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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14, 2017

[세상읽기]‘잘못을 고치는 게 잘못’이라는 억지

경향신문(2017.10.12)

오래전 한 유명 스님의 말씀에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나 싶었죠. 게다가 사람들이 심각하게 논하기까지 하니 이상할 수밖에요. 아직도 심오한 불교 철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산을 산이라, 물을 물이라 부르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됐죠.

미국엔 지금 한창 역사 논란이 뜨겁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탓에 안 그래도 악화되던 인종차별 문제가 더욱 날카로워졌습니다. 인종차별 문제가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를 나누는 잣대와 겹쳐지며 정치 문제 전반에 떠올랐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철거되는 것은 그 여파입니다. 철거 반대자는 트럼프 지지자와 많이 겹칩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둘러싼 전쟁으로 남부 연합군이 패하며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남부의 정치,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흑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부활했죠. 백인우월주의도 당당히 돌아왔습니다. 큐 클럭스 클랜(KKK)이라는 백인 기독교 테러단체가 극성을 부리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들이 남부의 역사를 기린다기보다는 부활하는 백인우월주의를 대표한다고 봐야 하는 이유죠. 자연 흑인과 인권단체들이 철거를 요구해왔고 요즘 들어 지방정부가 이를 수용하는 분위기입니다.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하죠. 노예제는 좋은 일이 아니지만 남부는 노예제가 아니라 주정부 주권을 위해 싸웠다. 게다가 동상을 없애는 시도는 역사를 지우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주정부의 주권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주권이었죠. 게다가 동상을 치운다고 그들이 말하듯 역사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원래 동상은 기억을 넘어 기리고 자랑스러워하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동상을 지키자는 이들은 그 과거를 기리고 내심 그리워하는 셈입니다. 연방군의 승리, 노예제 폐지도 중요하지만, 남부의 전통도 중요하다는, 산은 산이지만 물도 산이라는 억지입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라는 억지도 있습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이 관제 데모에 동원할 목적으로 우파 단체를 지원한 정도가 아니라 직접 만들었던 정황이 파악됐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뿐인가요. 국정원, 군은 댓글부대를 조직해 여론을 조작했고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들은 공작과 음해로 민주체제의 근간을 손수 흔들었습니다. 부실 산업으로 수조원은 우습게 날렸고 블랙리스트로 언론과 개인의 자유마저 짓밟았습니다. 4대강사업을 통해 한반도 생명줄을 끊어놓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해 평화 기반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한 속보에 탄식도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가 고공행진을 하는 이유입니다. 거기에는 적폐청산에의 요구가 있죠.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를 정치보복이라 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개혁을 개악이라고도 했죠. “정치보복의 헌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 굿판”이라며 적폐청산에 대응하기 위해 대책특위까지 만들었습니다. 내 잘못은 잘한 것이고, 그 잘못을 고치려는 게 잘못이라는 파렴치한 억지입니다.

짐작하건대 그 적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일수록 목청을 높이겠죠. 그러니 쉽게 물러서지도 않을 겁니다. 어디 메모라도 해두고 선거 때 확인해야겠습니다. 항의 전화도 괜찮겠죠. 이번 가을엔 성철 스님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생각납니다.

Wednesday, March 1, 2017

[세상읽기]경험을 나누는 것이 민주체제


기록적 한파의 경험과 지구온난화 간의 괴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경험이 중요한 자산임은 상식입니다. 취업 공고엔 경험자 우대라는 글귀가 자주 등장하고 역사가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이유입니다. 논쟁에서도 경험을 앞세운 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내가 직접 겪었다고 하면 주장에 힘이 실리게 마련이죠. 그래서 논쟁이 치열할수록, 경험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이런 화법을 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정치인 중에도 꼰대가 많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표적인 경우죠. 2016년 선거전 내내 비즈니스 경험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자신의 엄청난 부는 곧 지도자가 지녀야 할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떠들어댔죠. 비난과 반대도 컸지만 많은 이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명박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치인입니다. 대통령 시절 그 유명한 ‘해봐서 아는데’ 시리즈를 쏟아냈죠. 장사를 해봐서, 배를 만들어 봐서, 민주화운동 해봐서 등등 경험을 강조, 과장하면서 주장의 근거로 즐겨 삼았습니다.상사나 연장자 등 경험이 많다고 여기는, 또는 여겨지는 층이 상대적으로 경험이 얇거나 그렇게 여겨지는 이를 향해, 경험을 무기로 일방적 말을 쏟아내는 경우 전자를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들의 말투도 굉장히 비슷합니다. 나는 이렇게 잘하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의 말투가 그 전형이죠. 나는 생전 그런 실수가 없었는데 넌 매일 실수냐. 나는 더한 일도 참았는데 넌 왜 그것도 못 참냐. 내가 학생 때는 패기가 넘쳤는데 너희는 왜 열정도 없냐. 즉 꼰대는 경험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강조돼 의미 있는 대화나 검증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겠습니다.

