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9, 2014

요조의 뒷모습


우울이 묻어나는 느낌의 요조의 목소리와 기타소리. 그에 장단을 맞추는 뮤지션들. 어울리는 검은 배경. 멋진 무대다. 그리고 그런만큼 요조라는 예술인의 색이 잘 들어난다.

난 요조를 좋아한다. <에구구구>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고 <슈팅스타>를 들으면 깔깔 웃었다. <바나나파티>를 들으면서는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가장 최근의 앨범은 보다 더 대담하고 보다더 깊다. 앨범이 나오고 공연을 할 때마다 달라지는 색깔을 보며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락커의 진지한 노력을 보는 듯 해 기쁘다.

이는 쉬운 것이 아니다. 성공한 지난 앨범에서 그 성공요소를 찾아 재탕하는 것이 쉽고, 더 돈이 많이 벌리는 길일 것이다. 실제로 그런 가수, 많다. 너무 많다. 하지만 요조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고민하고 고생하고 그렇게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계속 찾는다. 창작이라는 예술인의 숙명에 충실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예술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랴. 음식을 해도, 글을 써도, 주짓수를 해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는 노력이 없다면 도태되기 마련아닌가. 특히나 목표가 있었을 때, 그것이 희미해지는 지경까지 도태가 되었다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돌이켜 보고, 또 돌이켜 보고 새롭게 노력을 더해야할 때다.

Saturday, December 27, 2014

이번 주 뉴욕타임즈 - 흑백 갈등

이번주 뉴욕타임즈는 흑백간의 갈등이 한 주요 주제였습니다. 사실 인종의 문제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깊고 복잡한 문제죠. 사회적으로도 그 불평등은 뿌리가 깊고요. 언제 기사가 나오면 여기서도 다루겠습니다. 요즘의 문제는 백인이 주를 이루는 경찰들과 이들이 흔히 두려워하고 범법자로 보는 흑인들간의 갈등입니다. 비무장 흑인 용의자를 죽인 경찰을 기소하지 않기로 하자 흑인사회는 분노로 들끓고 있죠. 이 와중에 뉴욕에선 지난 주 경찰 두명이 보복살인을 당했죠. 이러자 안그래도 나뉘었던 민심이 더욱 갈라지고 있습니다. 흑인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백인을 중심으로하는 경찰지지자들간의 간극이 그것이죠.

이 사이에 낀 것이 바로 흑인 경찰관들입니다. At Home and at Work, Black Police Officers Are on Defensive (12/25/2014). 한편으로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피해자이기도 하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이 백인인) 경찰들의 고생과 스트레스를 이해하는 경찰의 입장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입장에서 고생도 하지만 또 흑인주민들은 이들의 말을 더 존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흑백 갈등이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주에 영화 <셀마>가 개봉했습니다. Film Shows a Selma Some Would Rather Not Revisit (12/25/2014). 이 영화는 알라마바의 셀마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한 영화죠.


1960년대 남부에서는 갖가지 방법으로 흑인들의 선거권을 제한했습니다. 등록을 하러가면 어려운 질문을 해서 떨어뜨리거나 폭력을 동원하는 식으로요. 영화는 이런 남부의 한 마을에 마틴루터킹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흑인 인권운동진영과 백인 인종주의 지방정부의 갈등을 그립니다. 영화가 개봉되자 셀마의 주민들은 불편해합니다. 굳이 옛날 일을 또 다시 꺼낸다는 것이죠. 실제로 옛날에 차별을 한 그 당사자들도 있으니까요. 이제 도시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백인들의 학교는 이제 거의 흑인들의 학교가 되어있고, 백인들은 대부분 사립학교에 갑니다. 도시의 의회도 흑인들이 주도하지만 경제력은 여전히 백인들의 손에 있죠. 사실 이는 남부의 어느 도시를 보더라도 흔한 현상입니다. 킹 목사 등의 운동 덕분에 정치적, 형식적 차별은 사라졌지만 두 집단의 거리는 어찌보면 더욱 늘어난 미국의 현실이죠.

이번 주에는 비지니스 면에 재밌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24일에는 비지니스 섹션을 펼치고서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뭐랄까 좀 흉한 사진덕이였는데요.


Plastic Surgery Tourism Brings Chinese to South Korea (12/24/2014)에서는 성형수술을 위해 한국에 찾아오는 중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에 무리하게 많은 수술을 한번에 해버리는 것에 대한 지적도 있었고 한국배우의 사진을 들고와 이대로 해달란다는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전지현의 이름도 덕택에 거명이 되었죠.

미국에서 요즘 밤에 티비를 틀면 심심치 않게 보게되는 것이 자동차 론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오분이면 차와 현금을 들고 나갈 수 있다며 유횩을 하는데요, 이에 관한 기사가 났습니다. Rise in Loans Linked to Cars Is Hurting Poor (12/26/2014) 집을 담보로하는 론이 까다로와 지면서 자동차 론이 성장을 한 것이죠. 문제는 그 살인적인 이자입니다. 80-500%에 이르는 연이자 덕에 많은 이들이 차를 뺏기고 있다죠. 차는 미국에선 뉴욕과 같은 일부 지역만 제외하면 필수입니다. 그런지라 차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필사적이라고 합니다. 덕택에 론을 주는 입장에서는 아주 쉬운 장사라는 거죠. 이자도 높고, 회수도 잘 되고. 하지만 사람들, 특히나 빈곤계급일 수록 그 피해가 크다는 지적입니다.

이상 이번 주 뉴욕타임즈의 주요 기사들이였습니다.

Friday, December 26, 2014

삐라가 뿌려지는 한국

박근혜의 2002년 방북시 김정일과 찍은 사진과 발언을 담은 삐라가 홍대일대에 뿌려졌다. 삐라에서는 박근혜의 친북발언을 지적하면서 지금의 종북몰이를 꼬집었다. 경찰은 명예회손 등의 혐의가 적용되는지 검토하겠단다.
[속보]서울 홍대 앞서 박근혜 대통령 비난 전단 수백장 살포 - 경향신문 (2014-12-26 )

지금은 21세기다. 한국은 인터넷 최강국으로 꼽히는 나라이다. 그런 곳에서 80년대 유행했던 삐라가 뿌려지고 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은 이미 정부의 모니터링과 조작이 만연하게 되었고, 발언의 자유는 명예회손의 명분으로 심각한 회손이 된지 오래다. 인터넷 초기, 우리는 장미빛 희망으로 들떠있었다. 활발한 토론, 심지어 직접민주주의까지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박근혜의 공안정국의 현실은 그 꿈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가를 빠르게 보여주었다. 결국 길거리 삐라로 나서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일이 뉴스가 된다는 것또한 참담하다. 민주국가에선 반정부 메세지가 잡초처럼 흔한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수첩에 눌려, 경찰버스에 같쳐, 종북몰이에 몰려, 반정부의 목소리는 작고 초라해졌다. 조그만 삐라조차 신기한 세상이 된 것이다. 그나마 경찰의 조사를 무릅써야하는 곳이 지금의 남한이다.

남한은 정말 자유로운 것인가? 자유롭다면 무엇하기에 자유로운 곳인가? 북한에 비해, 프랑스에 비해 얼마만큼 자유로운 것인가?

새해는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Saturday, December 20, 2014

이번 주 뉴욕타임즈 - 러시아 경제위기, 미-쿠바 관계 정상화

이번주 뉴욕타임즈에서는 두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첫번째는 계속되는 러시아의 경제 위기죠. 우크라이나 침공/내전으로 국제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유가의 급격한 하락으로 러시아 경제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오바마가 대러시아 경제제재를 강화할 것을 명시했죠. U.S. Tightens Crimea Embargo to Pressure Russia (DEC. 16, 2014).

루블은 말그대로 반토막이 났고, 더 가치가 하락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현금을 물건으로 바꾸려고 발버둥치기도 하고요. "One Kazakh man was seen walking around a Jaguar dealership, which like several luxury brands had run out of cars, with a little rolling suitcase full of cash. Sales were up 50 percent this month, a manager said."
As the Ruble Swoons, Russians Desperately Shop (DEC. 16, 2014)

유명 칼럼니시트인 폴크루그먼 교수(최근에 플픽사진을 바꾼!!!)는 경제적 요인외에 정치적인 결과도 지적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주요 지지세력들에게 돈을 마구 쓸수 있게 했는데요. 이들의 과소비와 해외투자가 오일에서 나오던 것이고 이젠 그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Putin’s Bubble Bursts (DEC. 18, 2014)


두번째 주요토픽은 쿠바와의 관계정상화입니다. 전격적으로 드라마틱하게--두 대통령이 동시에 티브이 연설을!!--이루어진 것도 그렇지만 지난 50년간의 적대적 관계를 돌이켜 보면 정말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죠. 여기엔 지난 일년 반 동안의 캐나다와 바티칸 등에서 이루어진 비밀회동이 주요했죠. 게다가 교황 프란시스코의 개인적인 노력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Journey to Reconciliation Visited Worlds of Presidents, Popes and Spies (DEC. 17, 2014)

관심은 당연히 경제봉쇄가 풀리면 어떤 경제적 영향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쿠바의 무역을 보기쉽게 해놓은 분석 What U.S. Companies Can Expect in Cuba (DEC. 19, 2014)

북한발 해킹으로 영화<인터뷰>가 내려진 것, 그리고 그에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오바마, 숀팬 등)도 주요 기사였고 토요일에 있었던 뉴욕의 경찰 두명의 사살 또한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Monday, December 15, 2014

그곳의 오늘

한쪽에서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지든 취해 살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엇하나 없어 목숨을 거는, 
그곳. 
그곳. 
그곳.



100억대 벼락부자가 유흥업소에서 난동을 피우고 경찰관까지 폭행, 폭언 "내가 10억만 쓰면 너희 옷 모두 벗긴다” 후 법정구속되고 버려진 그의 슈퍼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151527011&code=940202




뉴욕발 비행기에서 땅콩을 빌미로 승무원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퍼붓고 비행기를 돌려 한 승무원을 내리게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http://www.moneyweek.co.kr/news/mwView.php?no=2014121209548028566





복직을 요구하며 경기도 과천 코오롱 본사 앞 천막에서 40일 째 단식농성 중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옮겨진  최일배 위원장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2670




수도권 최대 유선방송업체인 씨앤앰(C&M)에서 해고된 109명을 대표해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 20m 높이의 광고판에 올라 고공시위를 벌이고 있는 노동자 2명.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1691

Thursday, December 11, 2014

조현아의 '초능력',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서울 시내에서 택시를 후진시켜본 일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후진하자고 말했다간 욕만 실컷 먹기 딱 좋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뉴욕에서 버스도 아니고 대형항공기를 후진시키기도 한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말 한 마디에 뉴욕을 출발해 한국으로 가려던 대한항공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로 이동하다가 후진을 해 사무장을 내려놓았다. 견과류 서비스를 제대로 못한 승무원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덕택에 수백 명의 승객의 객실 서비스와 안전을 책임지는 사무장이 없는 상태로 비행기는 한국까지 날라왔다. 조현아의 고함은 일등석 뒤의 일반석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고 한다.

