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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February 25, 2019

황교안, 기독교, 종교

“2015년 국무총리로 있을 때 가뭄이 극심했다. 함께 동역하는 분들과 기도를 시작했는데 2주 후에 비가 내렸다. 또 국정의 어려움 중 하나가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인데 생명을 살리는 법안인 테러방지법과 북한인권법이 10여년이 지나도 통과가 안돼 기도를 시작했는데 두 달 후에 통과가 된 일도 있었다.”
[양권모 칼럼]‘어대황’이라고, 기독교 근본주의 제1야당 대표의 출현
경향신문 (2019.02.25) 

"잘못된 믿음"이라고 조소할 수 없다. 멀쩡한 교회의 전도사가 아닌가! 그들의 잣대로 보면 보통을 넘는 "진실된 신자"이다.
"개독교"라며 무시할 수 없다. 믿음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는 역사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황교안을 보며, 태극기 부대를 보며 종교의 의미와 문제를 곱씹어봐야한다.
황석영의 <손님>이 생각나는 아침...

Monday, February 18, 2019

[세상읽기]이쪽 저쪽 편 가르는 ‘부족 마인드’

경향신문 2019.02.07

한국에서는 자기 부족에 충실하고, 어떤 부족에 속하는지 따지는 게 중요합니다. 한 부족끼리는 편의도 봐주고 서로 끌어줍니다. 계약도 쉽고 돈거래도 수월해집니다. 서로 참견과 잔소리도 주고받죠. 내부 위계질서도 중요합니다. 나이, 지위 등 권위가 귀할 수밖에요.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다간 큰일입니다. 모난 놈이 되죠. ‘사회성’도 없는 놈이 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조심조심,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길들였습니다. 개인으로 온전히 서기가 불안하고 그렇게 서 있는 개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은 그 부작용일 겁니다. 게다가 판단마저 흐려지기 쉽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주장을 교환하기보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게 익숙하니까요. 우리 부족인지 저쪽인지, 우리 부족이면 내 밑인지 위인지 가늠합니다. 그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마저 달라지기도 하죠.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이 미국 뉴욕에서 공무 연수 중 일행과 스트립바를 방문,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스트립바에 가서 옷 벗은 무희 춤을 즐겼다는 제보가 있었죠. 최 의원은 술집에 갔지만, 계산은 사비로 했다고 맞받았습니다. 공무 수행과 사적 행위의 구분은 따져볼 만합니다. 세금으로 묵은 호텔에서 사비로 술 마시는 것은 괜찮은가? 그렇다면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하는가? 미국과 한국의 술 문화 비교도 해볼 만합니다. 노래방 도우미랑 어깨동무하는 것과 옷 벗은 무희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 노동의 소비는 정당한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정당한가? 하지만 치열하고 건전한 토론 대신 논의는 부족 따지기로 전락했습니다. 최 의원은 제보자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라고, 저쪽 부족이니 믿을 말이 아니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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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경남도지사가 드루킹 댓글조작 관여 유죄 판결을 받고 법정구속까지 됐습니다. 컴퓨터 등 장애 업무방해죄는 1995년에 만들어진 뒤 단일 혐의로 실형이 선고된 적이 없어서 충격을 줬죠. 하지만 이 판결은 놀라운 기술 변화에 따른 우리 사회, 그리고 민주체제에 대한 숙제 또한 주었습니다. 누구나 위키피디아, 유튜브 등에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오늘, 이 법을 어떻게, 얼마만큼 적용해야 하나? 댓글 위력이 얼마나 큰가? 이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인터넷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당장 논의해야 할 문제들이죠. 하지만 김 지사와 지지자들은 판사가 속해있다고 추측되는 부족을 도마에 올렸습니다. 법원행정처 인사관리심의관을 지냈으며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비서실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적했죠. 저쪽의 판단이니 객관적일 수 없다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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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의 보복이라는 주장은 여러모로 비생산적입니다. 첫째, 이미 지적한 대로 생산적 논쟁의 기회를 앗아갑니다. 둘째, 주장의 진위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동기를 알아야 판단할 수 있지만 마음속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죠. 그러니 논쟁은 보복이다, 아니다 사이를 맴돌기만 합니다. 자기들 분노 게이지를 한껏 높이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그것뿐이죠. 문제 해결은커녕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셋째, 치열한 논쟁 대신 부족의 깃발만 가리다 보면 스스로도 퇴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 가리기는 쉽습니다. 증거를 살피고 주장을 가다듬는 게 어렵죠. 쉬운 해결책만 좇다 보면 지성은 마비되고 정체성마저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한인이 많이 사는 미국 버지니아는 정치 추문으로 요즘 시끄럽습니다. 주지사 노덤의 대학 졸업앨범에서 백인테러집단인 KKK 복장을 한 사람과 흑인으로 분장한 백인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이들 중 하나가 노덤 주지사라는 의혹과 함께요. 분노가 폭발했고 사임 요구가 거셉니다. 민주당 진영에서도 말이죠. 인종 갈등 극복은 민주당의 주요 과제이고, 그런 만큼 좌시할 수 없죠. 보수 쪽 정치 공세로 볼 만한 정황증거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를 들먹이는 대신 대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누가 의혹을 제기했건, 그 동기가 무엇이건 민주당 정체성을 위협할 사태임을 직감한 탓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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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편 잘못에 적극적으로 침묵하는 부족 마인드는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회 발전에 큰 관심 없어. 우리는 이 정도로 퇴화한 부족이야. 우리는 그 정도 잘못은 잘못으로 보지 않아. 고백을 들었으니 선택을 해야겠죠. 부족 멤버십에 흡족하며 같이 퇴화할 것인가. 성찰하며 앞으로 나갈 것인가.

Sunday, January 13, 2019

미국정치 이야기 #2, 주목할 미국 정치 신인, 오카시오-코르테즈

이번 미국 중간선거의 민주당 승리가 흥미로운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 그 중 눈에 띄죠. 당장 의회 차원에서 여러 조사가 이루어질 전망입니다. 뮬러 특별검사의 조사도 끝이 난 듯 해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다양성입니다. 총 435명 하원에 여성 의원은 84명을 넘긴적이 없지만 이번엔 102명 입성했죠. 성소수자도 최소 10명, 23명의 초선의원이 유색인종 등으로 눈에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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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이는 단연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29·민주·뉴욕주)입니다. 푸에트리코 출신 아버지를 둔 바텐더 출신으로 10선의 민주당 중진을 무너뜨리고 후보가 될 때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최연소) 당선되면서 그 유명세는 점점 커져만 가는 듯 합니다. 최근 60 Minutes 인터뷰도 그 한 예죠. 좋건 싫건 그녀의 이름은 오르내리고 중진들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된 듯 합니다.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등의 딱지를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죠. 변화는 급진주의자들이 만들어왔다. 내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더 비현실적이다라는 당찬 주장을 환한 미소와 함께 내놓습니다. 특히 환경분야에서는 굉장히 강경파고요. 12년 안으로 화석연료를 없애는 경제체제로 완전히 전환하자는, Green New Deal 이 그 핵심입니다. 이 운동가들이 민주당 지도자 펠로시 의원 사무실을 점거했는데 거기에 들려 응원한 용기(?)를 보이기도 했죠.



