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19, 2010

[주장] 남북통일, 해야 하나? 남태현

오마이뉴스 2010.12.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94742

합동참모본부가 18-21일 연평도 일원에서 해상사격 훈련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한 가운데, 연평도에서 장병들이 해안 순찰을 하고 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 장병들은 통일이라고 씌여 있는 노란띠를 철모에 두르고들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 젊은 장병들을 통해 정부가 말하고 있는 통일은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없습니다. 긴장이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역설적이게도 통일은 최근들어 정부의 화두가 되는 듯 싶습니다. 말레지아를 방문중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이 가까이 오고 있다"면서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통일이 어떤 것인지, 정당성이 있는지를 논하는 목소리는 정부 안팎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습니다.

남북통일이 정당한지,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흐르도록 교육 받아온 탓일 겁니다. 통일이란 말이 언제나 가슴 벅차게 들리는 것은, 한민족으로서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갈라져서, 서로 총을 겨누웠고, 덕택에 남과 북, 모두 군사독제하에 허덕인 대중으로선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때문에 통일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선 진지한 토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은 크지 않습니다. 기껏 있는 토론도, 왜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의지가 점점 없어지는가 걱정이다, 왜이러는가, 정도로 머물러왔습니다. 하지만, 왜 통일을 해야하나요?

"외세에 의해 수백년간 지속되온 단일정치체제가 부당하게 남북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이 슬픈 역사는 물론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혼한 부부더러 한때같이 살았으므로 무조건 다시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혼하고 십년 이십년이 지난 부부가 합치는 것, 쉬울까요? 되려 생뚱맞지 않나요? 남과 북은 한때 한나라였지만, 이제는 엄연히 다른 나라입니다.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둘은 너무나 다릅니다. 어휘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듣는 음악도 다르며, 쉬는 날도 다르고, 즐기는 스포츠도 다릅니다. 한민족이라고 말하기에도 쉽지 않아보입니다. 우리는 저들의 주체사상이 우습고, 그들은 우리의 물질숭배가 한심합니다. 한때 한 나라였다는 역사의 기억이 있지만, 그 기억마저 이젠 개개인의 것이 아닌 교과서의 그것으로 남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옛기억으로만으로 합치기엔 남북은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통일은 경제적으로 이득이다." 많은 분들이 경제적 혜택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군사비가 적게 들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통일이 됐다고 군지도자들이 과연 자발적으로 군을 축소할까요?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위해서 군의 자주국방과 현대화를 최대한 방해한 주범들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통일된 나라건 아니건, 이들은 현재와 같이 낭비가 심한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밥그릇과 직결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북한이 아니더라도 좋은 변명 꺼리는 충분합니다. 중국의 정치적, 군사적 팽창이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고, 다른 쪽에선 일본의 재무장이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이 통일된 한국이 평화를 추구하게 놔둘리가 만무합니다.

한국 산업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결국 북한의 싼 노동력을 남한의 자본이 착취하자라는 말입니다. 남한의 재벌들은 쾌재를 부르겠지요. 말도 통하는 양질의 노동자. 가까우니 물류비도 줄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남한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를 보면, 통일되 한국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보이지 않나요? 갑자기 들어닥친 빈부격차로 인한 그들의 고통은 놀랍고도 뼈저린 것일 것입니다. 또한 남한의 노동자들도 북한 노동자들과 결국엔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질 것입니다. 결국 통일의 경제적 공헌이 있다면, 그것은 남북 민중의 것이기 힘들 것입니다.

"통일은 정치적, 군사적 안정을 가져다준다." 특히나 연평도 사태 이후 통일을 더 절실히 원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연평도 사태에서 보듯 긴장은 두 나라가 갈라저서 생긴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와 미국으로 갈라지고, 1812년 전쟁을 치루었죠. 하지만 이들은 지금 너무나 가까운 이웃입니다. 말레지아와 싱가포르가 나누어 ?어도 군사적 긴장은 높지 않습니다. 즉, 나라가 나뉘였다는 것이 바로 정치적, 군사적 위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평도 사태에서 보듯, 두 나라간의 긴장은 두 나라 지도자들의 정치적 이해가 긴장을 원함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긴장의 완화를 정치적으로 추구하면 원하는 군사적 안정은 찾아집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좋은 예라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두 나라를 합치는 것, 즉 통일이 정치, 군사적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은 희망일 뿐입니다.

