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16, 2014

[시론] 월드컵 세월호

한겨레 2014.06.1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2593.html


2002년 6월13일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 학생은 친구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모여 의정부로 놀러 가기로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주한미군 보병 2사단 대대 장갑차에 깔려 처참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쳤으니까요. 흔히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알려진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조별 예선이 끝나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11~12일 A조와 B조 경기가 있었고, 사고 당일엔 C조의 두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날 두 학생이 사고를 당한 것은 오전 10시30분께였고 오후 2시 반에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다음날인 14일에는 미 보병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는 등 사고 수습에 나섰고, 인천과 대전에서는 D조 마지막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천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기록하며 포르투갈을 이겨 온 나라가 환호한 것이 이날이었습니다. 당시 여론은 온통 월드컵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한겨레> 15일치는 1면에 “꿈의 16강 마침내 해냈다”라고 보도하는 등 온통 월드컵 기사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반면, 두 학생 사건에 관해 한겨레는 14일치 18면에 “미군차량 치여 여중생 2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간단하게 다뤘습니다.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언론에서 거의 사라졌던 이 사건은 6월 말이나 돼서야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7월31일, 49재를 기폭제로 시위는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무죄 판결 이후 대규모 촛불시위로 이어졌고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녀의 죽음은 언제나 슬픈 일이지만 효순·미선 학생의 경우는 특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죽음이 외국 군대의 행위에 의한 것이었으니까요. 외국군 주둔에 익숙한 우리지만 사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첫째로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안보를 다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헌법적 문제이죠. 나당 연합군의 끝을 보아도 그렇고, 청나라에 기댄 조선의 신세를 봐도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외국 군대의 주둔은 늘 이들에 대한 제도적 특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외국군 범죄가 본국의 법정에서 다뤄지는 일이 극히 드문 것은 한국만의 예가 아닙니다. 요컨대 이 사건은 나라가 시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대응도 할 수 없는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렇지만 효순·미선 학생의 죽음은 처음에 외면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월드컵이 거기에 큰 몫을 했죠. 사건 발생 뒤 두 주가 지나 새삼 작은 관심이라도 끌기 시작한 것은 독일-브라질 결승전(6월30일)과 함께 월드컵이 끝난 것과 과연 무관했을까요? 많은 이들이 뒤늦게나마 이를 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월드컵의 열기에 취해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죠.

이제 2014년 월드컵이 시작됐습니다. 홍명보호에 눈길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치맥과 환호성, 그리고 한탄이 거리에 가득하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 사태의 전모를 파헤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도 10여명이 실종 상태입니다. 선원들에 대한 재판은 이제 시작이고 아직도 유병언 일가는 오리무중입니다. 정부의 대처는 사건 때만큼이나 늦고 비효율적이며, 정부나 국회는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태가 한국의 민낯을 까발렸다고 탄식한 지 두 달이 됐지만 한국은 세월호 이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입니다.

월드컵의 열기에 취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자던 2002년의 다짐, 잊지 않는 2014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Monday, June 2, 2014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 남태현
경향신문 2014-06-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12030465&code=990304

미국은 풍자의 천국입니다. TV에서 코미디언들이 정치인들을 희화화하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입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죠. 인터넷에서 오바마의 사진을 찾아보면 온갖 희화와 조롱이 난무합니다. 심한 것은 화제가 되기도 하고 오바마 또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1년에 한 번 백악관이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모아 만찬을 여는 자리에서 코미디언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것이 백악관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런 풍자를 거의 20년을 보아서 이제는 일상적으로 느끼지만 처음에는 나라의 지도자를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걱정 반, 부러움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님인데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처음에 가졌던 그런 생각은 애초에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은 나라님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안 볼 때는 나라님 욕도 한다죠. 거꾸로 보면 볼 때는 하면 안된다는 소립니다. 이제는 그냥 하는 소리가 됐지만 옛날에는 정말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나라님을 바꾸는 공론만으로도 삼대가 멸하는 조선이었죠. 왕조시대엔 동서 어디나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멀리 아랍의 왕조국가들까지 갈 것도 없이 가까운 데 있는 태국만 가도 국왕을 욕하면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고 실제로 이 법으로 반정부 인사들이 처벌을 받기도 하죠.

이들 국가는 나라의 주권이 왕조의 정통성에 근거하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들입니다. 조선왕조는 말할 것도 없고, 헌법이 국민주권을 명시한 태국 같은 경우에도 정치문화가 왕조와 주권을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체제에서는 왕을 욕하고 풍자하는 것은 나라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처벌이 정당화되는 근거죠.

하지만 국가의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체제에서는 정부 지도자를 희화화하는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임받았기에, 다른 국민에 비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희화와 조롱에 너그러워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자리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그런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권력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화와 조롱에 발끈하는 대통령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첫째로 민주체제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라님이라도 됐거나, 나라님을 모시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면 자신 또는 그분에 대한 어떠한 희화나 조롱도 참을 수가 없을 수 있습니다. 나라님인데요. 대통령 개인에 대한 조롱이 아닌 나라 전체의 조롱인 셈이 되는 것이죠.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둘째로 이들은 국민의 조롱에 신경이 쓰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의 권력이 포스터나, 코미디, 농담 등으로 약화되었거나,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정당성에 자신이 없거나, 정당성이 약화되었다고 판단을 했을 수 있죠. 어찌되었건 그런 판단을 했다면 조롱이 실제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정당성이 더욱 약화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들로서는 그런 조롱을 막는 것이 심각한 정치적 사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주체제의 원칙에 충실하고,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으로써, 자신에 대한 희화나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대통령들이, 그런 대통령을 갖고 있는 국민들이 무척이나 부러운 요즘입니다.

