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14, 2016

[왜냐면] 또 다른 박근혜를 막아야 합니다

한겨레 (2016.11.14)

드디어 사임했습니다. 최측근 권력 남용이 문제였죠. 여기에 뇌물 등 여러 혐의가 겹치며 여론이 악화됐고 더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2013년 6월 체코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페트르 네차스 총리 최측근이자 연인이었던 나기오바가 이혼 중이던 총리 부인을 감시하기 위해 공권력을 쓴 것이 큰 쟁점이었습니다. 뇌물 등 비리도 있었지만, 권력을 사유화했던 나기오바의 전횡은 공분을 샀죠.

체코 국민의 분노가 이해는 가지만 어디 우리 분노만 할까요. 그 분노는 광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두 주말 연속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잠을 자는 공주처럼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거국중립을 미끼로 시간을 끌고 있죠. 민주당 지도부도 하야, 탄핵, 거국내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공권력 개입으로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했고 오만으로 남북관계의 파탄을 낳았습니다. 무능으로 국정운영은 무너졌고 무관심은 목숨을 앗아가기까지 했죠. 취업률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경제성장률도 크게 둔화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크게 위축됐고 사상의 자유마저 침해를 받았습니다. 관제 데모가 되살아났고 공작 정치도 판을 쳤죠. 이제 국민이 준 권력을 남에게 던져주고 놀이하듯 사리사욕을 채웠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헌법을 통째로 뒤흔든 그런 대통령을 몰아내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게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지만 몇몇 검사의 판단과 의지에만 기대야 하는 이 현실이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힘없는 이들은 죽이고 재벌들은 살렸지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대통령의 미소가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임에도 체코 총리가 사임한 데에는 정치체제가 이를 강제했기 때문입니다. 체코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비례선거제도와 의원내각제를 바탕으로 민주체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권자는 의회선거만 하고 여기서 과반을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정부를 꾸립니다. 비례선거 덕에 한 정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정당 연합이 주로 그 일을 하죠. 이렇게 꾸려진 정부의 수반, 즉 총리는 그 과반의 의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반의 지지를 잃으면 정부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니까요.

권력을 잃을 가능성이 제도화돼 있으니 항상 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의 마음입니다. 연합 내 소수정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코에서처럼 말이죠. 체코 민심이 싸늘해지자 연합정부를 이루던 다른 정당들로서는 불안했습니다. 그런 총리를 감쌌다가는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참패할 것이 뻔했고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차스 총리가 인격이 더 훌륭해서 자리에 물러난 것이 아닙니다. 정치체제가 정부 수반을 정치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스위치를 국민에게 줬기 때문이죠.

박근혜는 곧 물러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박근혜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를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부를 해고할 힘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의 헌법으로는 그럴 힘이 없죠. 개헌해야 합니다. 그 개헌은 의원내각제를 향해야 합니다.

의원내각제가 익숙지 않은 듯하지만 이미 시행했었습니다. 바로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의 기운으로 말이죠. 일인독재를 막기 위해 시작한 의원내각제 민주체제는 일인독재를 꿈꾸던 박정희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박근혜는 예를 찾아보기 힘든 유령독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덕택에 그 아비가 파괴한 의회주의 전통을 되살릴 기회를 준 셈이죠. 국민의 정부 파면 권력을 되찾을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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