그런 일로 사람들 다 들리게 고함을 친 것이나 그 고함에 비행기를 '후진'한 것, 또 사무장이 없이 비행을 강행한 것 모두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자연히 지탄하는 목소리가 높다. '슈퍼 갑질,' '진상 손님 조현아,' '이건 갑질을 초월해 법조차 무시' 등의 지탄이 따랐고 국토부조차 위법성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한항공의 해명은 이런 반응과 사뭇 달랐다. 회사측에 따르면, 사무장은 "부사장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규정과 절차를 무시했으며, 매뉴얼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변명과 거짓으로 적당히 둘러댔"고, 회사는 "승무원 교육을 더욱 강화해 대고객 서비스 및 안전 제고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승무원들만 혼난 것이다.

일반 대중들의 분노는 '너무 했다'는 느낌에 기초한 것이다. 너무 했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할 반응에 비교해 과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현아 부사장을 일반적인 대중의 잣대로 판단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제가 과연 옳은 것일까? 조현아 부사장은 보통 사람일까?

조현아는 거대 자본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큰딸로 미국 남가주대 경영학석사 취득 후 대한항공에 입사, 7년 만에 임원이 됐고 곧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계열사 '칼 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를 맡았고 한진관광 등기이사에도 이름을 올렸다.

<미생>을 봤건 대기업에서의 경험이 있건, 이런 승진이 보통 사람에게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본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시대에서 자본가들에게서나 일어나는 소설과도 같은 일이다. 그 소설에서는 자본가들은 고함으로 비행기도 후진시킬 초능력이 있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상은 소설이길 바란다. 나와는 전혀 다른 그들, 그들의 숨막히는 지배와 초능력에 가까운 권력이 소설에서나 나오고, 실제에서는 모두가 비슷하고, 서로 아껴주는 훈훈한 곳이길 바란다. 물론 이 또한 망상인 것을 우리는 뿌연 연무 뒤의 치솟은 빌딩을 보듯 알고 있다. 조현아의 갑질은 그 연무를 걷어내, 우리가 보기 싫은, 검고 높디 높은 빌딩을, 차가운 현실을 온전히 보게 한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현아의 갑질이 우연히 우리 눈에 띄었을 뿐 사실 당연한 것이다. 착한 양반도 있었고, 악독한 양반도 있었지만 어짜피 양반은 양반이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는 그 힘과 권위에서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대한항공의 반응, 조현아 부사장을 말그대로 윗어른으로 모시는 입장에서 나온 반응이 더 솔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번짓수를 잘못 적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현아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에 대한 분노와 성찰이 더 급한 것이 아닐까.

Wednesday, December 3, 2014

[기고]백악관 문서 유출과 청와대 문건 유출


정부 문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망신거리가 되자 대통령은 언론인들과 이들을 접촉한 정부 내 인사의 엄벌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 정부 인사는 정부 문건을 탈취했을 뿐 아니라 안보를 위협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한다.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추악한 미국의 면모를 담은 ‘펜타곤 보고서’가 1971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공개되면서 보인 닉슨 대통령의 반응이다.

펜타곤 보고서는 원래 베트남전 정책에 대한 분석을 위해 국방부가 비밀리에 준비한 것이었고 극비문서였지만 전쟁을 반대한 대니얼 엘스버그라는 군사분석가가 언론에 유출하는 덕에 공개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전쟁이라는 끔찍한 일을 진행하고 있는 정부 정책들이 미국 국민과 의회에 대한 거짓말에 기초하고 있다는 자각에서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정부는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정권을 몰아내고, 디엠을 살해한 쿠데타에 직접 관여했고, 북베트남을 의도적으로 자극해 확전을 도모했으며 북베트남뿐 아니라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이웃 나라에도 공습을 가하는 등 수많은, 추악한 일들을 비밀리에 감행했다.

베트남전의 치부가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이들을 법정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미국의 법원은 언론과 엘스버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보도로 인해 국가안보가 크게 위협받은 것도 명확지 않고, 언론의 자유 또한 국가의 안보라는 이유에서였다. 유출 그 자체가 문제냐, 문서가 담은 그 내용이 문제냐 하는 갈림길에서 후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2014년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정윤회씨 등의 국정개입 의혹을 담은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문건을 “근거 없는 루머” “흔들기”라면서 문건 유출에만 초점을 맞췄다. “국기문란” “적폐”라고 비난하면서 검찰의 수사를 직접 지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 내부 문건이 유출되었으니 대통령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유출 그 자체에 있는 것이냐 그 내용이냐에 대한 판단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는 바쁜 와중에 이런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문제일 것이다. 체면도 말이 아니다. 그러니 유출 그 자체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하지만 문건이 밝히는 대로 정부가 선거에 바탕을 둔 권력이 아닌 비선 실세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면, 사안은 심각해진다. 선거를 통한 국민과 정권의 정당한 관계가 위협을 받는 셈이니까.

그렇다면 유출 내용에 방점이 찍혀야 할 것이다. 많은 국민은 유출된 문건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밝혀서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민주체제를 옹호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

Monday, December 1, 2014

수능과 개헌

학력고사를 보고 난 이후가 생각납니다. 물론 기말고사가 남아있었지만 인고의 세월을 보낸 피끓는 학생들의 해방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죠. 세월은 흘러 학력고사는 수능으로 바뀌고 입시도 복잡해지긴 했지만 수능 다음날의 상황은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수능이 또 끝났습니다. 정답논의가 또 일어났듯, 수험생 사정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한쪽에서는 이곳저곳을 몰려다니며 못다한 유흥을 이어나고 다른쪽에서는 여행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겠죠. 등교를 해도 잠을 자거나 멍하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지친 것은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측도 단축수업이나 각종 변칙운영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학부모들도 애들을 학교에 굳이 보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이때입니다. 교육청에서 아무리 공문을 내려보내고 대응책을 마련해도,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죠.

수능이라는 커다란 시험을 향해 달려온 모든이들에게는 더 이상 학업에 매달릴 여력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는것이 사실입니다. 시험이 없는 학생이 공부할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탈선을 묵인해 주는 것 일테죠. 돌아보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대 가기전 휴학생, 전역을 코앞에 둔 말년병장, 은퇴를 오늘내일하는 직장인 등이 있죠. 모두들 일을 열심히 할 뚜렷한 이유가 없고, 그걸 주변에서도 알고 있다는 것이 비슷합니다.

여기에 추가할 또 하나의 부류가 있습니다. 바로 ‘선거 없는 정치인’입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하고 성실한 학생이여도 시험이 있어야 공부하는 것처럼 아무리 착한 정치인이라도 선거가 있어야 유권자들에게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수능이 끝나면 공부할 의욕도,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 학생이듯, 선거가 없으면 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욕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정치인이죠. 그러니 아무리 민을 향해 도도하고 권위적이여도 다음 선거가 없으면 유권자들로서는 답답할지만 딱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죠. 한국엔 제도적으로 그런 정치인이 딱 하나 있습니다. 한번의 임기로 끝이 나는, 재선이 없는 대통령이죠.



민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낮추려고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도 치를 선거가 없으면 점점 민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다면 그것이 더 빨리, 더 염치없게, 더 확실하게 오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대통령에게 시험을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선거 이전의 겸손을 되찾게 또는 애초에 잃지 않도록 강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죠. 답은 개헌입니다. 4년 중임제면 중간고사가있는 셈이여 낫고, 내각제이면 시험의 불안이 항시 있어 더 좋겠죠.

개헌논의가 정국을 혼란케 하니 논의를할 수 없다는 말은 수능을 마친 학생이 할일도 많은데 학기말 시험이 왠말이냐고 불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 나와도 정국의 핵이 될 개헌논의는 이를 수록 좋고 시험이 많은 방향으로 끝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기왕이면 박정희가 파괴한 제이공화국의 의원내각제를 박근혜의 손으로 복원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Thursday, November 27, 2014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인 오늘, 뉴욕타임즈에 한인이세의 글이 실렸습니다.





일제와 한국전을 겪은 의사가 미국에 와서 추운 미네소타에서 정착하기까지 겪은 훈훈한 이야기죠. 추방 당한 뻔 했지만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불운을 면하고 미국인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그 분은 한국말도 쓰지 않고, 한국문화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죠. 가장 미국적인 명절인 추수감사절은 저자에게 그래서 더욱 추억이 많은 명절인 듯 합니다. 댓글도 따뜻한 이야기다, 고맙다 등 훈훈한 분위기였습니다.

읽는 내내 이민 일세로서 저도 그 아버지의 고통과 좌절, 걱정, 결심 등이 상상이 가더군요.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계속 불편했습니다. 그만큼 미국인이 되기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아버지가 버렸는지, 이 저자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였습니다.

한국인이여서 그걸 자랑스러워 해야한 다거나, 꼭 한국의 무엇을 해야한다거나 생각치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애써 묻어버려야 했던 그분의 쓸쓸함이 상상이 간 것이죠. 물론 저만의 상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분의 추수감사절이 행복하고 미국적인 만큼 그 쓸쓸함이 깊어 보이는 것은 같은 이민일세의 신세인 저의 쓸쓸함이 괜시리 이 글로 스며들어 그런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Sunday, November 9, 2014

기대와 실망

사람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의 연속이다. 기대에서 오는 실망이 가장 큰 슬픔과 괴로움의 근원일 수 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부모는 부모라서 자식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식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가 무너지는 여러가지의 신호를 자식이 보내면 큰 실망이 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신호가 옳은 것인가? 신호가 옳은 것이고 내가 해석을 잘 한 것일까?

아이들은 아이들이여서 부모의 기대만큼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부모의 공을 보는 것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보내는 공이 100이라면 30정보 보면 대단한 아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애가 60을 보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가 아니라 욕심이 아닐까.

아이가 50을 보고 있어도, 즉 아이들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것을 보고 있어도 보고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전달을 못할 수도 있는 법이다. 만약 그렇다면 성급하게 실망을 들어내는 것은 부모의 큰 실수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30, 아니 그보다 더 작은 것을 보는 아이일 수 있다. 즉 내 실망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경우가 되었건 부모는 참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건 자식, 나에게 전적인 의지를 하고 있는 힘없는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인내하며 고뇌하는 하루를 보낸 부모들에게 박수를!

