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5, 2009

[왜냐면] 아프간 파병, 참 생뚱맞지 않습니까? / 남태현

한겨레 기사등록 : 2009-11-15 오후 06:37:07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87740.html


아프가니스탄에 국군을 파병한다지요. 정말 생뚱맞은 소식이었습니다. 처음 소식을 접할 때도 그랬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파병의 득과 실은 나라 지도자들이나 알 수 있는 것 같으니 이 생뚱맞은 느낌이나 생각해보죠.

한국 정부의 파병 발표가 있자 미국 백악관 대변인과 국무부 대변인이 환영을 표했다면서 한국의 언론은 국민들을 설득하려는 듯합니다.

하지만 정작 미국 시민들은 점점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에이비시>와 <워싱턴 포스트>의 여론 조사를 보면 지난 4월만 해도 63%의 사람들이 전쟁을 지지했지만 10월이 돼서는 45%로 그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63%의 사람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확실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미국 현충일에 백악관 안보보좌관인 제임스 존스는 오바마 대통령은 아직 아프간에서의 미군 증강에 관해 결정한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직 고려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최근 유명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 타임스> 칼럼(2009년 10월30일)에서 흥미로운 지적을 했습니다. 미국 군사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이 걱정하는 것은 오바마 정부가 추가 파병을 할지, 하면 얼마나 할지, 정책 그 자체가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이 전쟁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이 걱정이라는 것이었죠. 네, 미국 대통령이 이 전쟁에 대한 확신이 아직 안 섰답니다. 브룩스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하루속히 마음을 정해 미국민들과 장병들에게 확신을 주든지, 그러지 못하면 차라리 철군을 하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미국 국민도 반대하고, 미국의 대통령도 확신을 보여주지 않는 이때 저 멀리 한국에서의 파병, 참 생뚱맞지 않습니까?

또다른 신문(<경향신문> 2009년 11월2일치)을 펼쳐 보니, 미국 정부 관료들이 경고를 했다더군요.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한국의 아프간 지원을 국제사회에 대한 ‘의무’로 규정”했고 마이클 멀린 합참의장도 주한미군의 재배치를 들먹였답니다. 정부는 이런 미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투지만, 이것도 좀 이상합니다. 우리가 수백명 규모의 군대를 보낸다고 하죠. 하지만 이게 정말 국제사회에서 의무를 다할 정도의 공헌을 하나요? 미군은 현재 약 6만8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군 수백명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프가니스탄의 정세가 확 달라질까요? 우리 군 덕에 미군이 우세를 점해서 한국의 기여에 감격할까요? 우리 군 300명이면 현재 미군의 0.5%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수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미군은 월등합니다. 이미 계속되는 파병으로 경험 많은 사람도 많고, 장비도 아프간 지형에 맞게 계속해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군의 공헌이 얼마나 될까요? 실제로 한국의 파병 소식은 미국 내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약 300명의 국군 파병이 갑자기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미국에 동맹으로서의 위신을 세워줄 거라는 기대, 참 생뚱맞지 않습니까?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대로 전쟁은 참혹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입니다. 생뚱맞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 국민이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정부 관료들이 있다면,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좀 압시다. 국민 여러분, 끔찍한 사지에 젊은이들을 이렇게 생뚱맞게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태현 미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Friday, October 30, 2009

[시론] 정치가 뭔가요? / 남태현

한겨레 기사등록: 2009-10-30 오후 08:42:5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047.html

어느 정치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정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죠. 전공 대학원 수업이니 학생들이 쉬 답을 알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보아하니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더 난처했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거의 매일 하는 우리가 정작 정치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정치하는 사람을 쉽게 찾기 힘듭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하면 큰일 나는 사람들이 대다수니, 도대체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지, 또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죠.

