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3, 2003

송두율의 '낯선' 색깔

남태현 [주장] 송두율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03.11.03 12:28 ㅣ최종 업데이트 03.11.03 14:1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51752&PAGE_CD=

난 송두율 교수를 모른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신문에 난 기사가 고작이다. 그의 철학이나 인생에 관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낯선 그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것은 그의 '경계인', 또는 '회색분자'라는 색깔 때문일 것이다. 회색.

서울시내는 유난히도 회색이 판을 치는 곳이다. 엉성한 길바닥 보도블록으로부터 시작해서 길모퉁이의 담, 높이는 고층빌딩 옥상까지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회색을 찾을 수 있다. 그나마 눈길은 멀리 가지도 못한다. 왜냐면 회색 공기에 가려 그나마 우리의 시야는 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질려서일까? 우리가 회색을 지독히도 경멸하는 것은?

서울시내가 그렇게 회색으로 덧칠이 된 곳이라면 그 안에 사람들은 원색으로 화려하다. 아닌 거 같은가? TV를 틀라. 거기엔 지역색을 번쩍거리는 정치인들이 즐비하다. 신문을 펴면 무슨 논설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의 파시즘의 핏빛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그렇게 색이 분명한 사람들이 멀리 있는 것만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전라도 출신의 며느리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부모님들, 교내에 장승만 세워 놓으면 목을 베어 버리는 극단적 종교 동아리들, 대학도 안 나온 사람에게 대통령을 줄 수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명문 고등학교 동창들, 외국 근로자를 멸시하는 공장 주인과 동료 근로자들, 후줄근한 옷차림의 손님을 무시하는 고급식당 종업원들 등등 모두가 색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 색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때는 보일 듯 말듯, 어떤 때는 너무나 확연한 그 색은 무엇인가? 눈이 따가운 그 색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속한 패거리의 색이다.

그래서 언뜻 처음에는 색이 구분이 안 가는 것이다. 본색은 혼자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 그 패거리가 조금만 모이기를 기다리라. 그러면 그 튀는 색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것이다.

이 패거리의 색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어서 여럿이 모이면 힘이 나게 마련이다. 여럿이 모일 수록 색이 점점 진해지고 더 당당해진다. 그러니 또 그런 패거리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색을 억지로 맞추어 모여들기도 한다.

그리곤 패거리에 있으면서 왠지 모를 묘한 안도감도 느낀다. 누군가와 하나가 된 듯한, 남들과는 비로소 선을 확실하게 그을 수 있을 거 같은 안심이 된다. 그 안도감이라는 것이 전혀 현실적인 근거 없는 것이 또한 아니다. 바로 그 패거리가 주는 현실적 이득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패거리로부터 표도 얻고, 종교적인 우월감과 사명감을 성취하며, 패거리들 덕에 승진도 하고 하다 못해 '꽁짜 술'이라도 얻어 마신다.

이런저런 이유로 패거리가 커 가면서 그 색을 뚜렷이 할 필요가 더욱 커진다. 패거리 스스로에게 뚜렷하고 구별이 되는 동질감을 심어줌으로 해서 패거리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야 한다. 그것 없이는 패거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색을 뚜렷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다른 패거리와 대립을 하는 것이다. 어떤 패거리의 위협이나 도전 또는 상대적인 발전이야말로 "우리" 패거리들에게 "우리"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그 패거리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쉬운 예는 프로야구장에 가보면 볼 수 있다. 응원을 하기 싫어도 내야에 않으면 응원을 해야 한다. 특히나 얼마 전처럼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면 그 응원은 더욱 현실적인 가치가 있고 응원에 참가하라는 유언무언의 압력은 더욱 커져만 간다.

참여하기 싫어도 일단 시작하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옆에서 그 응원의 물결에 참여하고 있는 않은 사람에게로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뻔히 같은 팀의 팬인데 응원을 안 하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노란색 또는 파란색 풍선을 든 손은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응원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색이 분명해 질수록 그들의 힘은 세어지게 마련. 자연히 응원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는 압력도 커져 간다. 이렇듯 패거리간의 다툼은 패거리끼리의 다툼보다는 흔히 각 패거리의 자기단속 또는 내적인 발전이 그 목표일 때가 더 많다.

이렇듯 패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경쟁을 하고 있는 저쪽 패거리가 아니다. 또한 패거리에 속하지 못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안달하는 개인들을 겁내지도 않는다. 패거리들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느 패거리에도 들지 않으려는 색이 없는 개인들이다. 이 개인들이야말로 패거리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서운 적이다.