통일은 반드시 평화와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요? 되려, 내전으로 한쪽이 완전히 승리해서 상대방을 굴복시켜 통합하지 않는 한, 두 세력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또 다른 군사적 충돌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실제로 통일을 이룬 예맨은 다시 내전을 겪었고, 나눔을 선택한 아일랜드와 영국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어떻게하면 잘 나눌까하는 문제로 아직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면, 남북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부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돌아 보더라도 평화와 신뢰가 전무한 상태에서 통일의 논의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드리대게 하는 구실 노릇만 하고 있습니다. 북은 남의 흡수통일이 두려워서 전쟁을 준비하고, 남은 북의 적화통일이 두려워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는 곧 남북간 긴장을 높혔습니다. 즉, 통일에의 열망이 오히려 평화를 이룩하는데 방해가 된 셈입니다. 특히나, 천암함 사건과 연평도 사태의 앙금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의 현정부의 통일에대한 희망어린 전망은 북측을 자극해서 남북간 긴장만 더 높히기 쉽습니다.

남북통일은 필요한가요? 남북통일이 남북간의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요? 캐나다와 미국처럼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같이 번영하는 것, 오히려 더 값지고 더욱 실현 가능한 미래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대통령은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뒤로 하고, 북한을 자극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조롱하기보다는, 남북간 평화와 공영을 모색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할 것입니다.

Friday, November 26, 2010

연평도 사태의 정치적 해결

한겨레 2010/11/27

[왜냐면] 연평도 사태의 정치적 해결 / 남태현

국익을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무력의 대결을 마치고
정치의 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남쪽이 먼저 손내밀어야 합니다

연평도 사태에 대한 논의가 분분합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확전을 못한 것이 안타까워 언성을 높이고, 대통령도 발언의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들은 말뿐입니다. 입에서 침이 튀고, 얼굴은 분노로 벌게지지만, 그걸로 끝이죠. 정작 바쁜 것은 미국입니다. 미 항공모함이 올 예정입니다. 물론 이지스함, 구축함들이 따라옵니다. 그 화력은 웬만한 나라의 그것 이상이죠.
미국의 이러한 결정은 이번 사태를 진정시킬 수도, 확대시킬 수도 있는 중요한 군사적, 정치적 변수입니다. 안타깝게도, 동시에 한국의 지도자들이나 국군은 또다시 종속변수로 전락하는 꼴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군사적 사태로 치닫게 되면 우리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주국방을 입으로만 외치면서 정작 자주국방을 애써 회피한 군 지도자들과 현 정부 덕에, 위기 상황에 국군을 의지하기보다는 미 통치권자의 입을 바라보는 처지이기 때문이죠.

이번 사태는 수습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한-미 통상 문제와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이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미국에 목소리를 내기 더 힘들어질 것이 뻔합니다. 우리의 국익을 정말 걱정한 지도자라면 하루 속히 이 상황을 정치 문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즉 말로 싸우고 말로 해결하는 상황이 와야 한다는 것이죠. 이는 이미 우리 모두 경험한 것입니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대북 정치력은 남북관계를 호전시켰을 뿐 아니라 미국의 입김을 제어하는 데도 큰 몫을 했습니다. 국민들은 북으로 피서를 갔고 출근을 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성공의 산물을 현 정부는 애써 외면하고 있고, 덕분에 우리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계속 더 꼬여만 갑니다.