Wednesday, November 5, 2014

[기고]오늘의 한국, 민주체제 맞습니까?

경향신문 (2014-11-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32032245&code=990304


민주체제에서의 정치가 권위주의체제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민주체제는 공정하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해 지도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불편함과 불확실성을 준다는 데에서 그 정치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치란 것이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이라는 것은 민주체제나 권위주의체제나 같죠.

민주체제에서는 정치엘리트 사이의 투쟁은 선거로 결판을 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도적 기제가 없는 권위주의체제에서는 무력을 동반한 암투가 흔하죠. 여기서는 정치엘리트와 인민의 정치투쟁도 폭압적이고 일방적입니다. 민주체제에서는 이런 수직적 정치투쟁도 상대적으로 평화적이고 덜 일방적입니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것일 뿐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민주체제는 그 싸움을 조금이나마 균형 있게 하는 장치들을 허용하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립적인 언론입니다.

정치엘리트와 민중 간의 수직적 정치투쟁은 미국에서도 일상적인 것이죠. 1971년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만행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정부는 이를 국가안보의 위협이라면서 보도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치열한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은 신문사들의 손을 들어주죠. 곧이어 닉슨 대통령과 신문들은 소위 워터게이트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결국 1974년 닉슨 대통령은 사임하죠. 이 두 사건은 미 행정부, 특히나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미국 사회 전체가 심각한 재고를 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승리 뒤에는 한 사람이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지난 10월21일 93세로 세상을 떠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자 벤 브래들리였습니다. 그는 진실에 대한 끈질기고 열정적인 추구로 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습니다.

브래들리의 진실에 대한 추구는 워싱턴 포스트를 권력자를 감시하고 민중에게 힘을 실어주는 민주체제의 파수꾼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은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훈장을 그에게 수여하였습니다. 강력하고 독립적인 언론이 민주체제에서 그만큼 소중한 것임을 권력자조차 인정한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력하고 독립적인 언론은 민과 권력자들의 정치투쟁에서 최소한의 지원군일 뿐입니다. 민중의 힘은 권력자의 그것에 한참을 못 미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시민들은 최소한의 지원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권력자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언론은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고 사정기관들은 민중의 감시에만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에 나서는 것마저 정부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판에 조용히 하지 않으면 법에 걸리게 생겼죠. 박근혜 정부는 민주체제가 그나마 허용하는 민의 권력을 축소하는 데 열을 내고 있다고 짐작하게 합니다. 대통령에 대한 조롱도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고 대통령의 신임을 업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한국, 권위주의체제로의 미래가 그리 머지않아 보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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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4, 2014

풋볼, 미국정치 양극화의 또하나의 모습

Football, the Newest Partisan Divide - NYT (NOV. 4, 2014)


풋볼이 보수층과 진보를 가르는 새로운 척도로 떠올랐다는 기사가 흥미롭습니다. 부상 등 이슈가 되자 풋볼을 하는 학생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요즘 뇌진탕으로 학생이 죽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이 되고 있죠. 문제는 진보적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일 수록 아들들의 풋볼을 더더욱 꺼려한다는 것이죠.

기사에서 지적하듯 사실 풋볼은 거의 세속종교의 위치에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모이고, 숭배하고, 이를 중심으로 작은 사회가 구성이 되는 등 종교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죠.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종교적 위치를 유지한 풋볼의 그 지위에 서서히 금이가기 시작한 듯 합니다. 물론 그 세력이 한동안은 지속되겠지만요.

또한 경제적,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또 한번 확인한 듯 해서 씁씁하네요.

Sunday, November 2, 2014

드가의 '소녀댄서'

가을이라 단풍놀이겸 읍내에 다녀왔습니다. 아내의 제안 덕에 오랫만에 내셔널 아트 갤러리를 갔습니다. 주로 보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잘 있나 확인하고 드가의 특별전으로 향했습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은 익숙하지만 미술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드가의 조각은 생각도 못했죠. 덕분에 그 충격은 신선하고 유쾌했습니다. 



크지 않는 소녀상은 어두운 내부안에 환한 조명을 받으며 한 가운데 위치했었습니다. 마치 무대에 서있듯이요. 당당하게 어깨를 편 모습과 담담한 얼굴은 묘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머리카락과 옷감을 쓰는 기법을 동원해서 사실감을 더했죠. 

하지만 저에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거친 드가의 손길이었습니다. 매끄럽고 하얀 피부대신 드가는 이 소녀의 몸을 어둡고 거칠게 표현했습니다. 마치 화폭에 붓자국이 남은 그림을 보는 듯 했죠. 그런 거침은 그녀가 겪었을 힘든 연습과 삶과 맞겠다고 혼자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지 그 작은 몸집이 더더욱 당당해 보이더군요. 


전시관은 이 작품의 연습인 듯한 조각과 다른 발레 그림도 전시되어 있고 그 중 한 사진은 이 조각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진도 전시되 있어 흥미로왔습니다. 그 속을 보니 조각으로서 볼 법도 한데 어쩐지 더 사람같더군요.

한참을 들여다 보고서야 곧 몸풀기를 마치고 담담한 얼굴로 연습을 시작할 듯한 발레리나와 아쉬운 작별을 했습니다.

National Gallery of Art October 5, 2014–January 11, 2015

Thursday, October 30, 2014

버거킹에서 일하기: 덴마크와 미국의 차이

Living Wages, Rarity for U.S. Fast-Food Workers, Served Up in Denmark 뉴욕타임즈 (OCT. 27, 2014)


덴마크의 버거킹에서 일하는 직원의 모습입니다.
Hampus Elofsson ended his 40-hour workweek at a Burger King and prepared for a movie and beer with friends. He had paid his rent and all his bills, stashed away some savings, yet still had money for nights out.
친구들과 어울리고 저축도 하고,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하지만,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미래를 여기 버거킹에서 키울 야심도 있습니다. 시급이 20달러나 되고 각종 제도가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there are five weeks’ paid vacation, paid maternity and paternity leave and a pension plan. Workers must be paid overtime for working after 6 p.m. and on Sundays. Unlike most American fast-food workers, the Danes often get their work schedules four weeks in advance, and employees cannot be sent home early without pay just because business slows.
5주간의 유급휴가, 출산휴가, 퇴직금, 추가수당, 스케줄을 한달전 미리 통보 등 직원들의 복지에 꼼꼼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미국 버거킹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꿈에서도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미국 페스트푸드 평균 시급은 8.9달러입니다. 한 버거킹 메니저의 시급도 9달러에 불과하죠.
As a shift manager at a Burger King near Tampa, Fla., Anthony Moore earns $9 an hour, typically working 35 hours a week and taking home around $300 weekly.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임금입니다. 옷과 음식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고, 병원도 맘대로 가지 못하는 그는 자신의 시급이 20달러라면 정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Sometimes I ask, ‘Do I buy food or do I buy them clothes?’ ” Mr. Moore said. “If I made $20 an hour, I could actually live, instead of dreaming about living.”

같은 회사에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노조라고 지적합니다. 물론 버거킹이 덴마크에서 시작부터 이렇게 한 것은 아니였죠. 1980년대 맥도날드가 처음 진출했을 때는 미국식으로 경영했고, 노조와 부딫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노조와의 싸움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함을 알게 된 것이죠. But they do, because employees and unions pledge in exchange not to engage in strikes, demonstrations or boycotts. “What employers get is peace,” said Peter Lykke Nielsen, the 3F union’s chief negotiator with McDonald’s. McDonald’s learned this the hard way. When it came to Denmark in the 1980s, it refused to join the employers association or adopt any collectively bargained agreements. Only after nearly a year of raucous, union-led protests did McDonald’s relent.

물론 미국보다 덴마크에서의 수익이 작을 수 밖에 없겠죠. 하지만 경영은 가능하고 이익은 창출됩니다. 아니라면 덴마크에서 장사하고 있을리가 없겠죠.
“We have to acknowledge it’s more expensive to operate,” said Mr. Drescher. “But we can still make money out of it — and McDonald’s does, too. Otherwise, it wouldn’t be in Denmark.”

하지만 노조의 힘과 경제적 정의를 향한 사회적 합의는 이윤추구에 취한 기업의 고삐를 틀어쥐고 있는 것입니다.
“We Danes accept that a burger is expensive, but we also know that working conditions and wages are decent when we eat that burger,” said Soren Kaj Andersen, a University of Copenhagen professor who specializes in labor issues.

한국이 얻어야할 교훈은 어디에 있을까요?

Tuesday, October 7, 2014

[기고]왜 지금 ‘정치 깡패’ 서북청년회인가

경향신문 (2014-10-07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071232212&code=990304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이북 청년 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만들어집니다.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그들은 이승만 정권 입맛에 딱 들어맞는 행동대원들이였죠. 반일 민중세력을 반공정신으로 격파하려던 이승만 정권의 묵인과 지지 아래 각종 정치테러에 관여한 것이 이들입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촉립촉성국민회는 서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고 있으며, 국민회는 또 서청에 돈, 음식, 거주지의 기부를 준비해 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의 폭력과 행패의 폐해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곳은 다름아닌 제주도였습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문건을 보면 제주도는 공산주의 세력이 강한 곳으로 지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추종자들이 많았다기 보다는 좌익 조직을 통해 민족세력이 잘 조직화 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더 가까왔습니다. 좌우 따질 것 없이 좌익조직에 속하는 것이 예사였으니까요. 이들은 미군정과도 유대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실세로 인정도 받았습니다. 미군정으로서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던 이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사실상 없었던 것입니다.

소련과의 냉전이 가열되고 미군정이 안정을 찾으며 이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1947년 삼일절 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사상자가 생기고, 엄중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파업에 경찰, 관공서를 포함해 섬전체가 참여하다 시피하자 미군정은 당황합니다. 검거열풍이 불어닥치고 섬의 경찰을 믿을 수 없다고 육지경찰까지 동원되죠. 이어 4월 제주도지사로 발령된 유해진이 데리고 온 경호원이 서청단원들이였습니다.

이후 수백명으로 커진 서청은 경찰도 손을 못대는 정치깡패로 성장했습니다.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강매하고 경찰보조 역할을 수행하며 아무나 잡아들여 폭행을 가했습니다. 뇌물 수수, 보호명목의 갈취도 예사여서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럴수록 제주도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커져갔고 저항과 억압의 고리가 이어졌죠. 이는 곧 1948년 무력항쟁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4.3항쟁중에도 서청은 경찰과 군인으로 변신, 진압작전에 앞장을 섰고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500명 남짓한 무장대를 섬멸하기 위해 당시 30여만 인구중 약 5만명의 제주인을 죽인 끔찍한 사건의 한가운데 서청이 있는 것이죠.