신문을 한번 뒤적여 보죠. 일단 보통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나(“정치투쟁 오염 교사, 교단에 설 자격 없다” <문화일보> 올 7월31일치), 노동자들은(“민노총, 정치투쟁보다 조합원 권익위해 일해야” <서울경제> 올 3월19일치, 신재민 차관 “언론노조 파업은 정치파업” <동아일보> 올 2월28일치) 정치를 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같습니다. 교수나 학생도(“교수이어 학생들도 정치로?” <중도일보> 2007년 7월17일치) 물론 마찬가지인 듯싶습니다. 국가 권력도 정치는 바람직한 것 같지 않습니다. 검찰은 물론 안 되겠지만(검 “박연차 수사 정치적 의도 없다” <파이낸셜뉴스> 올 4월1일치), 심지어 정치를 위해 모인 정당도 정치를 하면 안 되고(안상수 “민주, 정략적 정치투쟁 받아들일 수 없다” <머니투데이> 7월13일치).

그럼 도대체 정치는 누가 합니까? 정치가 뭔가요? 정치는 자신의 뜻을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고 행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 정치는 우리 주변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고, 교실에서도 선생님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므로 보통 우린 공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주로 논합니다. 그렇다면, 공적인 장에서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강을 파겠다고 맘을 먹고 그 지위가 주는 힘을 이용해 그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지요. 모두 다 정치를 하고 있는데, 정치를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 그렇다면 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이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 이유입니다.

“왜?”는 “누구?”를 보면 답이 나올 듯합니다. 정부나 기업들은 노동자가 정치하면 뭐라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적인 사람이 정치하면 그들이 선생님이건 노동자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난리고, 야당은 여당을 정치한다고 뭐라 하고 여당은 야당을 정치한다고 몰아붙이는 것이지요. 정치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정치적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난히 정치하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은 바로 정치적인 힘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도전 자체를 이런 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기들은 글 읽고 공부하느라고 평생을 놀고먹으면서, 일반 백성들이 글을 배우려면 근엄하게 꾸짖던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치가 소수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을 우린 오래 견뎠습니다. 오랜 왕정이 그러했고,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그의 육사 후배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하고픈 유혹은 민주주의가 와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국민 여러분,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행위는 당연한 권리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필요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Friday, September 11, 2009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한겨레 2009.9.11 


최근 미국 정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에릭 홀더가 지난 부시 행정부의 중앙정보국이 불법 고문을 했는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지요. 조사 대상인 중앙정보국뿐 아니라, 보수파들은 이번 결정이 중앙정보국 요원들을 불안하게 해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면서 홀더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최근 드러나는 문서를 보면 정부의 고위층이 불법행위에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니, 이들의 반발이 이해도 갑니다. 한편으론 진보 진영도 이번 결정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고 있습니다. 홀더의 말대로 명백하게 고문을 한 수사관을 대상으로 조사를 할 경우 이를 실질적으로 지시한 고위층 지도자들은 면죄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이 흥미로운 것은 지난 정권의 흠을 들추는 것이 미덕이 아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마당에 그가 지명한 법무장관이 조사를 지시했다는 것이지요. 오바마 대통령의 가장 큰 공약 사항인 의료보험 개혁만으로도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 이번 일로 그는 국정 운영이 힘들어질까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번 일은 인치가 아닌 법치가 강조되는 미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미국의 법치가 완전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최근 부시나 닉슨의 예를 보면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미국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매번 그들은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회복했습니다. 닉슨의 불법행위는 오히려 의회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이런 법치 민주주의로의 회귀에는 눈을 크게 뜬 언론과 미국 시민들의 분노가 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지키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대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오랜 투쟁으로 마침내 1987년 민주주의는 얻어졌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어 하는 사이에 지난 두 정권이 쌓아둔 민주주의 업적이 퇴색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까? 언제 시민들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언제 힘 있는 사람들은 법 위에서 춤을 추고 있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 밑에 깔려 피를 흘리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혹시 지난 10여년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습관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민주주의가 왔고 그것을 위해 싸우던 분들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를 너무 쉽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분, 시민사회가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줄어드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러시아를 보십시오. 1990년대 혁명적인 정치변혁으로 얻어진 민주주의는 2000년대에 들어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도태된 지 오래입니다. 타이와 터키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시민사회에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백신과도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균을 몸에 넣어 저항력이 생기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의 도전도 그와 같아 우리들이 잠시 생각하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 값을 일깨워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기사등록 : 2009-09-11 오후 07:04:12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ERIES/60/376284.html