어떻게 정치 문제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그 시작은 문제의 근원을 바라보는 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원지는 바로 남북간 영토분쟁에 있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우리는 아직 영토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서해가 그곳입니다. 연평도를 시작으로 서해 5도는 남북 모두가 자기 영토로 여기는 곳입니다. 전후, 합의가 아닌 미국의 일방적 선언으로 북방한계선이 그어졌고, 남쪽의 실질적 지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합의가 없었던 만큼 북쪽은 이를 부정해왔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1999년 서해 5도를 북에 포함시키는 해상군사경계선을 일방적으로 공표합니다. 결국 양쪽의 일방적인 주장들은 서해교전으로 이어지고 이번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남한은 서해 5도의 이런 분쟁에 대해 별반 대책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실질적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현상 유지가 대책이어서겠지요. 아쉬운 쪽은 북한이고 우리가 알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대책을 논하는 사람은 현상 유지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곧 북한을 동조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모순은 어느 영토분쟁에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정착촌 내 유태인들은 정치적 해결을 원하는 다른 유태인들을 나라의 혼을 팔아먹는 사람으로 치부합니다. 덕택에 이스라엘은 점점 국제정치에서 고립되어 가고,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력이 부재한 자리는 폭력이 드셀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입니다.


남과 북은 아무 답이 없는 무력의 대결을 마치고 정치의 장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쉬울 것이 좀 덜한 남쪽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해 5도이어야겠습니다. 어떠한 형태로의 합의이건 두 나라의 통일보다는 쉽지 않을까요?

거창한 통일의 구호는 접고, 정치를 통한 평화만이라도 구축할 수 있는 지도력을 기대합니다.

남태현 미국 메릴랜드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Saturday, October 30, 2010

OhMyNews [주장] 구차한 개헌 논의, 하루 빨리 끝내자

2010.10.30 16:15 ⓒ 2010 OhmyNews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0074

[주장] 구차한 개헌 논의, 하루 빨리 끝내자
남태현 (polisci) 기자

최근 한 토론회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검토할 가치가 있다, 다만 다음 정권에 가서 개헌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최근의 개헌논의는 집권세력이 그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구차한 발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개헌 논의가 구차합니다.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또 개헌 논의는 유력한 정치인의 소신 피력으로 계속 되다가 서로의 진정성을 매도하며 슬그머니 사라질 것 같습니다. 모두 자신의 정치적 계산만 하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는 것,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면, 또 유권자들은 으레 그려려니하며 쓴웃음을 짓거나 무심하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정치적 계산 없이는 이런 논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 술수를 부린다고 욕하면서 언제까지고 정치인들의 진정성만 논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인의 진정성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가 요즘 말하듯 박정희의 진정성이 복지국가 건설에 있었든 아니든 알 수 없는 노릇이죠. 그보다는 그의 행위, 예를 들어 군사정권의 전통을 세웠다든가 노동탄압의 기원을 열었다든가 하는 것을 보고 그를 평가하는 것이죠. 김대중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다만 그가 한 것, 예를 들어 남북 관계를 개선한 것을 보는 것이죠. 그러므로 누구의 진정성을 알 수 없으므로 반대한다는 식의 주장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알맹이가 없는 주장이자, 현재의 개헌 논의가 구차한 첫째 이유입니다.

정치권내 개헌의 논의는 대충 두 안으로 좁혀집니다. 분권형 대통령제와 4년 연임제가 그것이지요. 하지만,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총리에게 많은 권한을 내주는 분권형 대통령제도 말이 좋아 분권이지 운영하기에 따라서는 드골의 프랑스나 푸틴의 러시아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오히려 더욱 거대해 질 수 있습니다.

4년 중임제 또한 한 개인이 행정의 전권을 독점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 특히 대권후보들은 이 두 제도를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식으로는 개헌을 설사 한다해도 우리가 지금 지긋지긋해 하는, 그리고 정작 없애고자 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전횡을 막는 것은 제도적으로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안들이 문제를 해결할 듯 공허하게 주장되는 것은 현재의 개헌 논의가 구차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문제가 없는 제도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합의와 그에 맞는 선택을 함으로써 그 제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그의 단점은 모두가 치러야할 값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사회가 헌법을 통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난 정치사를 잠시만 돌아보아도 우리네 정치지도자들은 정말 무섭게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방직후에는 서로 폭력과 살인도 서슴지 않았고, 전쟁통에는 국민을 짐승처럼 처단하기도 했죠. 전쟁은 끝이 났어도 전쟁같은 정치는 계속됐습니다. 폭력은 피를 뿌렸고 고문은 비명을 불렀습니다.

