중앙정보국뿐 아니라, 보수파들은 이번 결정이 중앙정보국 요원들을 불안하게 해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면서 홀더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최근 드러나는 문서를 보면 정부의 고위층이 불법행위에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니, 이들의 반발이 이해도 갑니다. 한편으론 진보 진영도 이번 결정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고 있습니다. 홀더의 말대로 명백하게 고문을 한 수사관을 대상으로 조사를 할 경우 이를 실질적으로 지시한 고위층 지도자들은 면죄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이 흥미로운 것은 지난 정권의 흠을 들추는 것이 미덕이 아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마당에 그가 지명한 법무장관이 조사를 지시했다는 것이지요. 오바마 대통령의 가장 큰 공약 사항인 의료보험 개혁만으로도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 이번 일로 그는 국정 운영이 힘들어질까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번 일은 인치가 아닌 법치가 강조되는 미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미국의 법치가 완전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최근 부시나 닉슨의 예를 보면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미국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매번 그들은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회복했습니다. 닉슨의 불법행위는 오히려 의회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이런 법치 민주주의로의 회귀에는 눈을 크게 뜬 언론과 미국 시민들의 분노가 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지키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대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오랜 투쟁으로 마침내 1987년 민주주의는 얻어졌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어 하는 사이에 지난 두 정권이 쌓아둔 민주주의 업적이 퇴색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까? 언제 시민들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언제 힘 있는 사람들은 법 위에서 춤을 추고 있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 밑에 깔려 피를 흘리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혹시 지난 10여년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습관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민주주의가 왔고 그것을 위해 싸우던 분들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를 너무 쉽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분, 시민사회가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줄어드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러시아를 보십시오. 1990년대 혁명적인 정치변혁으로 얻어진 민주주의는 2000년대에 들어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도태된 지 오래입니다. 타이와 터키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시민사회에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백신과도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균을 몸에 넣어 저항력이 생기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의 도전도 그와 같아 우리들이 잠시 생각하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 값을 일깨워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기사등록 : 2009-09-11 오후 07:04:12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ERIES/60/3762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