Wednesday, April 15, 2009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2009.4.15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 시절인 2001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부시의 고향 텍사스를 방문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접을 받았다. 직접 트럭을 몰고 드라이브도 즐기며 아주 친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부시는 푸틴의 “가슴과 영혼”을 보았다며 정상회담의 성공을 자축한다. 물론 푸틴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치켜세우던 부시는 러시아에서 실제로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 그리고 그 임기가 끝난 뒤에는 총리로서 권력을 이어가는, 민주주의의 “가슴과 영혼”과는 거리가 있는 지도자였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몰랐을 것이 확실하다. 대통령이 모르니 어린 학생들이 알 수가 있나.
나는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하여 미국 학생들과 토론을 하는 것은 늘 새롭다. 많은 학생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선 그런 고정관념을 깨,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보람되다. 내가 좋아하던 토론의 한 예가 푸틴의 러시아였다.
푸틴은 2000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은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내전이라는 호재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일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이후 푸틴은 정치적 반대를 하나하나 잠재웠다. 2003년 가스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회장의 체포는 그 신호탄이었다. 메시지는 아주 분명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그 누구도, 아무리 부유하고 세력이 굳건하더라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정치제도도 그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체첸 지역에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폭압적인 군사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푸틴이 무엇보다 공들인 것은 아무래도 언론에 자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노력은 치밀하고 총체적이었다. 그의 치부를 건드리던 유명 티브이채널 는 하수인을 통해서 길들였고 회사의 사장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체포된 데 이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회사를 포기한 건 물론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지방의 방송사들은 알아서 스스로 푸틴이 싫어할 보도를 자제하기 시작했다. 방송사의 소유권도 하나하나 정부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그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했던 토론이나 야당의 목소리는 불과 수년 만에 러시아 전역의 티브이에서 사라지는 지경에 이른다. 말을 듣지 않는 개개 언론인들 또한 하나하나 길들여지거나 사라져 갔다.
보도지침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기억되는 우리는 아마 다음의 코미디 같은 사건이 그렇게 우습지만은 않을 것이다. 2008년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스톱 리스트’가 존재한다. 이 리스트에 있는 비판적인 인사는 티브이의 인터뷰나 방송 출연이 실질적으로 금지된다. 심지어 유력 야당 지도자들도 티브이에서 보기가 이제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평범한(?) 정권의 비판자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국경 없는 기자회’라는 단체에 따르면 푸틴의 집권기에 18명의 기자가 살해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자기 집 앞에서 살해당한 안나 폴릿콥스카야라는 여성 기자일 것이다. 그는 체첸지역의 전쟁참사를 끊임없이 보도해 모스크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푸틴 비판자였다. 대가는 끊임없는 살해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협에 시달리던 그가 변을 당한 날은 우연인지 푸틴의 생일이었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 두 번의 의회선거를 합법적으로 치른 푸틴. 그가 과연 민주주의의 수호자였을까? 당연히 답은 너무나 뻔한 ‘아니요’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못해 독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음에 답을 하기가 2009년엔 수월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내 학생들은, 특히나 부시를 지지하는 학생들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푸틴의 반민주적인 행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도 치르고, 자신이 지지하는 부시가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떤 학생들은 내가 조목조목 따지면 거의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의 수는 적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하기엔 너무 뻔하게 그의 독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화를 내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뭐라 그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난 시간이 갈수록 설사 누가 그런 비유를 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길 진심으로 빈다. 왜냐하면 그 반대는 상상하기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람이 방송사를 억지로 장악하고, 대통령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던 뉴스 앵커가 시청자들과 회사 동료의 지지에도 뉴스에서 중도하차하고, 대통령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진행자가 프로그램의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방송을 그만둘 뻔했다. 난 이런 이야기가 러시아만의 것이길 바랐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한겨레 기사등록 : 2009-04-15 오후 10:16:22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500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