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8, 2016

[기고]반기문 총장님께


유엔은 참 소중한 국제기구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워져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에 법과 평화를 구현하고자 한 그 야심만으로도 칭찬할 만한 일이죠. 특히나 한국 땅에서 유엔은 더욱 특별하지 않습니까? 유엔은 북한의 남침 직후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유엔군을 꾸려 한국을 도왔습니다. 이는 냉전 최초의 전쟁이었고 그만큼 유엔의 역할이 현대사에서 작지 않을 것을 암시했죠.

짐작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유엔은 줄곧 유니세프, 세계보건기구 등 산하 기구들을 통해 복지와 건강 증진에 매진하는 한편 국제원자력기구,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통해 안정과 정의를 위해 뛰었습니다. 동티모르 분쟁을 평화적으로 끝낸 것도 한국에서 기억되는 최근 업적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런 유엔에 2007년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셨을 때 많은 기대가 있었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미국 연수 시절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운 고등학생이었다는 총장님의 개인사가 알려지며 그 기대는 더욱 커갔습니다. 게다가 상처와 분쟁이 그칠 날 없던 한국 현대사를 직접 지켜본 분이기에 유엔이 더욱더 적극적이 되리라는 기대도 했었습니다. 북한 핵과 관련해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사무총장이 되면 폭넓은 권한을 갖게 되므로 소위 ‘한반도 문제’에 대해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더 크다”며 드러내신 큰 포부에 뿌듯한 우리였습니다.

하지만 총장님의 임기가 끝나가는 지금 그 기대가 채워지기보다는 실망이 더 많습니다. 지난 5월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총장님을 “가장 우둔하며(the dullest), 최악의 총장 중 하나(among the worst)”라고 평가했습니다. 2009년 스리랑카 내전, 2010년 아이티 지진 당시 콜레라 창궐 등 위기에 대처가 미비했다는 지적이 날카로웠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재건, 핵 확산, 난민 문제 등 주요 문제를 다루면서도 강대국의 눈치만 보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뼈아프죠.

유엔 내에서도 일벌레로 소문이 날 만큼 열심히 일하셨으니 아주 섭섭하시겠죠. 게다가 흔히들 세계 대통령으로 부르는 그 자리가 그렇게 힘 있는 자리도 아닌데 그걸 몰라주니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 때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이 갑니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반대도 피해야 하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기부금 많이 내는 나라의 눈치도 봐야 하는 그 입장을 본인이 아니면 상상하기 어렵겠죠. 하지만 전임자들도 이런 구조 속에서 일해왔으니 반 총장님께만 유독 특별한 문제였던 것은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본인으로 인해 10년간 몸담았던 조직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누가 달가워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 달까지 유엔의 위상을 위해 끝까지 애쓰셔야 할 사명은 더욱 막중하다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띄우는 것은 지금 당장 유엔을 위해서 하실 일이 하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바로 한국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겁니다.

“사무총장 자신도 (정부) 직책을 수락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1946년 결의문이 있음에도 총장님의 퇴임 후 대선 출마 가능성은 유엔 안팎에서 늘 회자돼 왔습니다. 그만큼 명분과 법을 중시하는 유엔의 권위에 해를 입히신 것이죠. 유엔이 사무총장의 정치도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어 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내년 한국에서 정치를 시작하신다면 유엔으로서는 아픈 선례가 될 테죠. 트럼프 같은 미국 제일주의자가 대통령이 되어 안 그래도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 대한 회의가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은,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유엔을 아끼는 반기문 사무총장님이 바라는 바가 결코 아닐 테죠. 당장 침묵을 깨고 한국 대선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결연한 선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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