경험이 소중한 것은 맞지만 큰 함정도 있습니다. 경험은 기억이 되고 자아의 일부가 되는 까닭에 미화되기 쉽죠. 실수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는 묻히거나 심지어 잊히기도 합니다. 트럼프의 경우 도산과 빚으로 고생했지만, 선거전 동안 이런 실패에 관해서 일언반구도 없죠. 또 한편으로 경험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에 편협한, 또는 그릇된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눈보라의 경험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의심은 좋은 예입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쳐서 집이 완전히 묻히고 전기가 일주일 끊기는 경험을 했다 해도 이는 개인의 지엽적 경험일 뿐이죠. 하지만 이런 경험을 지구온난화 현상의 방증을 찾은 듯 으스대는 사람도 미국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경험을 맹신하며 편협한 시각을 정치세력화한 이들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어버이연합 회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6·25전쟁의 경험, 전후 불안정한 시대를 산 경험이 정치적 열정의 근원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빨갱이’들에게 당했다는 기억은 빨갱이가 사라진 시대에서 빨갱이를 계속 찾게 하였을 겁니다. 그러니 그 빨갱이를 보지 못하는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가슴 시릴 만큼 아프게” 부모를 총탄에 잃은 박근혜는 자신의 불안감을 바탕으로 “국민을 각종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겠다며 사드를 밀어붙였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의 권한을 “선생님”에게 던져주고서 “컨펌”을 기다리는 것마저 정당화했습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경험했다는 확신은 검증을 힘들게 해 위험합니다. 억지와 꼰대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각종 오류에 취약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경험을 무작정 버릴 수는 없죠.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을 모으는 지혜입니다. 어제 눈 폭탄을 맞았지만 겨울 전체를 보면 역사적으로 더운 겨울이었던 것, 이제는 저성장 경제의 구조적 제한이 젊은이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 우리 집이 빨갱이 손에 몰락했지만 서북청년단의 총칼에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을 서로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어제와 오늘을 살피고 나와 너의 대화를 이어가야 합니다. 민주체제는 이를 정치적으로 구체화한 겁니다. 서로의 경험을 비교해 목소리를 모으는 것이 민주체제이죠. 한 사람의 직관과 경험에 기댄 권력은 독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혹시 독재에 익숙해지지 않았었나요. 박근혜를 파면하며 느슨해진 경계의 줄을 바꾸어 매야겠습니다.

Monday, March 7, 2011

이명박 대통령 지지도 믿기 어려워

한국일보 (와싱턴 디씨판)"이명박 대통령 지지도 믿기 어려워"
http://dc.koreatimes.com/article/648102

남태현 솔즈베리 대학 정치학 교수, MD
입력일자: 2011-03-07 (월)

한국일보 오피니언란(2월 28일자)에 실린 정진영 경희대 교수의 글 (http://dc.koreatimes.com/article/646621)을 반박하고자 한다.
정 교수의 글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한국국민의 놀라운 지지를 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50% 정도의 지지도를 얻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 지지의 주요한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 “적극적인 경제외교의 전개” 그리고 “한미 관계의 강화와 대북정책의 정상화”를 그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정 교수의 글은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 썼다면 C를 주기도 힘든 글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말하는 이명박에 대한 지지도 자체가 허황되다는 점이다. 그 놀라운 50% 정도의 지지율을 보라. 이 지지율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는 한나라당 의원들조차도 의심하는 것이다. 지역구를 돌아본 많은 의원들이 수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대통령 지지율 50%에 대해 “대체 그런 조사는 어디서 나온 거냐?(한나라당 박성효 최고위원)”는 힐난 섞인 질문이 나왔다(경향신문 2월 16일자).

