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6, 2017

[세상읽기]미국을 향한 비극적 짝사랑


경향신문 (2017.03.23)

짝사랑은 누구나 한번은 하는 경험이지 않을까 싶네요. 새로 오신 선생님을, 이웃 학교 학생을, 이름 모를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성장기에 필요한 경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짝사랑은 비극입니다.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으로 끙끙 앓다가 결국 저 사람은 내게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 각성은 충격적입니다.


미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까, 관심이 적어지지 않을까 걱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15년 리퍼트 미국 대사 테러공격 이후 대응은 좋은 예입니다. 기괴한 부채춤 공연에서부터 엄마부대의 꽃바구니 시위 등 도가 지나친 반응이 이어졌죠. 정치인들의 병문안이 과도해 병원에서 이를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걱정을 넘어 버려짐에 대한 공포의 표출이었죠. 2017년 군가가 울려 퍼지는 태극기집회에서 엉뚱하게 등장한 성조기 또한 비슷한 원인에서 생긴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미국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이 동아시아를 지나가며 남긴 여파가 꼭 초특급 태풍 같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말이죠. 여기저기에서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틸러슨 장관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만찬을 했지만 유독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틸러슨은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불렀지만,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로 지칭했습니다. 오바마 정부 때는 ‘핵심축’으로 불렸는데 말이죠. 결국 한국이 강등된 것은 아닌가, 트럼프 정부는 한·미동맹을 미·일동맹보다 더 낮게 보고 있지는 않나 걱정을 하고 있죠.

우리의 걱정은 온당한 것일까요? 트럼프 정부는 한국을 버리거나 최소한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닐까요?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북한을 “큰 걱정거리”로 보며 “새로운 제재 등 중대한 추가 조치들”을 강조한 것은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죠. 중국과 한국에서 큰 논란이 되는 사드도 오바마 정부 주도로 시작했습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한국을 ‘핵심축’으로 보았을 수 있지만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구상을 떠받드는 축이었죠. 중국의 전략적 위협을 견제하는 첨병으로 한국의 가치는 늘 비슷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른 것은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1994년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려 한 것은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기본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미국의 마음은 애초에 변한 것이 없으니 우리의 걱정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 걱정이 온당치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앞날이죠. 미국이 우리의 앞날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을 가져도, 애원해도, 무기를 사줘도 말이죠. 사실 미국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싸이가 잊혀 가면서 한국은 그냥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나라, 삼성과 현대의 나라 정도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북한 포대에 인질로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미국이 위협적인 발언만 해도 정국이 흔들린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격변하는 세계 정세에서 한반도의 안전을 모색하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죠.

놀라운 것은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한국 내 목소리입니다. 아무리 제한적 군사행동도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큰 나라의 외교부 장관인 윤병세는 “군사적 억제방안”까지 언급했습니다. 미국의 시각이 한국 지도자들에게 투영돼 있음을 알 수 있죠. 문제는 이런 정치 지도자가 윤병세 장관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선주자들의 입을 지켜봐야겠습니다.

짝사랑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을 따라 해보기도 합니다. 비슷한 옷도 입어보고 그 사람 단골집도 가봅니다.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진 듯하고 그만큼 흐뭇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짝사랑은 여전히 짝사랑으로 남습니다. 게다가 그런 노력과 공을 많이 들일수록 짝사랑의 결말은 더욱 비참하죠. 하지만 이런 짝사랑의 진실을 마주하기 힘든 것은 청소년뿐만은 아닌 듯합니다.

Wednesday, March 1, 2017

[세상읽기]경험을 나누는 것이 민주체제


기록적 한파의 경험과 지구온난화 간의 괴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경험이 중요한 자산임은 상식입니다. 취업 공고엔 경험자 우대라는 글귀가 자주 등장하고 역사가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이유입니다. 논쟁에서도 경험을 앞세운 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내가 직접 겪었다고 하면 주장에 힘이 실리게 마련이죠. 그래서 논쟁이 치열할수록, 경험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이런 화법을 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정치인 중에도 꼰대가 많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표적인 경우죠. 2016년 선거전 내내 비즈니스 경험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자신의 엄청난 부는 곧 지도자가 지녀야 할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떠들어댔죠. 비난과 반대도 컸지만 많은 이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명박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치인입니다. 대통령 시절 그 유명한 ‘해봐서 아는데’ 시리즈를 쏟아냈죠. 장사를 해봐서, 배를 만들어 봐서, 민주화운동 해봐서 등등 경험을 강조, 과장하면서 주장의 근거로 즐겨 삼았습니다.상사나 연장자 등 경험이 많다고 여기는, 또는 여겨지는 층이 상대적으로 경험이 얇거나 그렇게 여겨지는 이를 향해, 경험을 무기로 일방적 말을 쏟아내는 경우 전자를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들의 말투도 굉장히 비슷합니다. 나는 이렇게 잘하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의 말투가 그 전형이죠. 나는 생전 그런 실수가 없었는데 넌 매일 실수냐. 나는 더한 일도 참았는데 넌 왜 그것도 못 참냐. 내가 학생 때는 패기가 넘쳤는데 너희는 왜 열정도 없냐. 즉 꼰대는 경험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강조돼 의미 있는 대화나 검증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겠습니다.

경험이 소중한 것은 맞지만 큰 함정도 있습니다. 경험은 기억이 되고 자아의 일부가 되는 까닭에 미화되기 쉽죠. 실수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는 묻히거나 심지어 잊히기도 합니다. 트럼프의 경우 도산과 빚으로 고생했지만, 선거전 동안 이런 실패에 관해서 일언반구도 없죠. 또 한편으로 경험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에 편협한, 또는 그릇된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눈보라의 경험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의심은 좋은 예입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쳐서 집이 완전히 묻히고 전기가 일주일 끊기는 경험을 했다 해도 이는 개인의 지엽적 경험일 뿐이죠. 하지만 이런 경험을 지구온난화 현상의 방증을 찾은 듯 으스대는 사람도 미국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경험을 맹신하며 편협한 시각을 정치세력화한 이들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어버이연합 회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6·25전쟁의 경험, 전후 불안정한 시대를 산 경험이 정치적 열정의 근원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빨갱이’들에게 당했다는 기억은 빨갱이가 사라진 시대에서 빨갱이를 계속 찾게 하였을 겁니다. 그러니 그 빨갱이를 보지 못하는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가슴 시릴 만큼 아프게” 부모를 총탄에 잃은 박근혜는 자신의 불안감을 바탕으로 “국민을 각종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겠다며 사드를 밀어붙였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의 권한을 “선생님”에게 던져주고서 “컨펌”을 기다리는 것마저 정당화했습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경험했다는 확신은 검증을 힘들게 해 위험합니다. 억지와 꼰대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각종 오류에 취약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경험을 무작정 버릴 수는 없죠.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을 모으는 지혜입니다. 어제 눈 폭탄을 맞았지만 겨울 전체를 보면 역사적으로 더운 겨울이었던 것, 이제는 저성장 경제의 구조적 제한이 젊은이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 우리 집이 빨갱이 손에 몰락했지만 서북청년단의 총칼에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을 서로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어제와 오늘을 살피고 나와 너의 대화를 이어가야 합니다. 민주체제는 이를 정치적으로 구체화한 겁니다. 서로의 경험을 비교해 목소리를 모으는 것이 민주체제이죠. 한 사람의 직관과 경험에 기댄 권력은 독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혹시 독재에 익숙해지지 않았었나요. 박근혜를 파면하며 느슨해진 경계의 줄을 바꾸어 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