패거리들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순한 색을 즐겨한다. 그 색은 패거리가 하는 일에 굳이 일일이 설명할 필요를 제거시켜준다. 뭐를 해도 자기 패거리가 하면 다 정당화되고 남의 패거리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마귀일 따름이다.

대중들은 어려운 논리보다는 그런 단순하고 간편한 색을 쫓아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속한 패거리를 비호한다. 왜 호남사람들이 나쁜가? 왜 유대인이 나쁜가? 비호남인에게나 나찌 치하의 독일인들에게는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머릿수 많고 힘이 센 패거리의 선명한 색이면 다른 패거리에게 가진 미움과 차별을 정당화 하기에 충분했다.

회색인들은 여기서 바로 질문을 던지고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왜 유대인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학대하고 죽이느냐고. 나찌 독일사람들에게 마땅한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인들의 질문은 나찌 독일인들에게는 대답을 요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나찌 독일인으로서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근거없는 미움을 바탕으로 한 정치집단에게 그 근거없음을 지적하는데 그보다 더한 위협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렇듯 패거리들은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존재적 질문을 가장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만 두지 못한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들에게 색을 덮어씌우던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제거해야만 한다.

송두율 교수의 죄도 다름 아닌 회색인이라는 사실인 듯 싶다. <한겨레> 10월 17일자에 따르면 송 교수를 조사중인 검찰이 지난 17일 "노동당 가입 등에 대해 송 교수가 확실히 반성을 하면 관용 조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정치국 후보위원 부분 등 주요 혐의점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과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한겨레> 2003년 10월 20일자)하고 법정구속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죄라는 게 무엇인가 궁금하다.

검찰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봐도 반성을 안한 게 그 죄인 듯 하다. 사실은 봐주려고 했는데, 반성문 대신 사과문 쓰고 그 사과문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구속이다? 어찌 보면 북쪽의 색을 확실히 털어 버리고 남쪽의 색을 완전히 덮어쓰지 않은 게 그렇게 괘씸한 것이다.

송두율 교수의 죄가 '괘씸죄'와 별 다름이 없음은 그의 죄목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의 죄라는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국가보안법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에 따라 송두율 교수의 죄라는 것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인권의 기준에서 본다면 많은 국제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많다. 법 자체가 정치적인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고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비난이 끊임이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법을 어긴 송 교수의 죄라는 것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단한 법적 기초 위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긴 이런 괘씸죄가 얼마나 혹독한 매를 부르는지 교무실 불려가서 억울한 김에 반성문 쓰기를 거부해본 중교등학생 때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반성문 못쓰겠다고 하면 보통 매의 강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선생님의 분노도 갑자기 그 수위가 높아진다. 그리고 애초에 잘못한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선생님에게 억울한 매를 맞으면서 생각들 할 법 한 것이지만 송두율 교수도 거꾸로 말하면 뭐 그리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큰일을 잘못 했다면, 뭐 예를 들어 군대를 동원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내란을 일으켰다면 검찰이 반성문 하나 잘 쓰면 봐주겠다고 하겠는가?

괘씸할는지도 모르겠다. 무수한 색이 서로 부딪히는 조그만 나라에서 그의 회색 빛깔이 아니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회색인이 필요하다. 패거리를 만들고 사람들을 꼬드겨서 패거리를 키우고 그 패거리를 동원해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을 명명백백 하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도, 그래서 패거리에 속한 사람들이, 그 집단이 근거 없는 미움과 부당한 이득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런 패거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질문이 필요하다.

매일 극한 대립과 어정쩡한 타협만 일삼는 이 사회에 회색분자 하나 끼워주자. 처넣고 조용히 시키기보다는 들어보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검찰이길 기원한다.

Sunday, July 6, 2003

미국은 '미첼 위'를 보며 한국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태현 <주장> '위성미'와 'Michelle Wie', 환상과 실망 사이
오마이뉴스 03.07.06 15:12 ㅣ최종 업데이트 03.07.06 13:5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1872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거리에는 애국의 물결이 넘치고 TV에는 영웅의 찬가가 퍼진다.

전쟁영웅의 이야기는 이제는 지난 이야기이고 스포츠의 영웅들이 그간 내준 자리를 되찾고 있다. TV 잠시만 보고 있으면 그날그날의 갖가지 영웅과 그들에 환호하는 '백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묘기에 가까운 야구의 명장면들은 끊임없이 재방송 된다.