더구나 지역에 따라서는 민심이반이 더욱 심하다. 그럼, 왜 이렇게 지지도와 실제 피부로 느끼는 지지의 정도가 다른 것일까? 이는 바로 여론조사 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여론조사는 전화로 하는데, 이는 주로 집 전화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요즘 집 전화로 전화를 하는 한국 사람은 대부분 핸드폰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이 대통령의 지지도는 나이 많은 기존 지지층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많이 반영된 조사라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의 지지가 저조한 중년, 청년들의 목소리는 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으로, 이 대통령의 지지가 놀랍다는 그의 관찰은 학자로서는 더욱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결론이 허황되므로, 그 결론을 입증하는 그의 논의는 더욱 허망하다. 사실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살펴보자.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라는 말은 도무지 무슨 소리일까. 여기 계신 동포들은 미국 뉴스를 조금이라도 보셨다면 아실 듯이, 20개국의 정상이 모였다고는 믿어지기 힘들만큼 이 정상회담은 지면을 장식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성공이라면, 아무 탈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 외에는 도대체 무엇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는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는 아무 성과가 없는 것이었다.

“적극적인 경제외교의 전개”라는 것도 한미자유협정을 말하는 것인데, 이 또한 이대통령이 아닌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이었다. 글의 시작에 “세계 금융위기를 조기에 극복”했다는 말도 나오는데, 이건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이겠다. 1997년의 위기라면, 김대중 대통령이 극복했고, 현재의 세계 금융위기라면 미국과 유럽의 위기를 말하는 것일테니까. “녹색성장”이라는 그의 표현은 사실 이 대통령도 들으면 웃을 일이다. 4대강 사업으로 강산이 파헤쳐지고 있는데 이걸 녹색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억지나 무지다.

“한미관계의 강화와 대북정책의 정상화” 또한 이명박 대통령의 치적일 수 없다. 한미 관계는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지 한국의 대통령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결국은 손을 들고 미국에 굴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북정책의 정상화 또한 정 교수의 안목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북한에 적대적이건 아니건, 현재 이명박의 정책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그의 정책은 결국 평화를 지키는데 실패했고, 이를 가리켜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태풍으로 무너진 집터에 남아 짖고 있는 개를 보고 집 잘 지켰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말도 안 되는 근거로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뒷받침하려는 정 교수의 글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 평생 공부와 글쓰기로 시간을 보낸 정진영 교수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편없는 글이 한국 어디도 아닌, 이 먼 타향에 실린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Wednesday, March 10, 2010

[독자칼럼] 대통령에게 희망을 / 남태현

한겨레 2010-03-10
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409304.html#


김연아에게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피겨스케이팅에 문외한인 저같은 사람도 그의 멋진 행진에 가슴이 벅찼더랬습니다. 그가 얼음위에서 보여준 용기와 아름다움은 전세계를 감동시켰죠. 하지만, 우리에겐 무엇보다도 그녀가 준 희망이 가장 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지만, 꿈을 버리지 않으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한때 젊은 독자들을 흥분케한 농구만화가 있었습니다. 전국스타 선수가 조그마한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 했죠. 옛날 어느 경기에서 뒤지고 있을 때 그는 졌다고 체념합니다. 내색은 못했지만요. 마침 밖으로 나간 공을 주워주던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경기는 끝이 난다고. 희망을 되찾은 그는 극적인 승리를 일궈냅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농구코치로 있는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아도, <빠삐용>을 보아도, 희망을 가진 자들은 큰 시련을 이겨냅니다. 우리도 그런 적이 있었죠. 군사독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꺼지지 않던 희망은 마침내 1987년 100만 시민을 길거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자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이젠 하도 엽기적인 사건이 많아서 잊혀젔지만, 옛날에는 ‘막가파’가 있었습니다. 납치와 감금, 엽기적 살인으로 세상을 암담하게 했던 그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의 미래와 희망을 보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그들에겐, 막가는 행위가 삶의 이유였고,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래서일까요, 이명박 정부의 행보가 슬프지만, 이해가 가는 것은요?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언제 그랬냐는듯 온기라곤 찾을 수 없고, 그 강자락들도 부서지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목숨을 잃고 개그맨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방송국 사장들은 혼쭐이 나고, 세종시 논란덕에 세종대왕만 구차하게 됐습니다. 노동자들은 삶에 터전 하나 지켜보려다 법의 회초리를 맞고, 너무나 가진 것이 많은 자에겐 법은 한없이 상냥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여러가지 정치적, 개인적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기가 아직 창창한 대통령을 두고 무슨 소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헌법은 단임을 못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더 무엇을 하겠습니까? 퇴임후 미국 전 대통령 카터나 클린턴처럼 국제외교를 펼치거나 저서활동을 하기도 쉽지 않을테고, 그렇다고 다시 시장이 되기도 뭣하고, 국회로 나가기도 뻘쭘할테지요. 학생이 시험이 없으면 공부합니까? 국회의원들도 재선이 하고 싶으니까 민심도 살피고, 생전 안가는 시장에 나와 악수라도 아는 것이죠.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이젠 선거도 없고 시험도 없습니다. 부담도 없지만 희망도 없죠. 게다가 전직 대통령들의 수모를 보고 있자니, 빨리 무엇인가 해놔야 할 절박함도 들 법 합니다. 덕택에 정치는 너무나 거칠고 아찔하게 파괴적입니다. 희망이 없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이 대통령의 임기는 곧 끝이 납니다. 문제는 다음 대통령도 비슷한 길을 걷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숙제는 빨리 대통령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들만 맨날 술래가 되는 꼴이 되기 쉽습니다.