그녀의 정책이 실현될지는 모르겠지만 정치 논쟁의 지평과 방향을 새롭게하는데는 큰 구실을 하리라 예상됩니다. 아직 29세의 젊은 정치 초보. 그 앞날을 주목해봐야 하겠습니다.   


Thursday, December 13, 2018

[세상읽기]선거법 개정 걸음마도 못 뗀다면

경향신문 (2018.12.13)


“국정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을 단행해 나갈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를 정열적으로 추구 … 국가사회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하려는 개혁의 의지를 … 모아가야 하겠습니다.”


어제오늘 누군가가 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말들이죠. 앞은 1972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가 유신을 강조한 대목이고 뒤는 전두환의 취임사 한 구절입니다. 2012년 대선후보로, 촛불대통령으로 문재인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개혁은 늘 되풀이되는 화두입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만큼 갈 길이 멀다는 현실의 방증일 테죠. 그 까닭은 개혁결과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의 부재에 있습니다. 정치개혁은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일 수는 없죠.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면 깜깜이 예산 심사를 통해 자기 뱃속을 채우고 공공이익은 가볍게 토스해 버리는 추태가 사라질까요? 치열한 정쟁, 끝없는 거짓말, 부끄럼 없는 부패가 끝날까요? 정치 선진국이라고 생각되는 서구를 봐도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미국 공화당은 총기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총을 보급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등 뻔뻔한 거짓말로 정쟁을 부추깁니다. 영국 보수당은 브렉시트가 쉽고 긍정적 변화를 줄 것이란 사탕발림으로 국민을 속였죠. 인종혐오로 권력을 잡은 정당이 유럽에 한둘이 아닙니다.


정치개혁은 막연히 생각하듯 반듯하고 온전한 정치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염치없고 강도 같은 정치인이 거들먹거리는 꼴은 뉴스에서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정치개혁은 더 멀고 깊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20세기 한국 정치는 배척을 기반으로 했죠. 남과 북은 전쟁을 벌였고 영남 정권은 호남을 배척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짓눌렀고 대기업은 동네가게마저 거덜 냈습니다. 남자는 여자 위에, 이성애자는 동성애자 위에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찍어누르며 달려온 사회는 지옥철, 입시지옥, 헬조선으로 조롱당하는 지옥이 됐죠. 올라선 자는 더는 올라가기 힘들고 깔린 이도 힘들어 무너지는 아비규환 형국입니다. 다 같이 망하지 않으려면 새 길이 필요합니다. 정치개혁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21세기 한국 정치는 포용을 지향해야 합니다. 포용은 통합이 아닙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남자와 여자가 통합될 수 없습니다. 유치원 원장과 학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합이란 말은 애초에 억지 환상일 뿐이죠. 하지만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있습니다. 조금은 참아주고 조금씩 양보할 수는 있죠. 그러나 정치적 포용은 일방적 선의나 영웅에 기대서는 안됩니다. 힘과 권력을 나눠 가졌을 때,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야 가능합니다. 정치개혁은 힘과 권력을 나누어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정치적 포용이 가능케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선거법 개정은 그 시작입니다. 현 제도에서는 선거구에 1등한 후보만 승자가 됩니다. 지난 총선 성동 을구에서 새누리당 후보는 불과 38% 득표율로 2등(36%), 3등(24%)을 물리치고 당선됐습니다. 사실 6할이 넘는 유권자가 반대하는 이가 당선된 겁니다. 6할의 표가 사표가 된 셈이죠. 이런 제도 덕분에 새누리당은 33.5%의 전국 득표율로 40.7%의 의석을, 더불어민주당은 25.5%의 득표율로 41%의 의석을 가져갔습니다. 두 거대정당이 전체 표의 56%로 82%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공정하지도, 민의를 반영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민의를 반영하려면 이 지역구에 다섯 석을 배정해서 새누리당 두 석(전체 의석수의 40%), 민주당도 두 석(40%), 국민의당에 한 석(20%)을 주는 게 맞습니다. 그래야 공정하고, 유권자도 작은 정당에 사표 걱정 없이 표를 던질 수 있습니다. 이런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작은 정당이 생기고 커갈 수 있죠. 그래야 배척당했던 이들이 힘을 키우고 당당하게 포용의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정당이 이미 공감을 표시한 사안입니다. 이마저도 개혁의 걸음을 못 뗀다면 정치지도자로서 내가 뭘 하고 있나 물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궁색한 변명일 뿐임은 본인이 잘 알 테죠.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일갈이 저 멀리 맴도는 차가운 계절입니다.

Tuesday, May 1, 2018

[세상읽기]제1 야당의 ‘빨갱이 딱지’ 붙이기

경향신문(2018.04.05)

총기 살인은 미국 고질병입니다. 지난 2월 플로리다의 고등학교에서 한 범인이 쏜 총탄에 17명이 사망하며 충격을 줬지만, 그 충격이 무뎌지는 지경이죠. 네 명 이상이 희생되는 ‘총기 난사’가 거의 매일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총기 규제는 불가능한 게 현실입니다. 정치적으로 막강한 전국총기협회가 워싱턴 정가를 꽉 잡고 있는 게 주요 요인입니다. 총기 보유를 헌법이 보장하는 탓도 있죠. 총기에 익숙한 미국인의 정서도 한 요인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자면 미국의 탄생 그 자체입니다. 미국 팽창은 원주민에 대한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죠. 그 탓에 미국 전역에 퍼져있던 원주민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들의 피와 눈물이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죠. 살인적 폭력이 미국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승자인 백인들이 총을 사랑할 수밖에요. 총기 폭력은 미국의 원죄라 할 것입니다. 이 원죄를 씻지 않고서는 총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딱지 붙이기는 한국 고질병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의 추악하고 비열한 범죄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되 놀랍지는 않습니다. 이명박 시장 때 이미 많은 이가 그의 저열함을 눈치챘고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의심은 이미 ‘다스’를 향하고 있었죠. 그래도 우리는 이명박을 뽑았습니다. 입맛을 다시는 그의 등짝에 붙어있던 ‘현대건설 신화’라는 딱지와 ‘장로’라는 딱지 덕이었죠.


불행히도 한국 거리는 온통 딱지투성이입니다. 재벌을 옹호해도, 신자유주의를 추구해도 ‘진보’ 딱지는 민주당 이마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백인이면 ‘미국인’으로 떠받들고 흑인은 미국인이어도 ‘깜둥이’로 멸시하죠.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교포’이지만 한국계 중국인은 ‘조선족’입니다. 이 중 최고(?)의 딱지는 역시 ‘빨갱이’죠.


레드벨벳이 평양에서 공연한 2018년에도 제1야당은 사회주의 개헌저지 투쟁본부를 만들고 앉아있습니다. 누구는 윤상 평양공연 예술단 음악감독을 친북인사들과 엮는 웃지 못할 비난도 했죠. 보수정권 때에는 야당을 “종북세력의 숙주” “종북 연대”라면서 조롱했고 “북한 지령에 따른다” “차라리 월북하라”며 규탄했습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통합진보당을 빨갱이로 몰아 해산시키며 그 광기의 정점을 찍었죠.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빨갱이가 아니냐는 의심에 내내 시달려야 했습니다.