Sunday, June 1, 2014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남태현
창비 2014년 04월 01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파헤치며 현 한국사회의 정치를 진단하는 책이다. 저자는 정치의 참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 즉 우리 안에 굳게 뿌리내린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직시해야 한다고 명쾌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믿고 있는 선거제도 자체가 민의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한계 안에서 진정한 변화는 ‘나는 투표했다’라는 자위를 넘어선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근래 한국정치에서 보인 ‘다른 정치’의 증후군들을 점검함으로써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영어계급사회> 남태현

오월의봄 2012년 02월 07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왜 한국인은 평생 영어를 공부해야만 하는가?
영어를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세계화’ ‘국가 경쟁력’의 허구를 밝히고 대안을 찾아본 책

흔히 세계화된 사회에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영어가 필수라고 말한다. 과연 이 이데올로기는 맞는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는 진짜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일 뿐이다. 우리는 미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고, 미국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왔을 뿐이다. 이토록 영어를 숭배하는 것도 미국화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미국은 이미 조각 난 하늘일 뿐이다.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진정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고 싶다면 영어도 일본어, 프랑스어, 러시아, 아랍어 등과 같이 하나의 외국어로 간주해야 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우선 대학입시에서 영어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를 다른 외국어와 동등하게 대우해 똑같은 점수를 책정해야 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원시험에서 영어를 필수과목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꼭 필요한 부서에서만 영어를 필수과목으로 하고 나머지는 영어를 아예 보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보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전 국민이 똑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계급 간의 격차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이와 더불어 경쟁만능주의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모순도 처방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6-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3345&Code1=001


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딸 고희경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리 남매를 버리고 돌보지 않은 내 아버지 고승덕은 서울시교육감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며칠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고 후보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고 앞으로 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고희경씨의 주장에 고승덕 후보도 할 말이 있을테죠.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주관적인 것이므로 양측의 주장을 들어보고 잘 판단을 할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딸이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고희경씨의 이름은 캔디 고로서 미국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생활을 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고씨의 글도 간결하고 명확한, 좋은 영어로 작성이 되었습니다. 고씨의 지적에 따르면 고후보는 가족을 돌보는데 일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금전적 도움은 고사하고 옆을 지켜주지도 않았고 연락조차 완전히 끊은 채, 사실상 두 자녀와 처를 완전히 내팽개친 것으로 보입니다. 고씨의 주장은 이러한 고 후보의 개인적 행위를 볼 때 다른 자리도 아닌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으로서 고후보는 적합지 않다는 것이죠.

이러한 비판은 고후보의 자질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단서의 일부이며 유권자로서 꼭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씨가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능했겠죠. 하지만 여러분 모두가 짐작하시듯, 그 가능성이라는 것은 사실 한여름 해운대에서 군고구마 찾는 것만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헛점이 너무나 많아 공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한국의 풍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본능적으로 나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연민의식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한국사회에 오래 뿌리를 내린 소위 유교적 전통에 따른 부모 공경의 의무감또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집단을 배신한 개인에 대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한국에선 중요한 것이죠. 이런 식의 공포는 사실 조폭들 뿐 아니라 조직을 중요시 하는 한국사회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선배를 무시한 후배, 고참을 깐 신참, 상사를 재낀 회사원들의 삶이 고달픈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조직의 화합을 해쳤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형태의 형벌을 받습니다. 더우기 형벌은 그 집단 내에서 그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죠. 덕택에 집단의 단결은 공고해 지지만 집단의 결함 또한 깊어지는 까닭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갖고 있지만 누구도 쉽게 던저버리지 못합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니까요. 게다가 적당히 굴러갈 때 떨어지는 떡고물 (연대감, 술자리, 자리, 이권 등) 또한 작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쩌다 한번씩 보는 영웅적 굴레 던저버리기에 환호하게 됩니다. 히딩크 감독의 서열무시에 우리는 찬사를 보냈고, 박칼린의 합리적 지도력에 감탄했습니다. 이들 모두 연줄, 서열 등을 무시한 채 개개인의 능력만을 보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그 집단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는데 새삼 놀랐던 것이죠.

이들의 리더십을 배우자는 열기는 뜨거웠지만 냄비처럼 식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집단에의 중독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오늘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집단의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요. 일의 능률과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되고 우정과 의리가 쌓이고 쌓여 우리는 세월호 참극을 맞았습니다. 끊임없는 향응과 접대로 쌓아온 집단의식은 그 어떤 규제와 법률, 양심도 무너뜨릴만큼 지독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한 정치의식 또한 마친가지입니다. 정치지도자의 공과는 상관없이 우리편만 찍어온 우리내의 정치는 이제 우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남을 욕할 일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집단의 중독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요?

우리가 절실한 것은 이 집단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대신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토론하고 고처가고, 심지어는 법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산은 산이라하고 물은 물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 이의 세월호 참사, 제 이의 삼풍 백화점 붕괴, 제 이의 성수대교 붕괴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고희경씨에게 힘든 결정을 한 것에 대한 감사와, 아버지가 없어 느꼈던 고통에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