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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ly 20, 2014
Friday, July 11, 2014
[시론]‘인조의 실수’ 21세기엔 반복 말아야
경향신문 2014-07-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112101465&code=9903032005년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동북아 균형자론’을 소개했습니다.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동북아시아에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자는 구상이었죠. 하지만 미군의 보호와 안보를 동일시하던 이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렸고, 보수 신문들은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은 이를 “과대망상”이자 갈 데까지 간 “반미(反美) 바람”이라고 평했습니다. 현실을 무시한 구상이고 결국 한국은 외교무대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게 주장의 골자였습니다. 결국 이 구상은 구체적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잊혀졌죠. 하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균형자의 역할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요.
2005년만 해도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전 세계에 최첨단 전쟁수행능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특히 중국이 가진 좌절은 매우 큰 것이었고, 중국 군대의 폭발적 현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4년의 중국은 항공모함을 갖고 스텔스 전투기를 판매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게다가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를 거치며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중국이 세계무대에서 미국과 패권을 다투게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패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베 정권의 일본 군국주의 부활 신호탄을 미국이 환영하는 것과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이 북한을 제쳐두고 한국을 먼저 방문해 임진왜란을 들먹이며 두 나라의 오랜 연대와 대일 공조를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죠. 불쑥 성장한 중국과 이를 경계하는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딱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 중 어느 쪽도 우리는 멀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미래를 쥐고 있는 나라니까요. 두 나라 사이에 패권다툼이 격해질수록 우리의 입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좋건 싫건 균형자의 역할을 해야 하죠. 그것도 아주 잘해야 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의 폐위를 알리는 인목대비의 교서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논하며 후에 청이 되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균형자의 노릇을 한 것을 듭니다. “광해는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로 만들었다.” 이 숭명반청의 이데올로기에 갇혀버린 인조의 정권은 강해져만 가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적극적인 실리외교를 통해 균형자의 노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오랑캐를 운운하며 후금의 신경을 되풀이해서 건드리고, 결국 청황제의 조선 정벌을 초래합니다.
인조 정권은 기존의 세력인 명과 성장하는 청 사이에서 양쪽과의 거리를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하나를 제압할 수 없도록 적당히 균형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양쪽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자주국방의 힘을 키워 두 나라 모두 조선을 내버려 두도록 해야 했죠. 균형자의 노릇을 잘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딱 지금의 한국의 사정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국운이 흔들리고 있어도 인조는 개혁은 고사하고 반정공신의 입김에 휘둘리며 실책에 실책을 거듭했습니다. 군대는 안보를 포기하고 정권 지키기에 바빴고 일반 백성은 온갖 의무와 세금에 절규했습니다. 인조는 “내가 용렬하여 시비를 분별하지 못했고, 게으른 데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며 사과만 되풀이했지 정작 절실했던 행동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했습니다. 이 또한 지금의 한국 사정과 비슷해 보입니다.
정작 절박한 사명은 못 본 채 정권 유지에 모든 것을 희생했던 인조의 실수, 21세기에 와서도 되풀이하면 안될 것입니다
Tuesday, July 1, 2014
‘예의염치’ 없는 한국 정치
인사이트 2014/07/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4070&Code1=001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화교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건물 정면에 크게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교훈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의는 예절과 의리를 말하는 것이고 염치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갖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일컷는 것이죠.
이 예의염치는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 난징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국민당 정부가 사용한 국가 통합의 유교이념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실패한 정부의 이념의 핵심이지만 살아남아 화교들 사이에서 그 정신이, 멀리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인상적인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세고 돈이 많아도 신세를 질 수 밖에 없고,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이라도 사회에 공헌을 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게 하니 미안한 것이죠. 미안한 만큼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염치가 있어야 상대방도 귀찮더라도 도와줄 공산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당장 주변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불쾌해진 사람들은 도움에 인색하게 되기 쉽습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늘수록 사회전체가 각박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많은 실정을 되풀이 했습니다. 특히 세월호 정국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 둘이 아니죠. 그 걱정거리 중 하나는 이 정부는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창극 총리 지명자는 교회 등 과거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없다”는 등 일반적 역사적 인식에 반하는 발언으로 국가적 공분을 일으켰죠. 하지만 본인은 아무 문제가 될 태도로 두 주를 버텼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노와 실망은 더욱 커지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사퇴를 하는 마당에도 “언론이 전체의미 왜곡·훼손” 주장하고 “여론은 변하기 쉽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한다며 여론에 굴해야하는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가문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바로 세월호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를 한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킨 것이죠.
새로 구성했다는 내각을 들여다보면 임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논문표절, 병역, 재산 형성, 과거행적 등 전형적인 지도층의 문제를 하나 둘씩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정홍원을 유임시킴으로써 세월호에 책임지는 지도자는 결국 전무한 셈이 되어버렸죠.