수백만 호남사람들은 순식간에 간사한 놈들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바보가 되었습니다. 광주는 피바다가 되었고, 청송은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우리네 백성이 믿고 따르기엔 위정자들의 왕좌를 향한 정쟁은 너무나도 서슬이 퍼렇지 않았습니까? 덕택에 우리는 선거랍시고 해도 누가 잘하고 못 하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내 편이냐가 유일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덩달아 우리도 치열한 정쟁에 휘말렸습니다. 이러니 국민은 정말 피곤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편안하고 따를 수 있는 정치,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제도입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이에 대한 자각이 없는 듯합니다. 현재의 개헌 논의가 구차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문제는 이런 구차한 논의를 탈피 하루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한 개인의 야심과 무능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하는 대통령을 없앨 수 있는, 화합하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할 수있는 정치제도를 만드는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에겐 정치화합이라는 역사적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Wednesday, March 10, 2010

[독자칼럼] 대통령에게 희망을 / 남태현

한겨레 2010-03-10
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409304.html#


김연아에게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피겨스케이팅에 문외한인 저같은 사람도 그의 멋진 행진에 가슴이 벅찼더랬습니다. 그가 얼음위에서 보여준 용기와 아름다움은 전세계를 감동시켰죠. 하지만, 우리에겐 무엇보다도 그녀가 준 희망이 가장 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지만, 꿈을 버리지 않으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한때 젊은 독자들을 흥분케한 농구만화가 있었습니다. 전국스타 선수가 조그마한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 했죠. 옛날 어느 경기에서 뒤지고 있을 때 그는 졌다고 체념합니다. 내색은 못했지만요. 마침 밖으로 나간 공을 주워주던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경기는 끝이 난다고. 희망을 되찾은 그는 극적인 승리를 일궈냅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농구코치로 있는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아도, <빠삐용>을 보아도, 희망을 가진 자들은 큰 시련을 이겨냅니다. 우리도 그런 적이 있었죠. 군사독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꺼지지 않던 희망은 마침내 1987년 100만 시민을 길거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자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이젠 하도 엽기적인 사건이 많아서 잊혀젔지만, 옛날에는 ‘막가파’가 있었습니다. 납치와 감금, 엽기적 살인으로 세상을 암담하게 했던 그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의 미래와 희망을 보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그들에겐, 막가는 행위가 삶의 이유였고,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래서일까요, 이명박 정부의 행보가 슬프지만, 이해가 가는 것은요?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언제 그랬냐는듯 온기라곤 찾을 수 없고, 그 강자락들도 부서지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목숨을 잃고 개그맨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방송국 사장들은 혼쭐이 나고, 세종시 논란덕에 세종대왕만 구차하게 됐습니다. 노동자들은 삶에 터전 하나 지켜보려다 법의 회초리를 맞고, 너무나 가진 것이 많은 자에겐 법은 한없이 상냥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여러가지 정치적, 개인적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기가 아직 창창한 대통령을 두고 무슨 소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헌법은 단임을 못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더 무엇을 하겠습니까? 퇴임후 미국 전 대통령 카터나 클린턴처럼 국제외교를 펼치거나 저서활동을 하기도 쉽지 않을테고, 그렇다고 다시 시장이 되기도 뭣하고, 국회로 나가기도 뻘쭘할테지요. 학생이 시험이 없으면 공부합니까? 국회의원들도 재선이 하고 싶으니까 민심도 살피고, 생전 안가는 시장에 나와 악수라도 아는 것이죠.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이젠 선거도 없고 시험도 없습니다. 부담도 없지만 희망도 없죠. 게다가 전직 대통령들의 수모를 보고 있자니, 빨리 무엇인가 해놔야 할 절박함도 들 법 합니다. 덕택에 정치는 너무나 거칠고 아찔하게 파괴적입니다. 희망이 없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이 대통령의 임기는 곧 끝이 납니다. 문제는 다음 대통령도 비슷한 길을 걷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숙제는 빨리 대통령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들만 맨날 술래가 되는 꼴이 되기 쉽습니다.

