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21, 2018

[세상읽기]이 땅에서 걷어내야 할, 질기고 오래된 ‘공포’

경향신문(2018.05.03) 

“완벽한 군인이다. 늘 용감하고, 잠들지 않으며, 적을 놓치지 않는다.” 로봇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인 지뢰를 평한 말이죠. 이렇게 효과적인 무기가 또 저렴하기까지 합니다. 지뢰 하나를 생산, 설치하는 데 싸게는 3달러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적은 다리를 잃고 목숨마저 잃을 수 있습니다. 인기가 있을 수밖에요. 196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 1억개가 넘는 지뢰가 설치되어왔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뢰의 공포는 전쟁이 끝나도 쉬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죠. 숨겨진 지뢰 제거에는 하나에 300달러에서 1000달러나 듭니다. 비용이 많이 드니 뒷전으로 밀리기 쉽고, 이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커집니다. 밭을 일구다, 공을 차다 지뢰를 밟는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개인과 가정의 비극임은 물론 경제 개발에 큰 걸림돌이기도 하죠. 지뢰 제거는 그래서 인권의 문제이자 사회 발전의 당면 과제이기도 합니다.


한번 심어 놓으면 제거하기 힘든 것은 지뢰뿐 아닙니다. 비 올 때마다 한 뼘씩 솟아나는 대나무도 있고, 날마다 뿜어져 나오는 공장 굴뚝의 검은 연기도 있죠. 공포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 공포의 근원에는 좌우 대립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친일 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몰락의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군정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빨갱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부활하죠. 그 공포는 신앙이고 복음이었습니다. 사활이 달린 문제였으니 필사적으로 전파했죠. 한국전쟁으로 정권을 거의 잃을 뻔했던 이들은 자신도 공포를 마음 깊이 심었습니다. 그 공포가 깊어질수록 미국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갔죠.


그래서 이들은 공화당, 민정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바꿨지만, 친미, 반공 말고는 별 사상적 기반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죠. 그 공포만 지키면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공포 장사는 또 얼마나 쉬웠던가요. 북한은 간간이 도발을 해주었고 필요하면 간첩사건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몸서리 치며 입을 닫고 눈을 감았습니다. 유럽에서도 북한 식당 들어가기 겁이 났고, 온라인에서도 종북이란 딱지가 붙을까 눈치를 봤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K팝이 전 세계를 흔들어도 공포는 그렇게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해방부터 이제껏 공포로 연명해온 자유한국당 대표의 최근 발언들은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위장평화쇼” “주사파들이 남북관계를 보는 눈”이라는 독설을 이어갔죠. ‘비핵화 논의’가 안되면 무의미하다며 투정부리다 논의가 되자 ‘북핵 폐기’가 아니라 소용없다며 생떼도 썼습니다. 극우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의 정치쇼일 수도 있고 민심을 못 읽는 무능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웃을 수만은 없죠. 우리 모두의 공포를 대변하는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그 공포를 걷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촛불집회에서, 미투 운동을 통해서 공포를 극복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용기와 연대가 당장 해결책은 아니지만, 괴물에 대한 공포만큼은 이기게 해준다는 경험을 말이죠. 공포가 없어지면 괴물도 허수아비일 뿐임도 수의를 입은 전직 대통령을 통해 보았습니다.


남북 문제의 절반은 우리 마음속의 공포입니다. 그러니 용기와 남북 연대만 되살릴 수 있다면 문제는 뜻밖에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이 더더욱 성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 용기를, 그리고 연대에의 희망을 주었으니까요. 갈 길은 멀고 험합니다. 실패와 실망에도 대비해야죠. 하지만 ‘빨갱이에 대한 공포’를 걷어낸 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그 질기고 오래된 공포를 없애는 참에 지뢰도 제거해야겠죠. 한반도에는 100만개도 넘는 지뢰가 묻혀있다고 알려졌습니다. 휴전선 지뢰 제거는 꼭 필요한 일이고 남북 간의 연대가 필수적입니다. 남과 북이 더 가까워지고 휴전선 일대가 진정한 평화의 영토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죠. 공포와 지뢰가 없어진 그 땅 너머로 우리의 아이들이 농구공을 주고받고 웃음을 이어갈 미래가 기다려집니다.