모든 딱지는 이성을 메마르게 합니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는 비극과 비극을 넘나들었죠. 빨갱이 선동에 열을 올리며 이명박, 박근혜는 정부를 노리개로 썼습니다. 그 와중에 세월호는 가라앉았죠. 신군부 독재 정부는 저항하는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 때리고, 감금하고, 고문했습니다. 안타깝게 죽어간 이는 박종철, 이한열만이 아니었죠. 그 독재 정권의 시작은 광주 학살이었습니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죠. 1975년 인혁당 사건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은 사형 확정 후 불과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이명박이 수상해도 그냥 찍었듯, 우리는 쉬쉬하며 넘어갔습니다. 나의 안위가 당장 급했지만 그렇게라도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조그마한 딱지라도 하나 있어야 했죠. 권력은 금방 눈치를 챘습니다. 딱지만 붙여놓으면 사람들은 딴 곳만 쳐다본다는 것을요. 그 시작은 1948년이었습니다.


그해 4월3일, 400여명의 좌익 무장봉기가 제주도를 흔들었고 미 군정과 한국 정부는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이름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습니다. 3만여명을 학살했고 마을도 불살라버렸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죠. 살아남은 이들도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을 감추고 침묵으로 버텼습니다. 이들의 피를 쏟고 태어난 대한민국 권력은 빨갱이 딱지에 중독됐죠. 그러니 제주의 피는 대한민국의 원죄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딴 곳만 쳐다보는 사이 뻔뻔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오늘까지 왔습니다. 제1야당 대표는 아직도 빨갱이 딱지 덧대기에 바쁩니다. 다행히 대통령이 사과했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죠. 원죄를 씻지 않고서 우리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명명백백히, 숨김없이 밝히는 일이 급합니다. 온전히 씻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더 급한 숙제입니다.

Tuesday, April 11, 2017

안철수의 새정치는 언제쯤?

우연히 보게된 옛 글. 안철수에 관한 글이 있었다. 딱 삼년 전에 썼는데 그 때 그 의문은 (놀랍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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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그 고집이 보여주는 새 정치의 폭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 훌륭합니다. 정치인들이 쉽게 약속을 어기는 마당에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 것, 새롭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요? 과연 그가 말한 그의 새 정치는 무엇일까요?
그가 내놓은 대선 공약집을 보면 국민을 섬기는 정부, 공공기관의 혁신 등에서 교육, 문화로 이어지는 그의 비젼은 매력적이지만 과연 이게 새 정치인가하는 의문을 없애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강령/정강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근사한 말은 있지만 그것뿐입니다.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곧 새로운 정치일까요?
참신한 아이디어는 새 정치에 필요한 부분이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이들의 말을 잠시 내려놓고 하는 ‘정치’를 보면 새 정치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입니다. 안철수가 한 정치라는 것은, 선거의 승리라는 아주 전형적인 목표를 위해 통합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으로 양당구조라는 전형적인 지형을 구축한 것이죠. 즉 안철수의 정치는 아주 구태의연하며 전형적이고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비극이 이런 실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비극은 안철수는 아직도 자신이 새 정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냥 막연히나마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죠. 더 큰 비극은 정치인들이 짜놓은 그 좁디좁은 새 정치의 틀에 갇혀 어떤 것이 새 정치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나래마저 꺾여버린 우리의 처지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새 정치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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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새로운 정당을 꾸렸다. 양당 구조를 깨는 과감한 선택이었고 성공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는 지역구도에 기댄 선거였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걸 새정치라고 말할 수는 없을테고...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만 봐도 새정치를 구현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긴 이미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나만 궁금해하고 있나보다. 

Wednesday, March 1, 2017

[세상읽기]경험을 나누는 것이 민주체제


기록적 한파의 경험과 지구온난화 간의 괴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경험이 중요한 자산임은 상식입니다. 취업 공고엔 경험자 우대라는 글귀가 자주 등장하고 역사가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이유입니다. 논쟁에서도 경험을 앞세운 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내가 직접 겪었다고 하면 주장에 힘이 실리게 마련이죠. 그래서 논쟁이 치열할수록, 경험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이런 화법을 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정치인 중에도 꼰대가 많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표적인 경우죠. 2016년 선거전 내내 비즈니스 경험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자신의 엄청난 부는 곧 지도자가 지녀야 할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떠들어댔죠. 비난과 반대도 컸지만 많은 이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명박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치인입니다. 대통령 시절 그 유명한 ‘해봐서 아는데’ 시리즈를 쏟아냈죠. 장사를 해봐서, 배를 만들어 봐서, 민주화운동 해봐서 등등 경험을 강조, 과장하면서 주장의 근거로 즐겨 삼았습니다.상사나 연장자 등 경험이 많다고 여기는, 또는 여겨지는 층이 상대적으로 경험이 얇거나 그렇게 여겨지는 이를 향해, 경험을 무기로 일방적 말을 쏟아내는 경우 전자를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들의 말투도 굉장히 비슷합니다. 나는 이렇게 잘하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의 말투가 그 전형이죠. 나는 생전 그런 실수가 없었는데 넌 매일 실수냐. 나는 더한 일도 참았는데 넌 왜 그것도 못 참냐. 내가 학생 때는 패기가 넘쳤는데 너희는 왜 열정도 없냐. 즉 꼰대는 경험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강조돼 의미 있는 대화나 검증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겠습니다.

경험이 소중한 것은 맞지만 큰 함정도 있습니다. 경험은 기억이 되고 자아의 일부가 되는 까닭에 미화되기 쉽죠. 실수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는 묻히거나 심지어 잊히기도 합니다. 트럼프의 경우 도산과 빚으로 고생했지만, 선거전 동안 이런 실패에 관해서 일언반구도 없죠. 또 한편으로 경험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에 편협한, 또는 그릇된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눈보라의 경험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의심은 좋은 예입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쳐서 집이 완전히 묻히고 전기가 일주일 끊기는 경험을 했다 해도 이는 개인의 지엽적 경험일 뿐이죠. 하지만 이런 경험을 지구온난화 현상의 방증을 찾은 듯 으스대는 사람도 미국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경험을 맹신하며 편협한 시각을 정치세력화한 이들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어버이연합 회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6·25전쟁의 경험, 전후 불안정한 시대를 산 경험이 정치적 열정의 근원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빨갱이’들에게 당했다는 기억은 빨갱이가 사라진 시대에서 빨갱이를 계속 찾게 하였을 겁니다. 그러니 그 빨갱이를 보지 못하는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가슴 시릴 만큼 아프게” 부모를 총탄에 잃은 박근혜는 자신의 불안감을 바탕으로 “국민을 각종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겠다며 사드를 밀어붙였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의 권한을 “선생님”에게 던져주고서 “컨펌”을 기다리는 것마저 정당화했습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경험했다는 확신은 검증을 힘들게 해 위험합니다. 억지와 꼰대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각종 오류에 취약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경험을 무작정 버릴 수는 없죠.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을 모으는 지혜입니다. 어제 눈 폭탄을 맞았지만 겨울 전체를 보면 역사적으로 더운 겨울이었던 것, 이제는 저성장 경제의 구조적 제한이 젊은이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 우리 집이 빨갱이 손에 몰락했지만 서북청년단의 총칼에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을 서로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어제와 오늘을 살피고 나와 너의 대화를 이어가야 합니다. 민주체제는 이를 정치적으로 구체화한 겁니다. 서로의 경험을 비교해 목소리를 모으는 것이 민주체제이죠. 한 사람의 직관과 경험에 기댄 권력은 독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혹시 독재에 익숙해지지 않았었나요. 박근혜를 파면하며 느슨해진 경계의 줄을 바꾸어 매야겠습니다.