이런 서청을 잇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시청앞 노란리본을 띄겠다며 애국청년들의 궐기를 촉구한 ‘서북청년단재건준비위원회’의 면면을 보면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의 회원,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창립 발기인, ‘구국을 위한 행동하는양심실천운동본부’ 대표 등으로 친정부-극우의 한 자락임을 짐작케 합니다. “왜 세월호를 박근혜 대통령 책임으로 몰고 가느냐”며 나라의 지도자를 법과 정의의 우위에 두는 발언을 보면 그 짐작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왜 하필 굳이 서청을 재건하려고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정부의 비호아래 정적과 민중을 짓밟고 죽이던 전통을 잇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굳이 서청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일까요? 애국이라는 이름하에 법과 인권을 무시하고 공포와 침묵을 강요하는 전통을 잇고자 한는 것이 아니라면 왜 굳이 서청을 재건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피에 물들은 현대사를 기억하는 우리는 박근혜 정부의 반응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승만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이용해 공포와 폭력으로 정국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그래서 이승만 정권처럼 역사에 불행하게 기록되고 싶지 않다면 박근혜 정부은 이들에 대한 조사와 대응을 신속하고 엄정하게 할테니까요.

Tuesday, September 16, 2014

참수된 폴리 기자의 가족들 이야기

For James Foley’s Family, U.S. Policy Offered No Hope (The New York Times 2014.9.16)

얼마전 참수당한 폴리기자에 관한 기사. 유럽사람들과 같이 억류되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한명을 제외하고 다 풀려났지만 미, 영 시민들만 참수를 당한 사연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결국 이 두 국가의 테러리스트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정책에 희생이 당한 것인데요.

폴리 가족들은 ISIS의 연락을 받고 바로 FBI에 연락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가 무엇을 하는지 비밀에 부치고 가족들에게 테러리스트들과 연락/교섭/몸값제공은 불법이라고 엄포를 놓죠.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도 납치가 된 사실조차 모르고 몇달을 보냅니다.

“The F.B.I. didn’t help us much — let’s face it,” Diane Foley said in a telephone interview. “Our government was very clear that no ransom was going to be paid, or should be paid,” she said. “It was horrible — and continues to be horrible. You are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결국 정부가 해주는 것이 없다는 좌절감에 기금을 모으기 시작하고 정부도 눈감아 줍니다. 돈을 줄 기미가 없자 ISIS측에선 포로교환을 제시하지만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와중에 미정부가 알카이다 포로를 교환하자 폴리의 가족들은 어쩔줄을 모르죠. 미정부의 반응이 ISIS를 계속해서 화나게 할 뿐이라고 걱정은 깊어만 갑니다.

이에 반해 유럽국가들은 납치즉시 재빠르게 직접 교섭을 챙깁니다. 납치를 국가안전으로 봄으로써 직접 개입해서 석방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죠.

A crisis cell was activated inside the Foreign Ministries of France, Spain, Switzerland and Italy, staffed around the clock with people working in shifts, said a European counterterrorism official who has worked on numerous hostage cases and was briefed on the negotiations with ISIS.

They waited for the kidnappers to reach out, and when they did, the intelligence services of at least one country took over the email accounts of family members, responding directly to the terrorist group, according to a person with direct knowledge of how the negotiations unfolded.

As early as February of this year, the Europeans proceeded from requesting proof of life to making a ransom counteroffer, according to a person closely involved in the crisis who said the average sum negotiated per person was around €2 million.


미국정부 관료는 유럽국가의 이런 방침으로 인해 유럽인들이 더 타겟이 되고 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표적이 덜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납치하는 순간, 프랑스인과 미국인을 가려가며 납치를 할까 하는게 또 비판이죠.

“What is hard to prove is how many Americans have not been kidnapped as a result of the fact that the enemy knows they will not get a penny from us,” said Gen. John R. Allen, who recently retired as the top commander in Afghanistan.

그 와중에 미군의 ISIS에 대한 폭격이 있고, 마지막 이메일이 도착합니다. 이들은 교섭을 거부한 미국정부를 비난하고 그 값을 폴리 기자 등이 치를 것임을 알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참수현장을 인터넷으로 목격하게 되죠.

“You were given many chances to negotiate the release of your people via cash transactions as other governments have accepted,” said the email, published by GlobalPost. “We have also offered prisoner exchanges to free the Muslims currently in your detention like our sister Dr Afia Sidiqqi however you proved quickly to us that this is NOT what you are interested in,” they said. “You and your citizens will pay the price of the bombings.”


국가가 안전을 어떻게 보는지, 이를 바탕으로 정책을 어떻게 세우는지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 와중에 개개인이 겪는 이런 아픔이 있음을 새삼, 아프게 배우게 됩니다.

“It was a very, very frightening place to be,” Ms. Foley said. “And other countries do this better,” she added. “I would hope that our government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s looking deeply at this issue, and we pray that by doing so, Jim’s death will not be in vain.”

박통의 지휘봉


박 대통령 “대통령 모독 발언 도를 넘고 있다” (한겨레 2014
.9.16)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지금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자는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결단을 하라고 한다”며 세월호 유족들의 요구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

국무회의에서 마치 국민전체에게 말하는 듯한 말투...
자신의 한마디면 움직일 새누리당 지도부와 의원들을 거느리면서 한다는 소리가 대통령이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특별법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것과 다름이 없죠. 여야합의안에 대한 선을 자상히도 그어주는 것을 보면 청와대가 지휘봉을 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번 여야의 2차 합의안은 여당이 추천할 수 있는 2명의 특검 추천위원을 야당과 유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추천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이는 특별검사 추천에 대한 유족과 야당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여당의 권한이 없는 마지막 결단이라고 생각”

꽉막힌 정국, 세월호 특별법 처리 등에 관한 비난의 화살이 대통령으로 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Friday, September 12, 2014

법치와 민주주의

사법계혁은 절실하지만 전문성이 강한 영역인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창비164 (2014년 여름)호의 대화는 그런 면에서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그 중 일부 흥미로운 부분을 간추려 보죠. -- 김두식 (경북대 교수), 백승헌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전수안 (전 대법관)


백승헌: 민주주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의 사회나 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도 ... 법에 의한 통치는 있어오지 않았습니까. 법치주의가 법에 의한 지배만을 말한다면 꼭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붙어 있어야 되는가, 그건 아니라고 봐요.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법에 의한 지배뿐 아니라 법의 평등, 접 앞의 팡등이라는 개념이 법치주의의 필수요소로 인정되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법치주의가 가능해진 것 아닌가 합니다 (195쪽).

미처 생각치 못한 부분이였습니다. 그리고 참 공감이 가더군요. 진시황의 법가통치는 법이 칼이였던 사회였죠. 한국의 군사독제체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주체제가 들어서면서 법의 칼날을 민의로 길들이기 시작한 것인데요... 하지만 아직 그 길들이기가 진행중이라는 것은 명확하고요. 이런 면에서 법치주의가 민주체제의 밑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 민주체제라는 것의 권력이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면 법치주의가 법가통치와 구분이 힘들어 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승헌: 법치주의란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잡든, 어떤 검찰이 있든, 어떤 사법부 판사가 사건을 담당하든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198쪽) 

말 그대로 법에 의한, 사람에 의하지 않은 통치... 사람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성 있는 법의 잣대가 사용되는 그런 통치.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일관성이 커지는 방향으로는 가야하는 것이 맞겠죠. 우리가 이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삼심제도 그런 면에서 발전이라고 봐야할테고요.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되면서 돌변한 검찰을 보며 제도의 강화가 더 필요하다는 것, 많은 분들이 공감하셨을 것입니다. 법치주의의 길이 멀다는 것을 검찰이 몸소 보여주고 있으니 참 역설적입니다.

전수안: 대의민주주의가 선출된 권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라면 법치주의는 권력이 솟아오르는 순간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밖에요 (199쪽). 백승헌: 선출된 권력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권력행사가 정당하다는 순환논리에 빠진다면 법치주의는 설 길이 없습니다 (205쪽). 

법은 힘있는 자의 횡포를 막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힘 없는 사람은 법이 있거나 없거나 사실 비슷하거든요. 남에게 해를 입혀도 그 범위가 좁은 것이 보통이고 힘이 있는 자를 두려워 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힘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이 입히는 사회의 해악이 크고 범위도 넓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할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없으니 사회의 근본적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권력자에게 더욱 엄정하게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김두식: 누구를 믿느냐는 것은 결국 증명력 판단 문제인데, 한쪽은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되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조직에서 살아 남는 걸 포기한 채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혼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누구를 믿어야 할지가 자명한데 ... (201쪽) 

이런 상황의 전반을 살펴보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혜를 사법부의 관리들이 없는 것은 아닐테죠. 없지 않다면, 어떤 이유로 그 상황을 왜곡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요?

전수안: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가 위조된 증게에 의해 수사를 받고 어쩌면 유죄판결을 받을지도 모르는 사회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요. (204쪽)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은 우리가 그만큼 독재의 과거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 함을 보여줍니다.

전수안: 범인을 모두 기소하겠다는 정의감도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기소하지 않겠다는 정의감도 소중하다는 것을 더욱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 결국 검찰의 개혁은 검찰 인사의 객관성과 투명성 확보 없이는 어렵다고 봅니다. 공정하고 정의감 넘치는 개별 검사들을 인사권자의 부당한 지시와 압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장치가 필요하다는 거죠.  (221-2쪽).   

김두식: 검사가 판사보다 더 일찍 승진하고 일찍 물러나야 하는 구조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간 상태에서는 현정부 5년 안에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게 아주 중요해집니다. 그러지 못하면 몇년 안에 지금 자리에서 옷을 벗고 나와야 하니까요. 검찰 상층부는 인사권을 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결국 자꾸 무리한 기소를 하게 됩니다. (224쪽) 

그러나 이 개혁의 필요성을 몰랐던가요.. 다들 권력을 쥐면 검찰의 맛에 길들여 지고, 개혁은 뒷전이 되는 것이 보통이였죠. 그러다 정권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다시 검찰의 눈치를 보게 되고.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맬 쥐가 필요합니다..  






