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5, 2014

[기고]억지와 침묵의 답답함

경향신문 2014-09-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9051925205&code=990304

잘잘못을 따지다가 정 안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 뭐야?” 이 말은 연령차가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선 “너 몇 살이야?”로 변형돼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말은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와 너의 관계로 일을 해결해 보겠다는 억지라는 데서 기본적으로 똑같습니다. 당신 뭐야라는 물음은 당신이 어떤 권위가 있어서 이렇게 따지느냐는 물음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권위의 있고 없고의 문제로 변질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죠. 대개 이런 말은 자신의 사회적 권위가 상대방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 먼저 꺼내기 마련입니다. 너 몇 살이냐는 물음도 같습니다. 나이가 곧 계급인 사회에서 계급을 밝히라는 것이죠. 물론 딱 보기에도 나이 든 사람이 묻는 게 보통입니다.

이런 억지에 “내가 누군 줄 알기나 해?” 또는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이렇게 반응하면 그 덫에 걸려드는 셈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뒷전이 되고 상대편의 권위에 맞서는 나의 권위를 찾기에 바쁩니다. ‘내 주장이 옳다’는 ‘내가 더 낫다’로 바뀌는 것이죠. 물론 이는 애초에 상대가 원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상대는 자신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빠르게 깨달은 후이니까요. 논의가 변질되면 애초의 시비를 따지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답답함만 더해가죠.

답답하기는 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데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경우엔 정말 환장할 것 같죠. 그나마 상대방이 친한 사람이거나 아랫사람이라면 불러서 호소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윗사람이어서 불러 앉힐 수도 없는 경우엔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 답답한 침묵은 나와 상대의 힘의 관계를,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힘이 없다는 사실을 더 뼈아프게 보여주기 때문이죠.
상대의 침묵이 지속되면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됩니다. 그 침묵 자체가 논란거리가 되기 때문이죠. 어느덧 시비를 따지고 싶은 쪽은 상대방의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물론 그래야 시비를 따질 수 있어서이기는 하지만 그 침묵이 유지되는 동안 상대방은 논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침묵을 지킬 수 있는 여력 또는 권력이 있는 쪽이라면 그쪽으로선 더 바랄 것이 없겠죠. 

이렇게 교묘한 억지와 간교한 침묵에 빠지는 것을 상상해 보시죠. 정말 답답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낯설지는 않지요? 이 불쾌한 낯설지 않음은 4월16일 이후 세월호 정국을 헤쳐나가고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사생활을 탈탈 털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자격이 있는지, 어떤 흠이 있는지로 논의를 변질시켰죠. 또 다른 한쪽으로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함으로써 ‘대통령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대답하라’고 요구하는 사태를 성공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가, 얼마만큼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고,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그만큼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지금의 사태가 진실을 밝히고 시비를 가리는 데 발목을 잡고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나아가 저렇게 무능한 정부가 왜 필요한지, 어떤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한다는 데 있어서도 큰 걱정인 것이죠. 정부가 정당성을 잃으면 가장 큰 피해는 또다시 민중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떨어지니까요. 이런 걱정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국정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고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커다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을 모르나 봅니다. 억지와 침묵을 당장에 걷어내고 대통령의 의무에 충실할 것을 엄중히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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