Friday, January 27, 2017

[세상읽기]트럼프 시대와 남북 평화

경향신문 2017.01.2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훨씬 더 요란했습니다. 미국 전역(토요일 워싱턴DC에서만 50만명)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반트럼프 시위가 퍼져나갔고 최저의 지지율(37%)로 취임하는 기록도 갖게 됐죠. 트럼프는 캠페인 내내 여성,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조롱했고 인종차별주의 언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는 무역 정책이 가장 걱정스러운 주제인 듯합니다. 보호무역을 공언했기 때문이죠. 높은 관세로 국내 산업과 노동자들을 보호하겠다고 큰소리도 쳐왔습니다. 실제로 첫 업무날인 지난 23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명령했습니다. 기존 국제 무역질서를 흔들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역 의존이 심각한 한국으로서는 큰일이죠. 하지만 이것이 발등의 불이라면 머리에 붙은 불길도 있습니다. 트럼프의 대중국 적개심이 그것입니다.

트럼프는 지구온난화를 중국의 사기라고 말해서 비웃음을 샀지만 여기서 그의 중국관이 비쳤죠. 선거전 내내 중국 환율정책을 걸고넘어지며 무역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바로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1979년 미·중 외교 정상화 이후 처음 있던 일이죠. 미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해왔고, 이는 대만은 반란 상태에 있는 중국 영토라는 중국의 시각을 수용해왔던 겁니다. 그러니 대만 총통과의 전화 통화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기였었죠. 게다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무역 불공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하나의 중국 정책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경고도 보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이 걱정스러운 것은 중·미 간 긴장이 이미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중국의 힘은 나날이 커져 왔습니다. 경제적 성장은 군사적 팽창으로 이어졌고, 그 결실 중 하나는 항공모함 랴오닝입니다. 이달 초 랴오닝 함대는 태평양에 진출해 대만해협을 통과했죠. 대만과 미국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외교력 성장도 눈부십니다. 특히 필리핀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남중국해 영토분쟁 상대국들의 연합전선을 무력화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가만히 있을 미국이 아닙니다. 작년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12월 화답으로 아베 신조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했습니다. 이들의 외교적 춤사위는 미·일 군사 협력 강화라는 장단에 맞춘 겁니다. 일본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에 조응하고 군사동맹을 강화했습니다. 자위대는 항공모함급 헬기 호위함, 이지스함, F-15 등 최첨단 무기를 갖추었고 일본 방위비 지출은 세계 6위로 성장했죠. 게다가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법 개정을 통해 아프리카에 파견된 일본 자위대가 적극적으로 무기를 사용해 전투를 벌일 수 있게 했습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의 긴장이 높아만 가리라는 전망은 각국의 국내 사정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아베와 우파는 숙원이던 정상국가화의 꿈이 중국, 북한과의 대립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직감했죠. 일본의 군사 대국화는 저물어 가는 미국으로서는 환영할 일입니다. 서로의 국익이 맞아 떨어지죠. 중국도 물러설 자리는 넓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로 빠르게 대체돼왔습니다. 특히 시진핑 정권에서 그 경향은 더 짙어졌습니다. 중국의 부활은 곧 외세의 배척과 이어져 있죠. 미국의 간섭과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좌시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 시점에 하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겁니다.

양측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멀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가까이는 한국전쟁, 군사독재까지 고래 싸움에 배와 등이 다 터져본 한국으로서는 심각한 고민이 절실한 때입니다. 우리가 고래가 될 수는 없죠. 하지만 새우로 남을 수도 없습니다. 어느 쪽에도 빌미를 주지 않을 정치력이 필요합니다. 한편에서는 사드도 재고하고 주한미군도 위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발 위협도 누그러뜨려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모두에게 간섭할 이유를 주지 않을 수 있죠. 그 시작은 남북 간 평화이고 그것만이 우리에게 남은 절박한 길입니다.

곧 다가올 대선, 정치인들의 입을 지켜봐야겠습니다.

Monday, November 14, 2016

[왜냐면] 또 다른 박근혜를 막아야 합니다

한겨레 (2016.11.14)

드디어 사임했습니다. 최측근 권력 남용이 문제였죠. 여기에 뇌물 등 여러 혐의가 겹치며 여론이 악화됐고 더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2013년 6월 체코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페트르 네차스 총리 최측근이자 연인이었던 나기오바가 이혼 중이던 총리 부인을 감시하기 위해 공권력을 쓴 것이 큰 쟁점이었습니다. 뇌물 등 비리도 있었지만, 권력을 사유화했던 나기오바의 전횡은 공분을 샀죠.

체코 국민의 분노가 이해는 가지만 어디 우리 분노만 할까요. 그 분노는 광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두 주말 연속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잠을 자는 공주처럼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거국중립을 미끼로 시간을 끌고 있죠. 민주당 지도부도 하야, 탄핵, 거국내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공권력 개입으로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했고 오만으로 남북관계의 파탄을 낳았습니다. 무능으로 국정운영은 무너졌고 무관심은 목숨을 앗아가기까지 했죠. 취업률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경제성장률도 크게 둔화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크게 위축됐고 사상의 자유마저 침해를 받았습니다. 관제 데모가 되살아났고 공작 정치도 판을 쳤죠. 이제 국민이 준 권력을 남에게 던져주고 놀이하듯 사리사욕을 채웠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헌법을 통째로 뒤흔든 그런 대통령을 몰아내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게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지만 몇몇 검사의 판단과 의지에만 기대야 하는 이 현실이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힘없는 이들은 죽이고 재벌들은 살렸지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대통령의 미소가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임에도 체코 총리가 사임한 데에는 정치체제가 이를 강제했기 때문입니다. 체코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비례선거제도와 의원내각제를 바탕으로 민주체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권자는 의회선거만 하고 여기서 과반을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정부를 꾸립니다. 비례선거 덕에 한 정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정당 연합이 주로 그 일을 하죠. 이렇게 꾸려진 정부의 수반, 즉 총리는 그 과반의 의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반의 지지를 잃으면 정부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니까요.

권력을 잃을 가능성이 제도화돼 있으니 항상 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의 마음입니다. 연합 내 소수정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코에서처럼 말이죠. 체코 민심이 싸늘해지자 연합정부를 이루던 다른 정당들로서는 불안했습니다. 그런 총리를 감쌌다가는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참패할 것이 뻔했고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차스 총리가 인격이 더 훌륭해서 자리에 물러난 것이 아닙니다. 정치체제가 정부 수반을 정치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스위치를 국민에게 줬기 때문이죠.

박근혜는 곧 물러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박근혜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를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부를 해고할 힘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의 헌법으로는 그럴 힘이 없죠. 개헌해야 합니다. 그 개헌은 의원내각제를 향해야 합니다.