 







Friday, September 5, 2014

[기고]억지와 침묵의 답답함

경향신문 2014-09-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9051925205&code=990304

잘잘못을 따지다가 정 안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 뭐야?” 이 말은 연령차가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선 “너 몇 살이야?”로 변형돼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말은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와 너의 관계로 일을 해결해 보겠다는 억지라는 데서 기본적으로 똑같습니다. 당신 뭐야라는 물음은 당신이 어떤 권위가 있어서 이렇게 따지느냐는 물음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권위의 있고 없고의 문제로 변질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죠. 대개 이런 말은 자신의 사회적 권위가 상대방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 먼저 꺼내기 마련입니다. 너 몇 살이냐는 물음도 같습니다. 나이가 곧 계급인 사회에서 계급을 밝히라는 것이죠. 물론 딱 보기에도 나이 든 사람이 묻는 게 보통입니다.

이런 억지에 “내가 누군 줄 알기나 해?” 또는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이렇게 반응하면 그 덫에 걸려드는 셈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뒷전이 되고 상대편의 권위에 맞서는 나의 권위를 찾기에 바쁩니다. ‘내 주장이 옳다’는 ‘내가 더 낫다’로 바뀌는 것이죠. 물론 이는 애초에 상대가 원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상대는 자신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빠르게 깨달은 후이니까요. 논의가 변질되면 애초의 시비를 따지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답답함만 더해가죠.

답답하기는 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데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경우엔 정말 환장할 것 같죠. 그나마 상대방이 친한 사람이거나 아랫사람이라면 불러서 호소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윗사람이어서 불러 앉힐 수도 없는 경우엔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 답답한 침묵은 나와 상대의 힘의 관계를,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힘이 없다는 사실을 더 뼈아프게 보여주기 때문이죠.
상대의 침묵이 지속되면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됩니다. 그 침묵 자체가 논란거리가 되기 때문이죠. 어느덧 시비를 따지고 싶은 쪽은 상대방의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물론 그래야 시비를 따질 수 있어서이기는 하지만 그 침묵이 유지되는 동안 상대방은 논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침묵을 지킬 수 있는 여력 또는 권력이 있는 쪽이라면 그쪽으로선 더 바랄 것이 없겠죠. 

이렇게 교묘한 억지와 간교한 침묵에 빠지는 것을 상상해 보시죠. 정말 답답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낯설지는 않지요? 이 불쾌한 낯설지 않음은 4월16일 이후 세월호 정국을 헤쳐나가고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사생활을 탈탈 털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자격이 있는지, 어떤 흠이 있는지로 논의를 변질시켰죠. 또 다른 한쪽으로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함으로써 ‘대통령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대답하라’고 요구하는 사태를 성공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가, 얼마만큼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고,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그만큼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지금의 사태가 진실을 밝히고 시비를 가리는 데 발목을 잡고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나아가 저렇게 무능한 정부가 왜 필요한지, 어떤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한다는 데 있어서도 큰 걱정인 것이죠. 정부가 정당성을 잃으면 가장 큰 피해는 또다시 민중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떨어지니까요. 이런 걱정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국정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고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커다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을 모르나 봅니다. 억지와 침묵을 당장에 걷어내고 대통령의 의무에 충실할 것을 엄중히 요구합니다.

Sunday, July 20, 2014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


  •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에 관한 간단한 뉴욕타임즈의 Daily Update
  • The Guardian의 가자 지구 관련 기사 모음


Friday, July 11, 2014

[시론]‘인조의 실수’ 21세기엔 반복 말아야


경향신문 2014-07-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112101465&code=990303

2005년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동북아 균형자론’을 소개했습니다.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동북아시아에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자는 구상이었죠. 하지만 미군의 보호와 안보를 동일시하던 이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렸고, 보수 신문들은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은 이를 “과대망상”이자 갈 데까지 간 “반미(反美) 바람”이라고 평했습니다. 현실을 무시한 구상이고 결국 한국은 외교무대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게 주장의 골자였습니다. 결국 이 구상은 구체적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잊혀졌죠. 하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균형자의 역할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요.

2005년만 해도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전 세계에 최첨단 전쟁수행능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특히 중국이 가진 좌절은 매우 큰 것이었고, 중국 군대의 폭발적 현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4년의 중국은 항공모함을 갖고 스텔스 전투기를 판매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게다가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를 거치며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중국이 세계무대에서 미국과 패권을 다투게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패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베 정권의 일본 군국주의 부활 신호탄을 미국이 환영하는 것과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이 북한을 제쳐두고 한국을 먼저 방문해 임진왜란을 들먹이며 두 나라의 오랜 연대와 대일 공조를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죠. 불쑥 성장한 중국과 이를 경계하는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딱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 중 어느 쪽도 우리는 멀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미래를 쥐고 있는 나라니까요. 두 나라 사이에 패권다툼이 격해질수록 우리의 입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좋건 싫건 균형자의 역할을 해야 하죠. 그것도 아주 잘해야 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의 폐위를 알리는 인목대비의 교서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논하며 후에 청이 되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균형자의 노릇을 한 것을 듭니다. “광해는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로 만들었다.” 이 숭명반청의 이데올로기에 갇혀버린 인조의 정권은 강해져만 가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적극적인 실리외교를 통해 균형자의 노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오랑캐를 운운하며 후금의 신경을 되풀이해서 건드리고, 결국 청황제의 조선 정벌을 초래합니다.

인조 정권은 기존의 세력인 명과 성장하는 청 사이에서 양쪽과의 거리를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하나를 제압할 수 없도록 적당히 균형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양쪽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자주국방의 힘을 키워 두 나라 모두 조선을 내버려 두도록 해야 했죠. 균형자의 노릇을 잘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딱 지금의 한국의 사정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국운이 흔들리고 있어도 인조는 개혁은 고사하고 반정공신의 입김에 휘둘리며 실책에 실책을 거듭했습니다. 군대는 안보를 포기하고 정권 지키기에 바빴고 일반 백성은 온갖 의무와 세금에 절규했습니다. 인조는 “내가 용렬하여 시비를 분별하지 못했고, 게으른 데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며 사과만 되풀이했지 정작 절실했던 행동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했습니다. 이 또한 지금의 한국 사정과 비슷해 보입니다.

정작 절박한 사명은 못 본 채 정권 유지에 모든 것을 희생했던 인조의 실수, 21세기에 와서도 되풀이하면 안될 것입니다

Tuesday, July 1, 2014

‘예의염치’ 없는 한국 정치

인사이트 2014/07/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4070&Code1=001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화교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건물 정면에 크게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교훈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의는 예절과 의리를 말하는 것이고 염치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갖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일컷는 것이죠.

이 예의염치는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 난징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국민당 정부가 사용한 국가 통합의 유교이념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실패한 정부의 이념의 핵심이지만 살아남아 화교들 사이에서 그 정신이, 멀리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인상적인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세고 돈이 많아도 신세를 질 수 밖에 없고,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이라도 사회에 공헌을 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게 하니 미안한 것이죠. 미안한 만큼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염치가 있어야 상대방도 귀찮더라도 도와줄 공산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당장 주변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불쾌해진 사람들은 도움에 인색하게 되기 쉽습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늘수록 사회전체가 각박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많은 실정을 되풀이 했습니다. 특히 세월호 정국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 둘이 아니죠. 그 걱정거리 중 하나는 이 정부는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창극 총리 지명자는 교회 등 과거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없다”는 등 일반적 역사적 인식에 반하는 발언으로 국가적 공분을 일으켰죠. 하지만 본인은 아무 문제가 될 태도로 두 주를 버텼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노와 실망은 더욱 커지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사퇴를 하는 마당에도 “언론이 전체의미 왜곡·훼손” 주장하고 “여론은 변하기 쉽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한다며 여론에 굴해야하는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가문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바로 세월호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를 한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킨 것이죠.

새로 구성했다는 내각을 들여다보면 임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논문표절, 병역, 재산 형성, 과거행적 등 전형적인 지도층의 문제를 하나 둘씩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정홍원을 유임시킴으로써 세월호에 책임지는 지도자는 결국 전무한 셈이 되어버렸죠.

이를 보는 국민들은 얼굴이 화끈 거릴 노릇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야 답답하지만 사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간 대국민 사과를 미루어온 박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해하는 국민들이 더 답답할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는지, 왜 자기를 비난하는지 이해가 안 가겠죠. 이해가 안 가니 답답하고, 미안해 할 일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염치가 없는 것이죠.

하긴 평생을 남에게 군림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겨온 이들이 남에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많은 신세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총리, 장관의 권력은 무시무시합니다. 공권력을 주무르고 법과 정의를 재단합니다. 지금처럼 한 정당이 대통령직과 국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을 때는 그 정당의 권력은 정점에 달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릅니다. 안정과 안전을 보호할 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평안을 지켜야합니다.

향응에 취할 때가 아니라 막중한 책임에 잠이 잘 안오는 게 정상일테죠. 게다가 이러한 권력은 국민들의 양해를 통해 잠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민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죠. 권력이 센 만큼 더 몸을 숙이고 겸손해야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담화만 거듭하고 이마저 질문 하나 받지 않는 이 정권은 기본적인 민주적 의무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듯해 안타깝습니다.

한국처럼 소수자들이 살기 힘든 땅에서 살아야 했던 화교들로서는 염치라는 덕목이 더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선 한국인들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앞으로의 처신에도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소수, 약자들에게만 염치가 소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강위의 작은 쪽배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유유히 떠있게 하는 것도 강물이고 배를 뒤집는 것도 강물인 것처럼, 군림하게 하는 것도 국민이고 갈아치우는 것도 국민임을 알아야 하겠죠.

그러니 그 쪽배들은 염치라도 있어야 될 듯합니다.