이를 보는 국민들은 얼굴이 화끈 거릴 노릇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야 답답하지만 사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간 대국민 사과를 미루어온 박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해하는 국민들이 더 답답할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는지, 왜 자기를 비난하는지 이해가 안 가겠죠. 이해가 안 가니 답답하고, 미안해 할 일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염치가 없는 것이죠.
하긴 평생을 남에게 군림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겨온 이들이 남에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많은 신세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총리, 장관의 권력은 무시무시합니다. 공권력을 주무르고 법과 정의를 재단합니다. 지금처럼 한 정당이 대통령직과 국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을 때는 그 정당의 권력은 정점에 달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릅니다. 안정과 안전을 보호할 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평안을 지켜야합니다.
향응에 취할 때가 아니라 막중한 책임에 잠이 잘 안오는 게 정상일테죠. 게다가 이러한 권력은 국민들의 양해를 통해 잠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민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죠. 권력이 센 만큼 더 몸을 숙이고 겸손해야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담화만 거듭하고 이마저 질문 하나 받지 않는 이 정권은 기본적인 민주적 의무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듯해 안타깝습니다.
한국처럼 소수자들이 살기 힘든 땅에서 살아야 했던 화교들로서는 염치라는 덕목이 더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선 한국인들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앞으로의 처신에도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소수, 약자들에게만 염치가 소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강위의 작은 쪽배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유유히 떠있게 하는 것도 강물이고 배를 뒤집는 것도 강물인 것처럼, 군림하게 하는 것도 국민이고 갈아치우는 것도 국민임을 알아야 하겠죠.
그러니 그 쪽배들은 염치라도 있어야 될 듯합니다.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화교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건물 정면에 크게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교훈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의는 예절과 의리를 말하는 것이고 염치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갖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일컷는 것이죠.
이 예의염치는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 난징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국민당 정부가 사용한 국가 통합의 유교이념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실패한 정부의 이념의 핵심이지만 살아남아 화교들 사이에서 그 정신이, 멀리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인상적인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세고 돈이 많아도 신세를 질 수 밖에 없고,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이라도 사회에 공헌을 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게 하니 미안한 것이죠. 미안한 만큼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염치가 있어야 상대방도 귀찮더라도 도와줄 공산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당장 주변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불쾌해진 사람들은 도움에 인색하게 되기 쉽습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늘수록 사회전체가 각박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많은 실정을 되풀이 했습니다. 특히 세월호 정국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 둘이 아니죠. 그 걱정거리 중 하나는 이 정부는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창극 총리 지명자는 교회 등 과거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없다”는 등 일반적 역사적 인식에 반하는 발언으로 국가적 공분을 일으켰죠. 하지만 본인은 아무 문제가 될 태도로 두 주를 버텼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노와 실망은 더욱 커지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사퇴를 하는 마당에도 “언론이 전체의미 왜곡·훼손” 주장하고 “여론은 변하기 쉽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한다며 여론에 굴해야하는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가문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바로 세월호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를 한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킨 것이죠.
새로 구성했다는 내각을 들여다보면 임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논문표절, 병역, 재산 형성, 과거행적 등 전형적인 지도층의 문제를 하나 둘씩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정홍원을 유임시킴으로써 세월호에 책임지는 지도자는 결국 전무한 셈이 되어버렸죠.
이를 보는 국민들은 얼굴이 화끈 거릴 노릇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야 답답하지만 사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간 대국민 사과를 미루어온 박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해하는 국민들이 더 답답할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는지, 왜 자기를 비난하는지 이해가 안 가겠죠. 이해가 안 가니 답답하고, 미안해 할 일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염치가 없는 것이죠.
하긴 평생을 남에게 군림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겨온 이들이 남에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많은 신세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총리, 장관의 권력은 무시무시합니다. 공권력을 주무르고 법과 정의를 재단합니다. 지금처럼 한 정당이 대통령직과 국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을 때는 그 정당의 권력은 정점에 달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릅니다. 안정과 안전을 보호할 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평안을 지켜야합니다.
향응에 취할 때가 아니라 막중한 책임에 잠이 잘 안오는 게 정상일테죠. 게다가 이러한 권력은 국민들의 양해를 통해 잠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민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죠. 권력이 센 만큼 더 몸을 숙이고 겸손해야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담화만 거듭하고 이마저 질문 하나 받지 않는 이 정권은 기본적인 민주적 의무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듯해 안타깝습니다.
한국처럼 소수자들이 살기 힘든 땅에서 살아야 했던 화교들로서는 염치라는 덕목이 더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선 한국인들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앞으로의 처신에도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소수, 약자들에게만 염치가 소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강위의 작은 쪽배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유유히 떠있게 하는 것도 강물이고 배를 뒤집는 것도 강물인 것처럼, 군림하게 하는 것도 국민이고 갈아치우는 것도 국민임을 알아야 하겠죠.
그러니 그 쪽배들은 염치라도 있어야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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