의원내각제가 익숙지 않은 듯하지만 이미 시행했었습니다. 바로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의 기운으로 말이죠. 일인독재를 막기 위해 시작한 의원내각제 민주체제는 일인독재를 꿈꾸던 박정희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박근혜는 예를 찾아보기 힘든 유령독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덕택에 그 아비가 파괴한 의회주의 전통을 되살릴 기회를 준 셈이죠. 국민의 정부 파면 권력을 되찾을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Saturday, February 13, 2016

[updated] 박근혜 대북조치 비판

북한이 4차핵실험(2016년 1월 6일)을 강행하고 곧이어 위성발사(2월 7일)도 성공적으로 마치자 박근혜 정부는 대북 초강경 조치(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협상; 개성공단 폐쇄)를 잇달아 내놓았다. 하지만 정작 북한에 미치는 영향은 미비할 전망이다.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없나?




  •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는? 
    • THAAD·사드는 대기권 안밖에서 상대방의 미사일을 요격해서 인구밀집 지역이나 주요 시설을 포괄적으로 보호하는 시설을 통칭한다.   
  • 왜? 
  • 효과 
    • 대북억지력이 전혀 없다는 것은 큰 문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면 미사일을 쏠 일이 없다. 쏴도 단거리 미사일이고, 가장 큰 위협을 휴전선 이북의 포대이다. 그런데 사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미군이 버젓이 중무장하고 기다리고 있는 남한을 북한이 선재공격할 일도 없다.   
    • 그럴 일도 없지만 북한이 쏜다 치자. 안 쏜다니까. 북한 미사일을 떨어뜨릴 수는 있기나 할까? 미국 전문가도 북한 미사일에 무용지물이라고 단정한다 [한겨레, 북 로켓추진체 폭파 기술에 사드 무용지물]. 추진체가 이번 실험때 처럼 자폭하면 그 파편들과 탄두가 구분이 불가능. 여러 문제를 뻔히 아는 미국장군들이 사드를 요구하는것 자체가 충격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 문제 
  • 얼떨결에 권력을 얻은후 한편으로는 "아, 몰라, 몰라"를 외치며 내정을 내버리고 또한편으론 사대주의를 철저히 따랐던 인조. 덕택에 호란을 두번이나 겪어야했던 조선백성. 인조와 너무나 비슷한 박근혜에게 한명기의 병자호란을 읽어보길 권한다.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 51회 - 한명기: '병자호란'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 집에 책이 없다던데?

  • 개성공단 
    • 2004년 문을 연 공단에서는 약 5만명의 북한 노동자가 한국 공장에서 근무를 하며 신발, 속옷 등 소비재를 주로 생산해왔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2월 10일 아무 경고도 없이 가동을 중단했고, 북한은 이에 맞서 군사지역으로 선포, 군대가 공단을 접수해버렸다. 
  • 왜 닫았나? 
    • 북한 핵실험, 위성발사 등에 대응을 모색하고 있는 서방은 이미 경제봉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별다른 대응을 못찾고 있는 상황.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 중국-북한 무역과 개성공단. 전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니 후자를 통해 북한을 벌주고자하는 기류가 있었다. 
    • 이런 국제정세에 반응한 것일 수 있다.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고 한창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다. 특히나 공화당 쪽에서는 북한, 중국 등에 맞서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 선두주자 트럼프는 김정은을 사라지게 만들겠다는 헛소리까지 하고 있으니 [Daily Mail, Donald Trump vows to make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disappear' and says the 'bad dude' dictator will face a fate worse than assassination], 온건책을 내면 매국노로 몰리는 분위기다.  
    • 하지만 이런 국제 정세보다는 국내정치를 고려한 측면이 강할 듯 하다. 우선 총선이 두달 앞으로 다가 왔으니 보수층을 결집시켜야 하고 여기엔 북풍만한게 없다. 문제를 할 수 있는 게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 확성기도 있잖아. 하나 남은 고리가 개성공단이였고 결국 마지막 카드를 써버린 것. 
  • 효과
    • 대북 강경기조를 유지한다는 면에서는 일관성이 있다. 미국으로서야 이란과의 핵협상도 끝나고 쿠바와의 외교관계도 재개된 마당에 이제 남은 골치덩어리는 북한과 이슬람세력이다. 미국의회도 최대의 경제제재조치를 호기롭게 통과시켰지만 그 효과가 신통치 않을 것임은 자신들도 안다. 뻘춤하던 차에  남한의 조처가 반가울 수 밖에. 당장 케리 국무장관이 환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연합뉴스, 한미 외교장관 대북압박 공조가속…케리 "개성공단 중단 지지"]  
    • 하지만 북한이 타격을 입을까? 온갖 제재조치 속에서 수십년간을 버틴 북한정권이 개성공단 닫는다고 충격에 빠지지는 않을 듯 하다. 한 리포트를 보면 "지난 10년간 남한에게는 32.6억 달러의 내수 진작 효과를, 북한에게는 3.8억 달러의 외화 수입을 가져다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대경제연구원, 개성공단 가동 10년 평과와 발전 방안]. 결고 적은 돈은 아니지만 없어도 핵계발을 못하거나, 정권이 붕괴되고 막 그런 돈은 아니다. 북한의 2014년 무역규모는 76억 달러. 대부분이 중국과의 무역이니 [코트라, 보도자료] 이를 막지 않는 경제 제재는 무의미하다. 
    • 게다가 북한 근로자에게 지불되는 대부분의 돈이 공단내 마트에서 소모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마트의 주인은 호주동포로 박근혜 대통령의 주장처럼 노동당 자금으로 흘러갔다는 말은 억측에 불과하다. 국회연설에서 나온 이 주장이 억측임은 증거가 없다고 고백한 통일부장관 입에서 확인할 수 있다 [SBS, 비디오머그] 그러니까 개성공단 자금이 미사일 개발에…어떻게 된거죠?].   
 

  • 문제 
  • 효과도 없는 정책을 심각한 논의도 없이 정치적 계산에서 즉흥적으로 해치운 듯하다. 물론 보수층을 집결시키고 이번 조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싸잡아서 종북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긴 하다. 선거의 여왕답다. 
  • 한가지 걱정스런 것은 이런 일련의 경제제재 조치가 이어지고 북한이 강경대응으로 이어가면 긴장이 높하지고 미국의 무력조치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미 1994년에도 폭격 코앞까지 간 경험이 있고, 2003년 이라크 침략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피혜는 고스란히 남과 북의 인민의 몫인데, 지도자들은 상관치 않는다.  

Friday, December 18, 2015

정치인의 거짓말

뉴욕타임즈에서 아주 재밌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All Politicians Lie. Some Lie More Than Others. - The New York Times

정치인들이 거짓말 하는 것은 뭐 새삼스러울 것이 없죠. 하지만 여기서는 이들의 거짓말을 정도를 비교해 놓은 것이죠. 이렇게 해놓으니 재밌는 결과가 나왔네요. 밑의 표는 2007년 이후 대선 후보들의 거짓/진실 비교를 보표로 나타낸 것입니다.