Monday, June 16, 2014

[시론] 월드컵 세월호

한겨레 2014.06.1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2593.html


2002년 6월13일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 학생은 친구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모여 의정부로 놀러 가기로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주한미군 보병 2사단 대대 장갑차에 깔려 처참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쳤으니까요. 흔히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알려진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조별 예선이 끝나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11~12일 A조와 B조 경기가 있었고, 사고 당일엔 C조의 두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날 두 학생이 사고를 당한 것은 오전 10시30분께였고 오후 2시 반에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다음날인 14일에는 미 보병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는 등 사고 수습에 나섰고, 인천과 대전에서는 D조 마지막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천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기록하며 포르투갈을 이겨 온 나라가 환호한 것이 이날이었습니다. 당시 여론은 온통 월드컵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한겨레> 15일치는 1면에 “꿈의 16강 마침내 해냈다”라고 보도하는 등 온통 월드컵 기사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반면, 두 학생 사건에 관해 한겨레는 14일치 18면에 “미군차량 치여 여중생 2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간단하게 다뤘습니다.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언론에서 거의 사라졌던 이 사건은 6월 말이나 돼서야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7월31일, 49재를 기폭제로 시위는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무죄 판결 이후 대규모 촛불시위로 이어졌고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녀의 죽음은 언제나 슬픈 일이지만 효순·미선 학생의 경우는 특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죽음이 외국 군대의 행위에 의한 것이었으니까요. 외국군 주둔에 익숙한 우리지만 사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첫째로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안보를 다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헌법적 문제이죠. 나당 연합군의 끝을 보아도 그렇고, 청나라에 기댄 조선의 신세를 봐도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외국 군대의 주둔은 늘 이들에 대한 제도적 특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외국군 범죄가 본국의 법정에서 다뤄지는 일이 극히 드문 것은 한국만의 예가 아닙니다. 요컨대 이 사건은 나라가 시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대응도 할 수 없는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렇지만 효순·미선 학생의 죽음은 처음에 외면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월드컵이 거기에 큰 몫을 했죠. 사건 발생 뒤 두 주가 지나 새삼 작은 관심이라도 끌기 시작한 것은 독일-브라질 결승전(6월30일)과 함께 월드컵이 끝난 것과 과연 무관했을까요? 많은 이들이 뒤늦게나마 이를 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월드컵의 열기에 취해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죠.

이제 2014년 월드컵이 시작됐습니다. 홍명보호에 눈길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치맥과 환호성, 그리고 한탄이 거리에 가득하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 사태의 전모를 파헤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도 10여명이 실종 상태입니다. 선원들에 대한 재판은 이제 시작이고 아직도 유병언 일가는 오리무중입니다. 정부의 대처는 사건 때만큼이나 늦고 비효율적이며, 정부나 국회는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태가 한국의 민낯을 까발렸다고 탄식한 지 두 달이 됐지만 한국은 세월호 이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입니다.

월드컵의 열기에 취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자던 2002년의 다짐, 잊지 않는 2014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Monday, June 2, 2014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 남태현
경향신문 2014-06-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12030465&code=990304

미국은 풍자의 천국입니다. TV에서 코미디언들이 정치인들을 희화화하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입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죠. 인터넷에서 오바마의 사진을 찾아보면 온갖 희화와 조롱이 난무합니다. 심한 것은 화제가 되기도 하고 오바마 또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1년에 한 번 백악관이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모아 만찬을 여는 자리에서 코미디언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것이 백악관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런 풍자를 거의 20년을 보아서 이제는 일상적으로 느끼지만 처음에는 나라의 지도자를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걱정 반, 부러움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님인데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처음에 가졌던 그런 생각은 애초에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은 나라님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안 볼 때는 나라님 욕도 한다죠. 거꾸로 보면 볼 때는 하면 안된다는 소립니다. 이제는 그냥 하는 소리가 됐지만 옛날에는 정말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나라님을 바꾸는 공론만으로도 삼대가 멸하는 조선이었죠. 왕조시대엔 동서 어디나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멀리 아랍의 왕조국가들까지 갈 것도 없이 가까운 데 있는 태국만 가도 국왕을 욕하면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고 실제로 이 법으로 반정부 인사들이 처벌을 받기도 하죠.

이들 국가는 나라의 주권이 왕조의 정통성에 근거하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들입니다. 조선왕조는 말할 것도 없고, 헌법이 국민주권을 명시한 태국 같은 경우에도 정치문화가 왕조와 주권을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체제에서는 왕을 욕하고 풍자하는 것은 나라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처벌이 정당화되는 근거죠.

하지만 국가의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체제에서는 정부 지도자를 희화화하는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임받았기에, 다른 국민에 비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희화와 조롱에 너그러워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자리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그런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권력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화와 조롱에 발끈하는 대통령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첫째로 민주체제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라님이라도 됐거나, 나라님을 모시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면 자신 또는 그분에 대한 어떠한 희화나 조롱도 참을 수가 없을 수 있습니다. 나라님인데요. 대통령 개인에 대한 조롱이 아닌 나라 전체의 조롱인 셈이 되는 것이죠.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둘째로 이들은 국민의 조롱에 신경이 쓰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의 권력이 포스터나, 코미디, 농담 등으로 약화되었거나,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정당성에 자신이 없거나, 정당성이 약화되었다고 판단을 했을 수 있죠. 어찌되었건 그런 판단을 했다면 조롱이 실제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정당성이 더욱 약화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들로서는 그런 조롱을 막는 것이 심각한 정치적 사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주체제의 원칙에 충실하고,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으로써, 자신에 대한 희화나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대통령들이, 그런 대통령을 갖고 있는 국민들이 무척이나 부러운 요즘입니다.

Sunday, June 1, 2014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남태현
창비 2014년 04월 01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파헤치며 현 한국사회의 정치를 진단하는 책이다. 저자는 정치의 참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 즉 우리 안에 굳게 뿌리내린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직시해야 한다고 명쾌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믿고 있는 선거제도 자체가 민의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한계 안에서 진정한 변화는 ‘나는 투표했다’라는 자위를 넘어선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근래 한국정치에서 보인 ‘다른 정치’의 증후군들을 점검함으로써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영어계급사회> 남태현

오월의봄 2012년 02월 07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왜 한국인은 평생 영어를 공부해야만 하는가?
영어를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세계화’ ‘국가 경쟁력’의 허구를 밝히고 대안을 찾아본 책

흔히 세계화된 사회에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영어가 필수라고 말한다. 과연 이 이데올로기는 맞는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는 진짜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일 뿐이다. 우리는 미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고, 미국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왔을 뿐이다. 이토록 영어를 숭배하는 것도 미국화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미국은 이미 조각 난 하늘일 뿐이다.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진정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고 싶다면 영어도 일본어, 프랑스어, 러시아, 아랍어 등과 같이 하나의 외국어로 간주해야 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우선 대학입시에서 영어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를 다른 외국어와 동등하게 대우해 똑같은 점수를 책정해야 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원시험에서 영어를 필수과목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꼭 필요한 부서에서만 영어를 필수과목으로 하고 나머지는 영어를 아예 보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보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전 국민이 똑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계급 간의 격차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이와 더불어 경쟁만능주의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모순도 처방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6-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3345&Code1=001


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딸 고희경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리 남매를 버리고 돌보지 않은 내 아버지 고승덕은 서울시교육감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며칠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고 후보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고 앞으로 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고희경씨의 주장에 고승덕 후보도 할 말이 있을테죠.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주관적인 것이므로 양측의 주장을 들어보고 잘 판단을 할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딸이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고희경씨의 이름은 캔디 고로서 미국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생활을 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고씨의 글도 간결하고 명확한, 좋은 영어로 작성이 되었습니다. 고씨의 지적에 따르면 고후보는 가족을 돌보는데 일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금전적 도움은 고사하고 옆을 지켜주지도 않았고 연락조차 완전히 끊은 채, 사실상 두 자녀와 처를 완전히 내팽개친 것으로 보입니다. 고씨의 주장은 이러한 고 후보의 개인적 행위를 볼 때 다른 자리도 아닌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으로서 고후보는 적합지 않다는 것이죠.

이러한 비판은 고후보의 자질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단서의 일부이며 유권자로서 꼭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씨가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능했겠죠. 하지만 여러분 모두가 짐작하시듯, 그 가능성이라는 것은 사실 한여름 해운대에서 군고구마 찾는 것만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헛점이 너무나 많아 공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한국의 풍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본능적으로 나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연민의식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한국사회에 오래 뿌리를 내린 소위 유교적 전통에 따른 부모 공경의 의무감또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집단을 배신한 개인에 대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한국에선 중요한 것이죠. 이런 식의 공포는 사실 조폭들 뿐 아니라 조직을 중요시 하는 한국사회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선배를 무시한 후배, 고참을 깐 신참, 상사를 재낀 회사원들의 삶이 고달픈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조직의 화합을 해쳤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형태의 형벌을 받습니다. 더우기 형벌은 그 집단 내에서 그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죠. 덕택에 집단의 단결은 공고해 지지만 집단의 결함 또한 깊어지는 까닭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갖고 있지만 누구도 쉽게 던저버리지 못합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니까요. 게다가 적당히 굴러갈 때 떨어지는 떡고물 (연대감, 술자리, 자리, 이권 등) 또한 작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쩌다 한번씩 보는 영웅적 굴레 던저버리기에 환호하게 됩니다. 히딩크 감독의 서열무시에 우리는 찬사를 보냈고, 박칼린의 합리적 지도력에 감탄했습니다. 이들 모두 연줄, 서열 등을 무시한 채 개개인의 능력만을 보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그 집단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는데 새삼 놀랐던 것이죠.

이들의 리더십을 배우자는 열기는 뜨거웠지만 냄비처럼 식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집단에의 중독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오늘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집단의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요. 일의 능률과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되고 우정과 의리가 쌓이고 쌓여 우리는 세월호 참극을 맞았습니다. 끊임없는 향응과 접대로 쌓아온 집단의식은 그 어떤 규제와 법률, 양심도 무너뜨릴만큼 지독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한 정치의식 또한 마친가지입니다. 정치지도자의 공과는 상관없이 우리편만 찍어온 우리내의 정치는 이제 우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남을 욕할 일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집단의 중독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요?

우리가 절실한 것은 이 집단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대신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토론하고 고처가고, 심지어는 법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산은 산이라하고 물은 물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 이의 세월호 참사, 제 이의 삼풍 백화점 붕괴, 제 이의 성수대교 붕괴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고희경씨에게 힘든 결정을 한 것에 대한 감사와, 아버지가 없어 느꼈던 고통에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Friday, May 16, 2014

선거를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한 심판 나타날까?


선거를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한 심판 나타날까?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5-16


http://insight.co.kr/content.php?Idx=2805&Code1=001




6·4지방선거 후보 등록이 오는 15~16일 이틀간 진행됩니다. 본격적인 선거전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온 셈이죠. 지방자치의 수장을 뽑는 일이니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재정을 바닥내는 자치단체장도 있고 반면에 여러 정책으로 지방정부를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이도 있으니 살펴볼 것이 많죠.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아무래도 세월호의 여파를 피하지 못할 듯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죠.

이미 새정치연합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는 6일 기자회견을 갖고 특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김한길 대표는 “희생자 유가족들이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며 “살릴 수 있었던 아이들과 승객들을 살려내지 못한 책임을 가리는 일은 정부에서 자유로운 특검이 맡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이 바탕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야당으로서는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세월호 여론을 선거 때까지 끌고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생각이고, 야당의 책임이라고 할 것입니다.