남태현 미국 메릴랜드 솔즈베리대 교수

Sunday, January 24, 2010

[왜냐면] 법을 어기며 법치주의를 말하는 정부 / 남태현

한겨레 2010-01-24

법 가벼이 보는 정부·여당의 자기모순
언론법 위법성 있단 헌재 결정 무시
피디수첩 무죄 판결에도 법원 공격
정연주 전 사장 해임 무효에는 침묵
법치 망친 정부는 어떤 책임 질 것인가

근대 서구의 지성, 토머스 홉스는 고전이 된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법과 질서가 없는 끔찍한 상태를 고발합니다. 옛날엔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답니다, 마치 정글의 동물처럼요. 그러나 그 세상은 사람들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었죠. 대신 사람들이 절대적인 자유를 갖고 있어서였습니다. 살해할 자유, 도둑질할 자유, 자유의 범람은 모든 이들을 끊임없는 고통에 빠뜨렸고, 지친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질서와 안정을 갈구하게 됩니다. 바로, 사회와 법의 기원인 것이죠.

실제로 사회를 둘러보면, 강자는 법의 보호가 덜 필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연이 있으니 굳이 법의 정의를 찾지 않아도 그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 약자는 그 약함으로 인해 법에 기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정부는 법을 정하고 강제합니다. 권력자의 기분이 아닌, 법치주의가 민주주의의 핵심인 것은 바로 이래서입니다. 다수인 약자를 보호함으로 해서 사회의 안정을 객관적으로 약속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부가 법을 가벼이 본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인 셈이죠. 하지만 불행히도 현 정부는 이런 자기모순 속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지난해 10월 말, 헌법재판소는 언론관계법이 위법성이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헌재까지 개입한 사안이면 그 애매한 결정을 입법부에서 다시 고민하고 명쾌한 정치적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순리일 테죠. 하지만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시행령 개정을 의결하고 불도저로 밀어붙이듯 친정부 티브이 채널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과 약 2주 후, 서울행정법원은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의 해임처분이 무효임을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그 행정소송의 당사자인 대통령은 말이 없었습니다. 정연주 사장을 몰아냈고 현 대통령의 언론통인 김인규씨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새해 들어서도 정부의 거침없는 행보는 계속됩니다. 강기갑 의원과 ‘피디수첩’ 제작진은 각각 공무방해와 광우병 허위보도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무리한 법의 해석도 모자라, 정부와 여당은 법원을 공공연히 질타하고 있습니다. 원내대표라는 사람은 사법행위를 “좌편향 불공정 사법사태”로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은 국민의 불안을 운운합니다. 법의 체면이 그의 수호자의 손에 처참히 구겨지는 순간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은 정부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법을 우습게 보는 것은 정부로서 치명적인 것입니다. 토머스 홉스가 지적한 대로 정부는 그 법적 약속을 바로 존재의 이유로 하는 탓이지요. 법을 어긴 것은 고치면 되지만, 법을 우습게 만들어 놓으면 사회와 질서 전체를 위협하는 탓에 그 뒷수습이 간단치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들어서면서 법이 바로 서는 사회, 한 지도자가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을 향해 가는 듯했었습니다. 하지만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과 그의 현 정부가 법치주의를 흔들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명박 개인은 곧 그의 사저로 돌아가면 그만이겠지만, 그가 망쳐놓은 법치에의 신뢰를 안고 살아갈 국민 다수는 어쩌란 말인가요.


남태현 미 메릴랜드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