일단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맨 위의 두 정치인들 이름입니다. 현재 미국 공화당 대선 유력 주자인 벤 칼슨과 도날드 트럼프는 거의 입만 열면 거짓말(각각 84%; 76%)을 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 중 진실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각각 4%, 7%). 인터뷰 어디를 틀어보아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꽉차 있는 사람들이니 놀랄 것이 하나도 없죠. 뒤를 이어 테드 크루즈, 딕 체니 등 공화당 후보들이 그 뒤를 쭉 잇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민주당 후보들의 스코어입니다. 꽤 진실에 충실에 보이려는 노력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한참 밑으로 가야 조셉 바이든 현부통령이 나오면서 민주당 사람들 이름이 보이니까요. 클린턴 부부는 반은 대체로 진실을 이야기한 것으로 평가받네요. 빌 클린턴은 거짓말 비율이 24%로 이들 중 가장 진솔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를 가지고 민주당 정치인이 진솔하고 공화당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일반화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즘 공화당의 토론을 보고 있으면 정말 구리다 하는 느낌이 나는데 그 느낌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는 증거는 되겠죠.

다만 트럼프처럼 뻔히 거짓말을 하고, 말도 안되는 억지에, 인종차별 발언을 뻔뻔히 해도 그 지지율이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겠죠.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미국 중하층 백인 남성의 분노일 것입니다. 유색인종이 싫은데 흑인 대통령이 나오고, 테러에 화나는데 정부는 당장 쳐들어 갈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주머니 사정은 좋지않은데 정부는 돈을 펑펑 쓰는 것 같고. 말은 못하고 끙끙 속으로 앓고 있다가 트럼프처럼 부자에 똑똑한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니 신이 날 수 밖에요.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도 없죠. 일단 속이 시원하니까요.

정치지도자가 속이 시원한 말을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 집단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공격함으로써 통쾌함을 준다면 이는 한 나라를 이끌 정치지도자가 할 소리는 아니죠. 사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당장 듣기는 좋을지 몰라도, 그런 정치인을 경계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입니다.



Monday, June 29, 2015

[시론]‘삼권분립’ 무색한 대한민국

경향신문 2015-06-29

클린턴 대통령 37회, 부시 대통령 10회, 오바마 대통령 3회. 이건 다름 아닌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입니다. 트루먼 대통령 때부터 치면 총 794회, 미국 건국부터 치면 무려 2564회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의회에서 만들어지지만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줌으로써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에 긴장과 균형을 제도화한 것은 삼권분립이 기본인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합니다. 어느 한쪽이 비대한 권력을 갖게 될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의회가 뒤집을 수 있는 것 또한 비슷합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헌법에 쓰여 있는 것도 두 나라가 같죠. 하지만 거의 같은 제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또한 미국과 한국인 듯합니다.

애초에 긴장과 균형을 권력자 사이에 불어넣고자 했던 것이니만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대통령과 의회 사이를 껄끄럽게 하죠.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3월 말 공화당 주도의 의회가 보낸 노동조합 선거 규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정적인 공화당의 베이너 국회의장은 이에 대해 경제성장은 뒷전이고 정치적이기만 한 대통령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며 독설을 뿜었습니다.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은 2008년 거부권을 행사했던 법안이 의회에서 3분의 2가 훨씬 넘는 표를 받아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죠. 부시의 공화당 의원들도 거든 결과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기쁠 리야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의회가 합의를 해서 법안을 처리하는 것은 민주체제의 꽃이라 할 수 있고 칭찬받을 일입니다. 그 법안에 문제가 있다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죠. 그럼 의회로서는 재심을 하거나 말거나 하면 됩니다. 이번 국회법 개정안 처리도 그럴 수 있었죠. 그래야 했습니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말이죠.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의회의 고유 권한인 입법행위를 ‘배신’이라며 치를 떨었고 야당과의 합의를 이끈 유승민 원내대표를 ‘심판’하자며 정치적 협박을 했죠. 청와대의 진노는 새누리당의


‘송구’와 ‘죄송’으로 이어졌고, 유승민 원내대표의 퇴진을 둘러싼 여진은 정당을 흔들었습니다. 정당한 입법활동에 대통령이 진노하고 국회의원을 공공연하게 뒤흔드는 일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면 상상도 못할 것이죠.

어이없는 사태이지만 한국의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준다는 데서 그 위로를 찾아볼까 합니다. 이번 거부권 행사는 역대 73번째로서 비슷한 기간 미국의 794회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왜일까요? 이는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가 주종의 관계이다시피 했던 불행한 현대사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을 시작으로 박정희와 군대 후배들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김영삼, 김대중의 시대에도 대통령은 곧 주요 정당의 절대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행정부의 수반이자 입법부의 지도자였던 것이죠. 덕택에 이들은 제왕적 대통령의 지위를 누렸고 삼권분립이 무색해지는 전통이 이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이번 사태는 민주제도라도 이를 운영하는 자가 작심을 하고 달려들면 충분히 비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이 가고 누가 오더라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제도의 보완이 시급한 숙제라고 하겠습니다. 소수의, 다양한 목소리가 의회에 넘쳐나고 합의가 일상적일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작심하고 달려드는 권력자들을 막을 수 있는 길, 그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민중의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제도를 당장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Sunday, July 20, 2014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


  •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에 관한 간단한 뉴욕타임즈의 Daily Update
  • The Guardian의 가자 지구 관련 기사 모음


Friday, July 11, 2014

[시론]‘인조의 실수’ 21세기엔 반복 말아야


경향신문 2014-07-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112101465&code=990303

2005년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동북아 균형자론’을 소개했습니다.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동북아시아에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자는 구상이었죠. 하지만 미군의 보호와 안보를 동일시하던 이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렸고, 보수 신문들은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은 이를 “과대망상”이자 갈 데까지 간 “반미(反美) 바람”이라고 평했습니다. 현실을 무시한 구상이고 결국 한국은 외교무대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게 주장의 골자였습니다. 결국 이 구상은 구체적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잊혀졌죠. 하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균형자의 역할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요.

2005년만 해도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전 세계에 최첨단 전쟁수행능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특히 중국이 가진 좌절은 매우 큰 것이었고, 중국 군대의 폭발적 현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4년의 중국은 항공모함을 갖고 스텔스 전투기를 판매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게다가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를 거치며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중국이 세계무대에서 미국과 패권을 다투게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패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베 정권의 일본 군국주의 부활 신호탄을 미국이 환영하는 것과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이 북한을 제쳐두고 한국을 먼저 방문해 임진왜란을 들먹이며 두 나라의 오랜 연대와 대일 공조를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죠. 불쑥 성장한 중국과 이를 경계하는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딱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 중 어느 쪽도 우리는 멀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미래를 쥐고 있는 나라니까요. 두 나라 사이에 패권다툼이 격해질수록 우리의 입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좋건 싫건 균형자의 역할을 해야 하죠. 그것도 아주 잘해야 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의 폐위를 알리는 인목대비의 교서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논하며 후에 청이 되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균형자의 노릇을 한 것을 듭니다. “광해는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로 만들었다.” 이 숭명반청의 이데올로기에 갇혀버린 인조의 정권은 강해져만 가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적극적인 실리외교를 통해 균형자의 노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오랑캐를 운운하며 후금의 신경을 되풀이해서 건드리고, 결국 청황제의 조선 정벌을 초래합니다.