정부와 여당으로서는 지방선거와 겹치는 시기이니 이러한 요구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이 “사고 수습 이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역풍에 휘말리자 이를 덮으려는 듯 대통령과 여당을 향해 비겁한 정치공세를 벌이고 있다”며 청와대를 엄호한 것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반응이었습니다. 사고수습을 강조함으로 해서 세월호 사태와 지방선거를 할 수 있는 만큼 분리해 역풍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 또한 여당으로서는 당연한 바람입니다.

정략적 이용


또한편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한 듯 지난 2일 새누리당 당원 등에게 대량 발송한 문자에서 “지금 박 대통령께서는 세월호 참사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힘들어하고 있다”며 “여러분들이 찬바람 속에서 언 발 동동 구르며 만들었던 박 대통령을 저희가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박심을 역설했습니다.

한쪽에서는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여론으로 곧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극대화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박 대통령을 감싸거나 그를 중심으로 뭉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자연히 보이는, 낯익은 풍경입니다.

세월호로 분노한 국민들은 이러한 정치인들의 정치놀음에 지레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여야 모두 이번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한다고 양비론을 들이댈 수도 있죠. 정치는 정치고 지역 일꾼을 뽑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또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이번 세월호 사태는 어느 특정 지방 행정의 수장이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월호 침몰이 처참한 일이긴 하지만 지방선거와는 별도의 일이라고 억울한 하소연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소리입니다. 세월호 사태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었던 청와대, 안전행정부, 해양경찰청 등 중앙국가 기관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서울 시장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 그 후보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이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얼핏 보면 불합리할 수도 있는 이런 현실은 우리 정치체제의 현실과 맞물려 있습니다.

한국의 유권자는 중앙국가 기관에 책임을 물을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기관의 수장 즉 장관이나 대통령의 잘못은 물을 수가 없죠. 장관이야 여론을 통해 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지만 이미 선거를 이긴 상황에 재선의 걱정이 없는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책임을 묻게 하는 방법은 전무합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는 잘 느끼지 못하는 듯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국정운영에 큰 실망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철옹성 같던 지지율도 40%대로 떨어졌죠. 세월호 침몰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과 비슷한 40대 유권자들에선 더 큰 폭으로 지지율이 떨어졌습니다. 침몰 후 사태 파악에도 미숙했고 관료들뿐 아니라 내각의 장악력도 희미했음을 들어냈습니다. 구조, 원인 조사, 피해자 가족 관리 등 당장 해야 할 정부의 과업뿐 아니라 민심을 달래야 할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의무도 하지 못하는 낯뜨거운 장면만 연출했죠.

정치 참여


대통령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못을 하고 무능한 것으로 드러나도 대통령은 헌법이 규정한 임기를 보장받게 되어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까요? 설사 내각이 총사퇴를 한다 해도 그것은 내각의 사퇴이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위치와 권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이러한 한국의 정치체제하에서 유권자들이 불만을 표시할 다른 방도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시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정치의 참여는 거리뿐 아니라 투표소에서도 진행됩니다. 바로 다음 달의 지방선거가 그 예일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 새누리당이 크게 패한다고 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새누리당이 달라지도 않을 테죠. 이번 세월호 사태를 통해 드러난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적폐’가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성난 민심을 보여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많지 않은 정치참여의 중요한 통로이자 바로 민주체제의 근간입니다. 선거를 비롯해 여러 경로를 통해 성난 민심이 드러나고 이는 정권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 분명히 전달해야 합니다.

만약 이번 사태에서 이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체제 그 자체의 정당성을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죠.

정부와 여당은 이 심각성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Monday, April 28, 2014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 남태현
한겨레 2014.04.28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34864.html

요즘 미국에선 네바다주의 클리븐 번디라는 목장주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정부의 땅에 자신의 가축을 방목하면서도 정부에 돈을 내지 않아 가축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번디는 총을 든 지지자들과 함께 가축을 압수하러 온 연방정부 요원들과 무장 대치를 했습니다. 충돌을 피하고자 정부가 오히려 철수를 하고 맙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연방정부의 간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폭스뉴스> 등의 반오바마 정서 등 여러가지로 논할 것이 많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과 회의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 역사의 특수성 때문일 수 있지만, 어찌되었건 이런 논란 속에 미국민은 연방정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국민과 지방정부, 연방정부 사이에 긴장을 유지합니다. ‘연방정부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며 복종과 희생을 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간 의아한 눈초리와 비웃음을 사기 쉬운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국가가 있어왔죠. 그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정부죠. 정부는 그래서 국가와 동일시되기 일쑤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역사의 부침이 남다른 곳에선 국가와 정부의 존재는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주체라기보다는 내가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국가와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삼가하는 이유는요?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책을 보면, 국가가 없던 시절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죠.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며 간신히 생존해야 했으니까요. 개인들은 결국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대신 국가라는 괴물을 섬기며 안위를 택합니다. 결국 국가의 존재는 개인의 안위를 보장함으로써 성립, 성장, 유지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안위를 보장치 못하는 국가와 정부는 도전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가 시위하는 자국민을 향해 발포하자 더욱 거센 저항을 받은 것은 한 예라 할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박근혜 정부는 무능하다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대응을 했습니다. 구조활동만 보더라도 침몰 직후 정부는 혼란과 관료주의 탓에 오히려 구조활동을 방해만 했습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 감독해야 할 박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람들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만 성공했습니다. 그사이에 수백명의 생명이 울부짖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번디처럼 총을 들고 나서는 무지한 용감함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수백명이 죽는 것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게 하는 정부를 왜 지지해야 하는가? 국민을 지키지는 못하면서 억압할 때만 쓰는 공권력을 왜 용납해야 하는가? 전국민을 이렇게 분노케 했으면 그 정부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사과와 개각, 선거의 패배로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일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애도를 지나 조사, 법적 조치가 따르겠죠. 하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은 정치적 논의를 통한 정치적 처벌과 정치적 개혁입니다. 그것 없이는 지도자들은 또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 웃는 얼굴로 비릿하게 군림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고통을 또다시, 반드시 겪게 될 테니까요.

애끓는 가슴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Thursday, April 17, 2014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4-17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622&Code1=001


예상했던 대로 안철수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지요. 한국에서 컴퓨터라는 물건을 만져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V3라는 안철수의 놀라운 바이러스퇴치 프로그램을 써보았을 테고 이를 공짜로 나눈 그의 배짱과 긴 안목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의사로 시작해 컴퓨터엔지니어로,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로서 그의 성공적 삶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고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서울 시장과 대통령의 자리를 노렸을 때 흥분했습니다. 아마도 제대로 된, 상식적인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성원에 힘입어 이제 그는 당당히 야당의 한 대표로 성장했습니다. 민주당에 통합의 한 축으로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가 된 것이죠. 제일 야당을 이끌던 김한길 대표가 오히려 밀리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안철수가 가지는 대권후보로서의 잠재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안철수가 갖고 있는 정치적 가능성은 큰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안철수의 새 정치라는 것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요? 기초선거에 정당공천을 하지 않겠다던 그가 결국 새 당내의 볼멘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국민에게 사과를 구했습니다.

박근혜의 공약파기로 인해 생긴 소동인 만큼 비난을 받는다면 박 대통령이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 초등학생도 알 일입니다. 문제는 모두들 이를 갖고 안철수의 새 정치가 퇴색되었다고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어쩌면 안철수 본인마저 기초선거의 정당공천 문제가 새 정치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정당공천처럼 사소한 일이 새 정치의 몸통이라는, 초라한 현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대선의 공약이라는 것이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닙니다. 후보자가 그럴싸한 공약으로 민중의 환심을 사고 권력을 얻은 후에 껌 종이 버리듯 무시하는 행태는 민주체제의 맹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의 고집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죠.

안철수의 실망스러운 고집


사실 대통령이 공약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자기네는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치인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철수의 그 고집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 공약에의 고집은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철수의 대선공약집을 보면 “기초단체장이 해당 선거구 국회의원에게 예속돼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에 종속”되고 “정당공천으로 인한 공천비리 및 부패 만연”되어 “현행 지방자치제도는 풀뿌리 자치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진단하며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국민이 애초에 간절하게 원한 것은 아니었죠. 이 문제에 대해 민중이 깊은 이해를 하고 변화를 갈구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그는 대선을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대통령이 되면 이런저런 것을 하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이 되지 않은 이 마당에 그 약속이라는 것은 개인적 철학의 문제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신뢰와 철학을 위해 당 전체의 운명을 볼모로 대통령과 맞서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고집은 있지만 전략적 사고가 부족함을 엿보게 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 고집을 국회의원 노무현이 질 것을 알면서 서울의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에서 국회의원 자리를 노린 것에 비유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맞지 않는 비유죠. 노무현은 자신의 자리를 걸고 도전했지만 안철수는 남의 자리를 걸고 도박을 했으니까요.

둘째로 그 고집이 보여주는 새 정치의 폭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 훌륭합니다. 정치인들이 쉽게 약속을 어기는 마당에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 것, 새롭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요? 과연 그가 말한 그의 새 정치는 무엇일까요?

그가 내놓은 대선 공약집을 보면 국민을 섬기는 정부, 공공기관의 혁신 등에서 교육, 문화로 이어지는 그의 비젼은 매력적이지만 과연 이게 새 정치인가하는 의문을 없애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강령/정강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근사한 말은 있지만 그것뿐입니다.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곧 새로운 정치일까요?

참신한 아이디어는 새 정치에 필요한 부분이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이들의 말을 잠시 내려놓고 하는 ‘정치’를 보면 새 정치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입니다. 안철수가 한 정치라는 것은, 선거의 승리라는 아주 전형적인 목표를 위해 통합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으로 양당구조라는 전형적인 지형을 구축한 것이죠. 즉 안철수의 정치는 아주 구태의연하며 전형적이고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비극이 이런 실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비극은 안철수는 아직도 자신이 새 정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냥 막연히나마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죠. 더 큰 비극은 정치인들이 짜놓은 그 좁디좁은 새 정치의 틀에 갇혀 어떤 것이 새 정치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나래마저 꺾여버린 우리의 처지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새 정치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요?

Wednesday, March 5, 2014

安 비판마라, 걱정할 일 따로 있다

安 비판마라, 걱정할 일 따로 있다 - 남태현
Insight 2014-3-5

http://insight.co.kr/content.php?Idx=858&Code1=001


지난 3월 2일을 시작으로 한국 정치 뉴스는 거의 한 가지 소식만 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김한길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과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의 통합이 그것이었죠.

당장 있는 지방선거와 다가올 총선,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승리를 막고 새 정치를 구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워낙에 갑작스레 있는 일이어서였는지 논란이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논란들을 살펴보고 한국정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해보로록 하겠습니다.

