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6, 2013

종북몰이, 한국의 마녀사냥

종북몰이, 한국의 마녀사냥 - 남태현
인사이트 2013-12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51&Code1=001

토론을 중시하는 미국대학에서도 사실 학생들의 토론을 이끄는 것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 방법 중 제가 즐겨 쓰는 것 중 하나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것이죠. 가르치는 전공이 정치학이다 보니 정치적 내용이 묻어나는 영화를 보여주는데 그 중 제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파리대왕>이 있습니다.

윌리암 골딩의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1963년과 1990년 두 번에 걸쳐 영화화 되었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1963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저에겐 다행이도 <정치와 영화>라는 과목을 가르칠 기회가 있어서 영화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다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체 없는 공포, 정치판 조장


이 영화는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재빠르게 정치사회를 구성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음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영화가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정치인으로 거듭납니다. 위와 아래의 질서를 확립하고 위에 선 아이들 즉 권력자들은 점점 더 커지는 권력에 심취합니다.

이 과정을 결정적으로 과속화한 것은 산꼭대기의 괴물의 존재였습니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군림을 허용하고 무리들의 복종을 요구했죠. 괴물은 오래된 시체로 밝혀지지만 그 목격자는 죽임을 당하고, 진실은 묻히게 됩니다. 결국 괴물의 공포만 살아남아 이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정치세력만 번성합니다.

소년들은 이 정치체제가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맹신하고 충성을 다합니다. 얼핏 보면 한심한 이 소년들을 보며 제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죠. 이렇게 한심한 예는 물론 현실에도 넘쳐납니다. 그 중 하나는 15세기 말엽 중세유럽의 ‘스페니쉬 인퀴지션(Spanish Inquisition)’이라는 종교재판일 것입니다.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진정으로 했는지 그냥 개종한 척만 하고 계속 유대교를 신봉하는지를 ‘조사’한 것으로 유럽에서 크게 세 차례 그 조사가 있었는데, 그중 스페인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사를 ‘스페니쉬 인퀴지션’이라고 합니다.

권력의 도구, ‘두려움’


당시 유대인들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자신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고발당한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이유) 유대인들은 조사관들에게 종교적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어도 증명할 길이 없었죠.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것이 고백 말고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말을 해도 조사관들이 믿지 않기로 하면 이들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고문과 화형이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이 해괴한 일이 당시에는 마녀와의 성전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유대교를 믿는 것이 뭐 어때서라고 비웃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 때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오래된 시체가 됐든, 있지도 않은 마녀가 되었든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는 누구에게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간에 그것(불구덩이, 친불주의, 숭불주의, 미제국주의자)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고 자신의 반대자들을 그 악의 일부로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키고자하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요.

덕택에 대중들은 있지도 않은 것과 싸우느라 정작 자신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권력자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랐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게 남들만의 모습일까요? 실체가 모호한 적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를 키우고 그것을 이용해 반대를 억누르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한국에선 없었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죠. 더욱 슬프게도 그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종북인가


박근혜 정부의 첫해를 장식하고 있는 ‘종북몰이’가 그것입니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북한과 공조해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9월 구속이 된 것을 시작으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반공의 굿판이 요란하게 시작했습니다. 법무부는 다음 달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하면서 뒤이었고 보수단체들은 통합진보당을 간첩소굴이라며 장단을 맞췄습니다.

통진당 뿐만이 아니죠. 한기총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종북주의자들, 단체 그리고 정당 등이 절대로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며 열변을 토해냈고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은 10월 10일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해 "종북, 친북세력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민들도 잘한다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며 남 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 의원 등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종북세력으로 매도했습니다.

11월 22일 박창신 신부가 시국미사를 통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자 조선일보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 신부’마저 ‘종북구현’ 사제단이라고 비꼬았죠. 뒤이어 검찰은 ‘박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거의 모든 국민이 종북인 셈입니다.

정치적 궁지의 결과물, ‘종북’


그럼 이들이 말하는 종북세력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논란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도 재판을 기다려야 하고 설사 유죄 판결을 받더라하더라도 그들이 종북인지 무엇인지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도대체 종북이 무엇인가요? 김일성을 욕하지 않으면 종북일까요? 김일성 욕은 하지만 북한의 핵을 막연히 부러워하면 종북인가요? 김일성도 싫고 북핵도 싫지만 외국군대가 없는 나라를 꿈꾸면 종북입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북한의 사상이나 체제에 얼마나 동조를 해야 종북인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들의 사상이 무엇이건 이들과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을 묶어 하나의 세력으로 본다는 것은 억지 내지는 무지일 뿐입니다. 이들 간에는 조직적 연계나 행동의 연대도 전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상적 접점도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종북이라는 말도 세력이라는 말도 아무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수사에 불과한 것이죠. 막연하게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오래 전 죽은 시체나 마녀의 존재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페니쉬 인퀴지션’의 광풍이 잦아진 것은 이성의 발달이 몰아치면서 부터였습니다. 종북의 광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부 정치인과 시민사회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이성을 촉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거꾸로 많은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허황된 정치공세를 벌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몰려있는 궁지의 깊이와 어둠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