Tuesday, May 1, 2018

[세상읽기]제1 야당의 ‘빨갱이 딱지’ 붙이기

경향신문(2018.04.05)

총기 살인은 미국 고질병입니다. 지난 2월 플로리다의 고등학교에서 한 범인이 쏜 총탄에 17명이 사망하며 충격을 줬지만, 그 충격이 무뎌지는 지경이죠. 네 명 이상이 희생되는 ‘총기 난사’가 거의 매일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총기 규제는 불가능한 게 현실입니다. 정치적으로 막강한 전국총기협회가 워싱턴 정가를 꽉 잡고 있는 게 주요 요인입니다. 총기 보유를 헌법이 보장하는 탓도 있죠. 총기에 익숙한 미국인의 정서도 한 요인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자면 미국의 탄생 그 자체입니다. 미국 팽창은 원주민에 대한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죠. 그 탓에 미국 전역에 퍼져있던 원주민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들의 피와 눈물이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죠. 살인적 폭력이 미국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승자인 백인들이 총을 사랑할 수밖에요. 총기 폭력은 미국의 원죄라 할 것입니다. 이 원죄를 씻지 않고서는 총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딱지 붙이기는 한국 고질병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의 추악하고 비열한 범죄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되 놀랍지는 않습니다. 이명박 시장 때 이미 많은 이가 그의 저열함을 눈치챘고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의심은 이미 ‘다스’를 향하고 있었죠. 그래도 우리는 이명박을 뽑았습니다. 입맛을 다시는 그의 등짝에 붙어있던 ‘현대건설 신화’라는 딱지와 ‘장로’라는 딱지 덕이었죠.


불행히도 한국 거리는 온통 딱지투성이입니다. 재벌을 옹호해도, 신자유주의를 추구해도 ‘진보’ 딱지는 민주당 이마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백인이면 ‘미국인’으로 떠받들고 흑인은 미국인이어도 ‘깜둥이’로 멸시하죠.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교포’이지만 한국계 중국인은 ‘조선족’입니다. 이 중 최고(?)의 딱지는 역시 ‘빨갱이’죠.


레드벨벳이 평양에서 공연한 2018년에도 제1야당은 사회주의 개헌저지 투쟁본부를 만들고 앉아있습니다. 누구는 윤상 평양공연 예술단 음악감독을 친북인사들과 엮는 웃지 못할 비난도 했죠. 보수정권 때에는 야당을 “종북세력의 숙주” “종북 연대”라면서 조롱했고 “북한 지령에 따른다” “차라리 월북하라”며 규탄했습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통합진보당을 빨갱이로 몰아 해산시키며 그 광기의 정점을 찍었죠.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빨갱이가 아니냐는 의심에 내내 시달려야 했습니다.


모든 딱지는 이성을 메마르게 합니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는 비극과 비극을 넘나들었죠. 빨갱이 선동에 열을 올리며 이명박, 박근혜는 정부를 노리개로 썼습니다. 그 와중에 세월호는 가라앉았죠. 신군부 독재 정부는 저항하는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 때리고, 감금하고, 고문했습니다. 안타깝게 죽어간 이는 박종철, 이한열만이 아니었죠. 그 독재 정권의 시작은 광주 학살이었습니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죠. 1975년 인혁당 사건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은 사형 확정 후 불과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이명박이 수상해도 그냥 찍었듯, 우리는 쉬쉬하며 넘어갔습니다. 나의 안위가 당장 급했지만 그렇게라도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조그마한 딱지라도 하나 있어야 했죠. 권력은 금방 눈치를 챘습니다. 딱지만 붙여놓으면 사람들은 딴 곳만 쳐다본다는 것을요. 그 시작은 1948년이었습니다.


그해 4월3일, 400여명의 좌익 무장봉기가 제주도를 흔들었고 미 군정과 한국 정부는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이름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습니다. 3만여명을 학살했고 마을도 불살라버렸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죠. 살아남은 이들도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을 감추고 침묵으로 버텼습니다. 이들의 피를 쏟고 태어난 대한민국 권력은 빨갱이 딱지에 중독됐죠. 그러니 제주의 피는 대한민국의 원죄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딴 곳만 쳐다보는 사이 뻔뻔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오늘까지 왔습니다. 제1야당 대표는 아직도 빨갱이 딱지 덧대기에 바쁩니다. 다행히 대통령이 사과했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죠. 원죄를 씻지 않고서 우리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명명백백히, 숨김없이 밝히는 일이 급합니다. 온전히 씻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더 급한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