안철수‧김한길, 밀실정치 구태 답습?


일단은 비난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조선일보(2014.3.3)가 말하듯 ‘구(舊)정치에 대한 새 정치의 백기 투항’이라는 비아냥이 그 것이죠.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안철수와 그의 세력은 민주당을 싸잡아 낡은 정치세력이라고 비난했더랬죠.

그러더니 며칠 사이 그 낡은 정치 세력과 통합이라니 놀랄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비난은 한나라당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에서도 들립니다. 정의당은 3월 2일 논평에서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양당기득권 독점체제를 깨고 '새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열망이 좌초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안철수 의원은 그동안 누차 양당독점체제를 허무는 새로운 정치를 주창해 왔으나 결국 스스로가 기득권 독점체제에 편승한 결과를 낳았다”고 했고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도 3일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신당 창당이 … 혁신 대상인 양당 기득권 체제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새정치) 명분은 상실됐다”고 꼬집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합당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들어난 밀실정치의 구태를 비판합니다. 공적인 정치세력의 합당이란 것이 가벼운 일일 수 없고 최소한 그 조직 내에서만이라도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절차가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밀실통합이었죠. 민주당의 김광진 의원은 "아니! 언제부터 민주당이 당대표 1인에게 당해산, 합당, 신당 창당의 권한을 줬냐"며 "이런 중대차한 일을 당원, 의원단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기자회견 5분 전에 '미리 상의하지 못해 양해를 구한다'는 문자하나 달랑 보내고 끝낼 수 있습니까"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새정치연합 윤여준 의장도 합당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린 2일 오전까지도 신당 창당 결정을 통보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체제의 핵심, 선거의 승리


이러한 비난과 실망의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민주체제의 핵심을 간과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체제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양당기득권의 독점체제를 깨는 것인가요? ‘새정치’를 구현하는 것인가요? 밀실정치를 타파하는 것인가요? 물론 이들 모두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민주체제의 핵심일까요?

민주체제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닌 선거의 승리입니다. 왕정체제에서도 당파정치를 깨는 것이 중요했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밀실정치를 욕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나라를 운영하는 이들의 숙제이었지 체제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왕위의 계승과 유지였습니다. 소위 민주국가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이런 저런 과업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 나라가 추구해야할 숙제이지 체제의 정체성은 아닌 것이죠.

민주체제의 정체성은 선거에서 나오고 권력은 선거의 승리에서 나옵니다. 숙제는 그 후에나 할 수 있는 것이죠. 즉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민주체제라는 것입니다. 이 당위를 곱씹어 본다면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망을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학생이 공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고 뭐라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합당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모두 선거에 고전할 것이라 예견되었었고 합당은 두 당 모두에게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인 것이었던거죠. 그런 면에서 합당의 목표나 대의가 불문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자신의 정치적 취향에 따라 야합, 정치공학, 구국의 결단 등으로 불리는) 합당은 늘 있어왔던 일입니다.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이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을 해 거대 여당을 만들어 정권을 재창출했습니다.

1997년의 대통령 레이스에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과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손을 잡고 신한국당의 이회창을 간신히 이겼습니다. 2002년엔 민주당의 노무현은 국민통합21의 정몽준과 과감하게 손을 잡으면서 이회창을 역전했죠. 합당 또는 그에 준하는 연합이 선거에 힘을 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입니다.

신당창당, 6‧4 지방선거에 활력


당장에 지지부진할 것으로 예상했던 야당의 지방선거에도 활력이 띄고 있습니다. “두 세력이 통합하면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확장할 여지가 많았고, 견제도 협력도 못하는 박근혜 정부와의 관계도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는 관계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경향신문 사설 3.2)가 있고 실제로 야당의 지지율도 치솟았습니다.

경향신문과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신당 지지율은 30%로 2월 21~22일 실시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나온 민주당 10.3%, 새정치연합 13.7%를 단순 합산한 24.0%와 비교할 때 지지율이 6%포인트 가까이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지율은 39.9%에서 39.3%로 0.6%포인트 줄어 별다른 변화가 없었죠. 새누리당에서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입니다. 야권이 민주당과 안철수 지지세력, 진보세력으로 갈갈이 나누어져 쉬운 싸움이 예상되었던 새누리당으로선 황당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왜 이렇게 정치판이 돌아가냐는 것입니다. 왜 계속 합당 또는 야합이 나타날까요? 이를 구태적인 정치라고 욕하던 이들도 합당을 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고질적인 병폐인 양당기득권 독점체제를 깨기’가 이렇게 힘든 것은 왜일까요? 질문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실 대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선거제도 때문이죠 (남태현 2014 <왜 정치는 우리는 배신하는가>).

우리의 선거제는 각 선거구에서 최대의 득표를 한 후보만이 승리하는 제도입니다. 당연히 승자는 한 명일 뿐이죠. 그 선거구에서 노태우 후보처럼 36.6%의 득표를 하건 박근혜 후보처럼 과반수를 넘건 일등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거꾸로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명만 이기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솔직한 지지보다는 전략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정당에 투표하고 싶어도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그나마 조금 더 비슷한 민주당에 투표하게 되는 것이죠.

‘새누리당보다는 낫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건 아니건 우리의 선거제도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표형태는 결과적으로 양당제를 공고하게 만듭니다.

한국의 양당제, 안철수 혼자 바꿀 수 없다


좌건 우건 이념의 잣대에 가운데에 서있는 두 정당 말고는 살아남기 힘든 것이죠. 노동정당의 지지가 민주당에 흡수되는 것처럼, 극우정당의 지지도 새누리당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 힘든 것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양당이 무슨 기득권을 조작하고 독점하는 흉계를 꾸미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레 제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거꾸로 양당제는 안철수 혼자 바꿀 수 있는 것도 애초에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실망을 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기대를 한 면이 큽니다. 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판에 반영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정당 둘이 사회의 다양성을 대변할 수는 없죠.

그러므로 다양한 정당이 정권을 다투는 건전한 민주체제를 이루는 길은 선거제도를, 그리고 더 나아가 헌법을 바꾸는데서 찾아야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번 합당을 보고 생각해봐야할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Tuesday, January 14, 2014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1-14

http://insight.co.kr/content.php?Idx=473&Code1=001

뉴스를 보면 ‘사람의 탈을 쓰고 어쩜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탄식을 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건 제 정신이 아냐’, ‘미친 거지’ 하고 혀를 차는 것 또한 흔한 일입니다. 멀리는 딱 20년 전 지존파의 엽기적인 연쇄살인행각이 있었고 작년에도 용인에서 엽기 살인이 있었습니다. 모두 도저히 제정신으로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범행들이었죠. 하지만 과연 제정신이 아니고 미친 사람들이나 끔찍한 일을 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테러 용의자들을 상대로 고문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나 침대에 꼼짝할 수 없이 누워 얼굴을 천으로 가린 채 물을 얼굴에 부어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따라서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물고문(Waterboarding)은 그중 악명 높은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고문이라는 용어 대신 ‘강력한 조사기법’이라고 부르며 합법화 했었죠. 십여 년이 지났지만 고문을 주도했던 미중앙정보국(CIA)의 당시 변호사 존 리죠는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그 조사기법들은 그 당시에도 고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미법무부에서 고문이라고 했다면 중앙정보국이 그런 기법을 이용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미국 내 다수의 목소리에 반하는 것이죠. 미국 내 인권단체까지 볼 것도 없고 우선 오바마 대통령부터 이러한 기법을 ‘고문’이라고 했고 더군다나 미군이 적군의 고문을 소개하는 문건을 보아도 그 ‘강력한 조사기법’들을 고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중들 또한 대테러전 초기만 하더라도 이를 고문으로 보는데 주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조사가 고문이라는 데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런 논란을 다 떠나서 자신이 그런 조사를 받을 상상을 해보면 누구라도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자연히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차분한 목소리로 고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리죠의 인터뷰는 어찌 보면 참으로 끔찍한 것입니다. 미친 사람도 아니고 아이비리그인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조지와싱턴 법대를 나온 수재가 고문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마치 법의 정의를 말하듯 하고 있으니까요.  

리죠를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지도자들의 이러한 확신에 찬 지휘하에서 감금, 고문, 살인, 사체유기 등 끔찍한 범행이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막가파’의 만행은 댈 것도 아니었던 것이죠. 이는 자연히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했고 미정부에 대한 신뢰마저 추락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은 고문과 더불어 정치체제를 약화시키는 이중의 심각한 죄를 저지른 셈인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끔찍한 비극은 미치거나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을 해하기 힘든 상황에 있고 정신질환으로 인해 상해를 가하는 경우에도 그 피해는 대부분 극히 제한적입니다.  나쁜 사람도 나빠서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일 뿐입니다. 정말 나쁜 일은 대부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착한 사람들이 벌이죠. 그리고 그 나쁜 정도가 더한 경우—피해자가 수천수만에 이르는 전쟁과 같은 예—는 비범하고 영특한 나라의 엘리트가 벌이는 경우가 거의 다입니다.

 둘째는 너무 끔찍해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라 해도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문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끔찍한 공권력의 행사임에도 미국사람들의 많은 수가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고문을 지지한 것은 좋은 예입니다. 더욱이 아직도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안타깝지만 그런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한민국, 정상적인 민주체제? 

 그런 면에서 1월 6일 하루에 접한 일련의 보도는 한국은 역시 사람 사는 냄새가 정말 진하게 나는 곳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자신을 선출한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권위주의적 행보를 거듭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간신히 마련한 기자회견에서도 “불법으로 막 떼를 쓰면 적당히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런 비정상적 관행에 대해 원칙적으로 대응하는 걸 ‘소통이 안돼서 그렇다’고 말하는 건 저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며 소통인지 호통인지 애매한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교육부의 엄격한 검정을 거쳐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전교조의 테러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나라는 자유대한민국으로 볼 수 없다”며 테러와 자유의 정의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날 한 보수단체 회원이 권총과 실탄을 허리춤에 버젓이 차고 한 반정부 시위대를 위협하는 사진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민주체제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들이었죠. 실망과 개탄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날의 뉴스는 하지만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행위이기에 더욱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즉 정신이 나간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죠.  

모두들 자유대한민국을 지킨다는 확신이 있기에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해도, 불법선거를 방치해도, 공존을 거부해도, 역사를 왜곡해도 웃으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있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그 동안 애써 쌓아온 소통, 공정한 선거, 공존, 민족의 역사, 즉 한마디로 민주체제의 초석을 하나하나 파괴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민주체제와 그 전통이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하루 더 가까워진 것이죠.

대한민국의 민주체제는 오늘 아주 안녕치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