남태현 미국 메릴랜드 솔즈베리대 교수

Wednesday, April 15, 2009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2009.4.15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 시절인 2001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부시의 고향 텍사스를 방문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접을 받았다. 직접 트럭을 몰고 드라이브도 즐기며 아주 친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부시는 푸틴의 “가슴과 영혼”을 보았다며 정상회담의 성공을 자축한다. 물론 푸틴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치켜세우던 부시는 러시아에서 실제로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 그리고 그 임기가 끝난 뒤에는 총리로서 권력을 이어가는, 민주주의의 “가슴과 영혼”과는 거리가 있는 지도자였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몰랐을 것이 확실하다. 대통령이 모르니 어린 학생들이 알 수가 있나.
나는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하여 미국 학생들과 토론을 하는 것은 늘 새롭다. 많은 학생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선 그런 고정관념을 깨,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보람되다. 내가 좋아하던 토론의 한 예가 푸틴의 러시아였다.
푸틴은 2000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은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내전이라는 호재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일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이후 푸틴은 정치적 반대를 하나하나 잠재웠다. 2003년 가스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회장의 체포는 그 신호탄이었다. 메시지는 아주 분명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그 누구도, 아무리 부유하고 세력이 굳건하더라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정치제도도 그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체첸 지역에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폭압적인 군사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푸틴이 무엇보다 공들인 것은 아무래도 언론에 자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노력은 치밀하고 총체적이었다. 그의 치부를 건드리던 유명 티브이채널 는 하수인을 통해서 길들였고 회사의 사장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체포된 데 이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회사를 포기한 건 물론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지방의 방송사들은 알아서 스스로 푸틴이 싫어할 보도를 자제하기 시작했다. 방송사의 소유권도 하나하나 정부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그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했던 토론이나 야당의 목소리는 불과 수년 만에 러시아 전역의 티브이에서 사라지는 지경에 이른다. 말을 듣지 않는 개개 언론인들 또한 하나하나 길들여지거나 사라져 갔다.
보도지침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기억되는 우리는 아마 다음의 코미디 같은 사건이 그렇게 우습지만은 않을 것이다. 2008년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스톱 리스트’가 존재한다. 이 리스트에 있는 비판적인 인사는 티브이의 인터뷰나 방송 출연이 실질적으로 금지된다. 심지어 유력 야당 지도자들도 티브이에서 보기가 이제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평범한(?) 정권의 비판자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국경 없는 기자회’라는 단체에 따르면 푸틴의 집권기에 18명의 기자가 살해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자기 집 앞에서 살해당한 안나 폴릿콥스카야라는 여성 기자일 것이다. 그는 체첸지역의 전쟁참사를 끊임없이 보도해 모스크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푸틴 비판자였다. 대가는 끊임없는 살해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협에 시달리던 그가 변을 당한 날은 우연인지 푸틴의 생일이었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 두 번의 의회선거를 합법적으로 치른 푸틴. 그가 과연 민주주의의 수호자였을까? 당연히 답은 너무나 뻔한 ‘아니요’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못해 독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음에 답을 하기가 2009년엔 수월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내 학생들은, 특히나 부시를 지지하는 학생들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푸틴의 반민주적인 행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도 치르고, 자신이 지지하는 부시가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떤 학생들은 내가 조목조목 따지면 거의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의 수는 적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하기엔 너무 뻔하게 그의 독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화를 내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뭐라 그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난 시간이 갈수록 설사 누가 그런 비유를 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길 진심으로 빈다. 왜냐하면 그 반대는 상상하기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람이 방송사를 억지로 장악하고, 대통령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던 뉴스 앵커가 시청자들과 회사 동료의 지지에도 뉴스에서 중도하차하고, 대통령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진행자가 프로그램의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방송을 그만둘 뻔했다. 난 이런 이야기가 러시아만의 것이길 바랐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한겨레 기사등록 : 2009-04-15 오후 10:16:22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500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