인조 정권은 기존의 세력인 명과 성장하는 청 사이에서 양쪽과의 거리를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하나를 제압할 수 없도록 적당히 균형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양쪽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자주국방의 힘을 키워 두 나라 모두 조선을 내버려 두도록 해야 했죠. 균형자의 노릇을 잘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딱 지금의 한국의 사정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국운이 흔들리고 있어도 인조는 개혁은 고사하고 반정공신의 입김에 휘둘리며 실책에 실책을 거듭했습니다. 군대는 안보를 포기하고 정권 지키기에 바빴고 일반 백성은 온갖 의무와 세금에 절규했습니다. 인조는 “내가 용렬하여 시비를 분별하지 못했고, 게으른 데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며 사과만 되풀이했지 정작 절실했던 행동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했습니다. 이 또한 지금의 한국 사정과 비슷해 보입니다.

정작 절박한 사명은 못 본 채 정권 유지에 모든 것을 희생했던 인조의 실수, 21세기에 와서도 되풀이하면 안될 것입니다

Tuesday, July 1, 2014

‘예의염치’ 없는 한국 정치

인사이트 2014/07/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4070&Code1=001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화교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건물 정면에 크게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교훈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의는 예절과 의리를 말하는 것이고 염치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갖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일컷는 것이죠.

이 예의염치는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 난징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국민당 정부가 사용한 국가 통합의 유교이념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실패한 정부의 이념의 핵심이지만 살아남아 화교들 사이에서 그 정신이, 멀리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인상적인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세고 돈이 많아도 신세를 질 수 밖에 없고,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이라도 사회에 공헌을 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게 하니 미안한 것이죠. 미안한 만큼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염치가 있어야 상대방도 귀찮더라도 도와줄 공산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당장 주변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불쾌해진 사람들은 도움에 인색하게 되기 쉽습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늘수록 사회전체가 각박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많은 실정을 되풀이 했습니다. 특히 세월호 정국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 둘이 아니죠. 그 걱정거리 중 하나는 이 정부는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창극 총리 지명자는 교회 등 과거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없다”는 등 일반적 역사적 인식에 반하는 발언으로 국가적 공분을 일으켰죠. 하지만 본인은 아무 문제가 될 태도로 두 주를 버텼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노와 실망은 더욱 커지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사퇴를 하는 마당에도 “언론이 전체의미 왜곡·훼손” 주장하고 “여론은 변하기 쉽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한다며 여론에 굴해야하는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가문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바로 세월호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를 한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킨 것이죠.

새로 구성했다는 내각을 들여다보면 임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논문표절, 병역, 재산 형성, 과거행적 등 전형적인 지도층의 문제를 하나 둘씩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정홍원을 유임시킴으로써 세월호에 책임지는 지도자는 결국 전무한 셈이 되어버렸죠.

이를 보는 국민들은 얼굴이 화끈 거릴 노릇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야 답답하지만 사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간 대국민 사과를 미루어온 박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해하는 국민들이 더 답답할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는지, 왜 자기를 비난하는지 이해가 안 가겠죠. 이해가 안 가니 답답하고, 미안해 할 일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염치가 없는 것이죠.

하긴 평생을 남에게 군림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겨온 이들이 남에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많은 신세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총리, 장관의 권력은 무시무시합니다. 공권력을 주무르고 법과 정의를 재단합니다. 지금처럼 한 정당이 대통령직과 국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을 때는 그 정당의 권력은 정점에 달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릅니다. 안정과 안전을 보호할 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평안을 지켜야합니다.

향응에 취할 때가 아니라 막중한 책임에 잠이 잘 안오는 게 정상일테죠. 게다가 이러한 권력은 국민들의 양해를 통해 잠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민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죠. 권력이 센 만큼 더 몸을 숙이고 겸손해야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담화만 거듭하고 이마저 질문 하나 받지 않는 이 정권은 기본적인 민주적 의무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듯해 안타깝습니다.

한국처럼 소수자들이 살기 힘든 땅에서 살아야 했던 화교들로서는 염치라는 덕목이 더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선 한국인들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앞으로의 처신에도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소수, 약자들에게만 염치가 소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강위의 작은 쪽배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유유히 떠있게 하는 것도 강물이고 배를 뒤집는 것도 강물인 것처럼, 군림하게 하는 것도 국민이고 갈아치우는 것도 국민임을 알아야 하겠죠.

그러니 그 쪽배들은 염치라도 있어야 될 듯합니다.

Monday, June 16, 2014

[시론] 월드컵 세월호

한겨레 2014.06.1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2593.html


2002년 6월13일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 학생은 친구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모여 의정부로 놀러 가기로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주한미군 보병 2사단 대대 장갑차에 깔려 처참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쳤으니까요. 흔히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알려진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조별 예선이 끝나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11~12일 A조와 B조 경기가 있었고, 사고 당일엔 C조의 두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날 두 학생이 사고를 당한 것은 오전 10시30분께였고 오후 2시 반에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다음날인 14일에는 미 보병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는 등 사고 수습에 나섰고, 인천과 대전에서는 D조 마지막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천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기록하며 포르투갈을 이겨 온 나라가 환호한 것이 이날이었습니다. 당시 여론은 온통 월드컵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한겨레> 15일치는 1면에 “꿈의 16강 마침내 해냈다”라고 보도하는 등 온통 월드컵 기사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반면, 두 학생 사건에 관해 한겨레는 14일치 18면에 “미군차량 치여 여중생 2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간단하게 다뤘습니다.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언론에서 거의 사라졌던 이 사건은 6월 말이나 돼서야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7월31일, 49재를 기폭제로 시위는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무죄 판결 이후 대규모 촛불시위로 이어졌고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녀의 죽음은 언제나 슬픈 일이지만 효순·미선 학생의 경우는 특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죽음이 외국 군대의 행위에 의한 것이었으니까요. 외국군 주둔에 익숙한 우리지만 사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첫째로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안보를 다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헌법적 문제이죠. 나당 연합군의 끝을 보아도 그렇고, 청나라에 기댄 조선의 신세를 봐도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외국 군대의 주둔은 늘 이들에 대한 제도적 특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외국군 범죄가 본국의 법정에서 다뤄지는 일이 극히 드문 것은 한국만의 예가 아닙니다. 요컨대 이 사건은 나라가 시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대응도 할 수 없는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렇지만 효순·미선 학생의 죽음은 처음에 외면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월드컵이 거기에 큰 몫을 했죠. 사건 발생 뒤 두 주가 지나 새삼 작은 관심이라도 끌기 시작한 것은 독일-브라질 결승전(6월30일)과 함께 월드컵이 끝난 것과 과연 무관했을까요? 많은 이들이 뒤늦게나마 이를 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월드컵의 열기에 취해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죠.

이제 2014년 월드컵이 시작됐습니다. 홍명보호에 눈길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치맥과 환호성, 그리고 한탄이 거리에 가득하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 사태의 전모를 파헤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도 10여명이 실종 상태입니다. 선원들에 대한 재판은 이제 시작이고 아직도 유병언 일가는 오리무중입니다. 정부의 대처는 사건 때만큼이나 늦고 비효율적이며, 정부나 국회는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태가 한국의 민낯을 까발렸다고 탄식한 지 두 달이 됐지만 한국은 세월호 이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입니다.