어디 야구뿐이랴. 독립기념일 전날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 준결승에서 윌리암 자매들이 벨기에의 숙적들을 물리치고 결승전을 자매들끼리의 것으로 만들자, 올해 처음으로 윔블던 테니스를 중계한 미국 TV 채널 ESPN은 쾌제를 불렀다. 윌리암 자매 말고는 "아무도 초대받지 않았다"고.

골프도 예외는 아니다. 영웅 타이거 우즈의 침체에 초조해 하고 있던 미국 미디어들은 이번주 벌어진 경기에서 그가 보여준 플레이에 안심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우리의 영웅은 괜찮아'라고.

하지만 남자 골프가 미국 영웅들의 자랑스러운 무대가 되어준 것과 달리 여자 골프는 '오랑캐'들의 무대였다. 스웨덴의 아니카 소렌스탐을 선두로 한국의 박세리, 그레이스 박 등 덕에 최근 몇년간 여자 골프에서 미국의 쇠락은 너무나 뚜렸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 오랑캐들의 폭풍이 잠잠해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기대는 새로운 영웅 탄생, 또는 그 탄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 영웅은 다름아닌 바로 미셸 위이다.

미셸 위. 6피트의 장신에서 뿜어저 나오는 가공할 300 야드의 장타, 13살의 어린 나이에서 보여지는 무한한 가능성, 이 모든 것은 그런 기대가 헛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일까. 그녀가 출전하는 경기를 중계할 때면 TV는 줄곧 그녀를 따라 다닌다. 그녀의 스코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선두를 달리는 선수마저도 그녀만큼 카메라를 받지 못하는 수가 종종 있다. TV는 그녀의 미래, 그녀가 구할 미국 여자 골프계의 미래에 흥분해 있고 계속 그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며 즐거워 한다.

미국 독립기념일 아침, ESPN은 그녀와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밝고 자신감에 넘첬다. 패스트 푸드점 같은 데선 일하기 싫어 대학교육을 꼭 받고 싶단다. 하지만 18세가 되어서 프로로 전향하게 되었을 때 수백만불의 계약금이 생기면 어쩌겠냐는 물음엔 행복과 기대에 부푼 미소로 그냥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만 했다.

TV 속 그녀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저임금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거대자본의 속성을 이해 못 해 답답하기 보다는, 그냥 마냥 천진난만하고 맑게만 보였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과 남들의 삶을 이해하기에만 어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나라를 대표해 미국에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에도 아직은 너무나 어린 소녀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그녀가 한민족의 영웅이라도 되는 듯 치켜세우기에 바쁘다. 연일 그녀에 대한 보도, 그녀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에 대한 보도로 그 소녀가 한국을 위해 무슨 큰 일이라도 하는 듯 흥분해 있다. 제목만 보아도 그 관심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다.

<'미셸위 후원회' 결성> (문화일보 2003. 7. 4)
<미셸 위 "프로도 겁 안나요"> (국민일보 2003. 6. 29)
<"올해 화두는 미셸 Wie" NYT등 주요기사 취급> (경향신문 2003. 6. 30)
<'지존'도 위성미 알아주네> (세계일보 2003. 6. 28)
<소녀 위성미 美아마 '퀸'> (세계일보 2003. 6. 24)
<비즈니스위크誌, 미셸 위 상품성 특집…"5000만달러"> (조선일보 2003. 5. 7)

한국 언론은 여기서 지적한 두가지를 잊고 있거나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있다. 첫째, 미국의 그녀에 다한 찬사는 그녀의 미래뿐 아니라 그녀의 미래가 지켜줄 '미국' 여자골프의 부흥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미셸 위를 보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경외나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박세리나 그레이스 박 등을 이야기 할 때면 가끔 그녀들의 모국, 한국에 대한 멘트도 한다. 하지만 미셸 위를 대할 때는 전혀 그녀의 '아버지의 나라'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녀는 독립기념일날 두번째 라운드에서 성조기를 상기시키는 모자를 쓰고 나와서 그런 미국인들의 애정에 응답을 했다.

둘째, 그녀는 아직은 너무도 어린 소녀이다. 잔 다르크도 16세, 유관순도 17세나 되서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모국에서 자국 출신의 2세가 세계최강국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관심을 가져서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그 모국의 위상을 한층 드높히고 한국의 영웅이 되주리라는 무언의 기대는 아직 너무나 버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대이기 보다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녀는 하루하루 경기와 학교생활에 바쁜 13살 미국인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 환상은 가져도 좋다. 하지만 행여나 그녀가 그 환상을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괜히 욕하지 말자. 미셸 위는 '한국의 영웅'이 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이 뭔가? Michelle Wie 아니던가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