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28, 2014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 남태현
한겨레 2014.04.28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34864.html

요즘 미국에선 네바다주의 클리븐 번디라는 목장주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정부의 땅에 자신의 가축을 방목하면서도 정부에 돈을 내지 않아 가축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번디는 총을 든 지지자들과 함께 가축을 압수하러 온 연방정부 요원들과 무장 대치를 했습니다. 충돌을 피하고자 정부가 오히려 철수를 하고 맙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연방정부의 간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폭스뉴스> 등의 반오바마 정서 등 여러가지로 논할 것이 많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과 회의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 역사의 특수성 때문일 수 있지만, 어찌되었건 이런 논란 속에 미국민은 연방정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국민과 지방정부, 연방정부 사이에 긴장을 유지합니다. ‘연방정부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며 복종과 희생을 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간 의아한 눈초리와 비웃음을 사기 쉬운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국가가 있어왔죠. 그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정부죠. 정부는 그래서 국가와 동일시되기 일쑤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역사의 부침이 남다른 곳에선 국가와 정부의 존재는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주체라기보다는 내가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국가와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삼가하는 이유는요?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책을 보면, 국가가 없던 시절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죠.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며 간신히 생존해야 했으니까요. 개인들은 결국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대신 국가라는 괴물을 섬기며 안위를 택합니다. 결국 국가의 존재는 개인의 안위를 보장함으로써 성립, 성장, 유지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안위를 보장치 못하는 국가와 정부는 도전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가 시위하는 자국민을 향해 발포하자 더욱 거센 저항을 받은 것은 한 예라 할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박근혜 정부는 무능하다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대응을 했습니다. 구조활동만 보더라도 침몰 직후 정부는 혼란과 관료주의 탓에 오히려 구조활동을 방해만 했습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 감독해야 할 박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람들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만 성공했습니다. 그사이에 수백명의 생명이 울부짖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번디처럼 총을 들고 나서는 무지한 용감함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수백명이 죽는 것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게 하는 정부를 왜 지지해야 하는가? 국민을 지키지는 못하면서 억압할 때만 쓰는 공권력을 왜 용납해야 하는가? 전국민을 이렇게 분노케 했으면 그 정부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사과와 개각, 선거의 패배로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일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애도를 지나 조사, 법적 조치가 따르겠죠. 하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은 정치적 논의를 통한 정치적 처벌과 정치적 개혁입니다. 그것 없이는 지도자들은 또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 웃는 얼굴로 비릿하게 군림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고통을 또다시, 반드시 겪게 될 테니까요.

애끓는 가슴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Thursday, April 17, 2014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4-17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622&Code1=001


예상했던 대로 안철수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지요. 한국에서 컴퓨터라는 물건을 만져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V3라는 안철수의 놀라운 바이러스퇴치 프로그램을 써보았을 테고 이를 공짜로 나눈 그의 배짱과 긴 안목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의사로 시작해 컴퓨터엔지니어로,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로서 그의 성공적 삶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고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서울 시장과 대통령의 자리를 노렸을 때 흥분했습니다. 아마도 제대로 된, 상식적인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성원에 힘입어 이제 그는 당당히 야당의 한 대표로 성장했습니다. 민주당에 통합의 한 축으로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가 된 것이죠. 제일 야당을 이끌던 김한길 대표가 오히려 밀리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안철수가 가지는 대권후보로서의 잠재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안철수가 갖고 있는 정치적 가능성은 큰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안철수의 새 정치라는 것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요? 기초선거에 정당공천을 하지 않겠다던 그가 결국 새 당내의 볼멘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국민에게 사과를 구했습니다.

박근혜의 공약파기로 인해 생긴 소동인 만큼 비난을 받는다면 박 대통령이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 초등학생도 알 일입니다. 문제는 모두들 이를 갖고 안철수의 새 정치가 퇴색되었다고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어쩌면 안철수 본인마저 기초선거의 정당공천 문제가 새 정치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정당공천처럼 사소한 일이 새 정치의 몸통이라는, 초라한 현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대선의 공약이라는 것이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닙니다. 후보자가 그럴싸한 공약으로 민중의 환심을 사고 권력을 얻은 후에 껌 종이 버리듯 무시하는 행태는 민주체제의 맹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의 고집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죠.

안철수의 실망스러운 고집


사실 대통령이 공약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자기네는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치인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철수의 그 고집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 공약에의 고집은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철수의 대선공약집을 보면 “기초단체장이 해당 선거구 국회의원에게 예속돼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에 종속”되고 “정당공천으로 인한 공천비리 및 부패 만연”되어 “현행 지방자치제도는 풀뿌리 자치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진단하며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국민이 애초에 간절하게 원한 것은 아니었죠. 이 문제에 대해 민중이 깊은 이해를 하고 변화를 갈구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그는 대선을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대통령이 되면 이런저런 것을 하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이 되지 않은 이 마당에 그 약속이라는 것은 개인적 철학의 문제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신뢰와 철학을 위해 당 전체의 운명을 볼모로 대통령과 맞서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고집은 있지만 전략적 사고가 부족함을 엿보게 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 고집을 국회의원 노무현이 질 것을 알면서 서울의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에서 국회의원 자리를 노린 것에 비유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맞지 않는 비유죠. 노무현은 자신의 자리를 걸고 도전했지만 안철수는 남의 자리를 걸고 도박을 했으니까요.

둘째로 그 고집이 보여주는 새 정치의 폭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 훌륭합니다. 정치인들이 쉽게 약속을 어기는 마당에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 것, 새롭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요? 과연 그가 말한 그의 새 정치는 무엇일까요?

그가 내놓은 대선 공약집을 보면 국민을 섬기는 정부, 공공기관의 혁신 등에서 교육, 문화로 이어지는 그의 비젼은 매력적이지만 과연 이게 새 정치인가하는 의문을 없애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강령/정강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근사한 말은 있지만 그것뿐입니다.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곧 새로운 정치일까요?

참신한 아이디어는 새 정치에 필요한 부분이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이들의 말을 잠시 내려놓고 하는 ‘정치’를 보면 새 정치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입니다. 안철수가 한 정치라는 것은, 선거의 승리라는 아주 전형적인 목표를 위해 통합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으로 양당구조라는 전형적인 지형을 구축한 것이죠. 즉 안철수의 정치는 아주 구태의연하며 전형적이고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비극이 이런 실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비극은 안철수는 아직도 자신이 새 정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냥 막연히나마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죠. 더 큰 비극은 정치인들이 짜놓은 그 좁디좁은 새 정치의 틀에 갇혀 어떤 것이 새 정치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나래마저 꺾여버린 우리의 처지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새 정치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