월드컵의 열기에 취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자던 2002년의 다짐, 잊지 않는 2014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Monday, June 2, 2014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 남태현
경향신문 2014-06-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12030465&code=990304

미국은 풍자의 천국입니다. TV에서 코미디언들이 정치인들을 희화화하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입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죠. 인터넷에서 오바마의 사진을 찾아보면 온갖 희화와 조롱이 난무합니다. 심한 것은 화제가 되기도 하고 오바마 또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1년에 한 번 백악관이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모아 만찬을 여는 자리에서 코미디언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것이 백악관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런 풍자를 거의 20년을 보아서 이제는 일상적으로 느끼지만 처음에는 나라의 지도자를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걱정 반, 부러움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님인데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처음에 가졌던 그런 생각은 애초에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은 나라님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안 볼 때는 나라님 욕도 한다죠. 거꾸로 보면 볼 때는 하면 안된다는 소립니다. 이제는 그냥 하는 소리가 됐지만 옛날에는 정말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나라님을 바꾸는 공론만으로도 삼대가 멸하는 조선이었죠. 왕조시대엔 동서 어디나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멀리 아랍의 왕조국가들까지 갈 것도 없이 가까운 데 있는 태국만 가도 국왕을 욕하면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고 실제로 이 법으로 반정부 인사들이 처벌을 받기도 하죠.

이들 국가는 나라의 주권이 왕조의 정통성에 근거하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들입니다. 조선왕조는 말할 것도 없고, 헌법이 국민주권을 명시한 태국 같은 경우에도 정치문화가 왕조와 주권을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체제에서는 왕을 욕하고 풍자하는 것은 나라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처벌이 정당화되는 근거죠.

하지만 국가의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체제에서는 정부 지도자를 희화화하는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임받았기에, 다른 국민에 비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희화와 조롱에 너그러워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자리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그런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권력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화와 조롱에 발끈하는 대통령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첫째로 민주체제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라님이라도 됐거나, 나라님을 모시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면 자신 또는 그분에 대한 어떠한 희화나 조롱도 참을 수가 없을 수 있습니다. 나라님인데요. 대통령 개인에 대한 조롱이 아닌 나라 전체의 조롱인 셈이 되는 것이죠.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둘째로 이들은 국민의 조롱에 신경이 쓰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의 권력이 포스터나, 코미디, 농담 등으로 약화되었거나,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정당성에 자신이 없거나, 정당성이 약화되었다고 판단을 했을 수 있죠. 어찌되었건 그런 판단을 했다면 조롱이 실제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정당성이 더욱 약화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들로서는 그런 조롱을 막는 것이 심각한 정치적 사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주체제의 원칙에 충실하고,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으로써, 자신에 대한 희화나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대통령들이, 그런 대통령을 갖고 있는 국민들이 무척이나 부러운 요즘입니다.

Sunday, June 1, 2014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남태현
창비 2014년 04월 01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파헤치며 현 한국사회의 정치를 진단하는 책이다. 저자는 정치의 참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 즉 우리 안에 굳게 뿌리내린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직시해야 한다고 명쾌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믿고 있는 선거제도 자체가 민의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한계 안에서 진정한 변화는 ‘나는 투표했다’라는 자위를 넘어선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근래 한국정치에서 보인 ‘다른 정치’의 증후군들을 점검함으로써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영어계급사회> 남태현

오월의봄 2012년 02월 07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왜 한국인은 평생 영어를 공부해야만 하는가?
영어를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세계화’ ‘국가 경쟁력’의 허구를 밝히고 대안을 찾아본 책

흔히 세계화된 사회에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영어가 필수라고 말한다. 과연 이 이데올로기는 맞는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는 진짜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일 뿐이다. 우리는 미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고, 미국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왔을 뿐이다. 이토록 영어를 숭배하는 것도 미국화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미국은 이미 조각 난 하늘일 뿐이다.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진정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고 싶다면 영어도 일본어, 프랑스어, 러시아, 아랍어 등과 같이 하나의 외국어로 간주해야 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우선 대학입시에서 영어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를 다른 외국어와 동등하게 대우해 똑같은 점수를 책정해야 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원시험에서 영어를 필수과목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꼭 필요한 부서에서만 영어를 필수과목으로 하고 나머지는 영어를 아예 보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보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전 국민이 똑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계급 간의 격차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이와 더불어 경쟁만능주의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모순도 처방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6-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3345&Code1=001


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딸 고희경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리 남매를 버리고 돌보지 않은 내 아버지 고승덕은 서울시교육감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며칠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고 후보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고 앞으로 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고희경씨의 주장에 고승덕 후보도 할 말이 있을테죠.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주관적인 것이므로 양측의 주장을 들어보고 잘 판단을 할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딸이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고희경씨의 이름은 캔디 고로서 미국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생활을 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고씨의 글도 간결하고 명확한, 좋은 영어로 작성이 되었습니다. 고씨의 지적에 따르면 고후보는 가족을 돌보는데 일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금전적 도움은 고사하고 옆을 지켜주지도 않았고 연락조차 완전히 끊은 채, 사실상 두 자녀와 처를 완전히 내팽개친 것으로 보입니다. 고씨의 주장은 이러한 고 후보의 개인적 행위를 볼 때 다른 자리도 아닌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으로서 고후보는 적합지 않다는 것이죠.

이러한 비판은 고후보의 자질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단서의 일부이며 유권자로서 꼭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씨가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능했겠죠. 하지만 여러분 모두가 짐작하시듯, 그 가능성이라는 것은 사실 한여름 해운대에서 군고구마 찾는 것만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헛점이 너무나 많아 공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한국의 풍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본능적으로 나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연민의식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한국사회에 오래 뿌리를 내린 소위 유교적 전통에 따른 부모 공경의 의무감또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집단을 배신한 개인에 대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한국에선 중요한 것이죠. 이런 식의 공포는 사실 조폭들 뿐 아니라 조직을 중요시 하는 한국사회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선배를 무시한 후배, 고참을 깐 신참, 상사를 재낀 회사원들의 삶이 고달픈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조직의 화합을 해쳤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형태의 형벌을 받습니다. 더우기 형벌은 그 집단 내에서 그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죠. 덕택에 집단의 단결은 공고해 지지만 집단의 결함 또한 깊어지는 까닭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갖고 있지만 누구도 쉽게 던저버리지 못합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니까요. 게다가 적당히 굴러갈 때 떨어지는 떡고물 (연대감, 술자리, 자리, 이권 등) 또한 작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쩌다 한번씩 보는 영웅적 굴레 던저버리기에 환호하게 됩니다. 히딩크 감독의 서열무시에 우리는 찬사를 보냈고, 박칼린의 합리적 지도력에 감탄했습니다. 이들 모두 연줄, 서열 등을 무시한 채 개개인의 능력만을 보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그 집단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는데 새삼 놀랐던 것이죠.

이들의 리더십을 배우자는 열기는 뜨거웠지만 냄비처럼 식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집단에의 중독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오늘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집단의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요. 일의 능률과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되고 우정과 의리가 쌓이고 쌓여 우리는 세월호 참극을 맞았습니다. 끊임없는 향응과 접대로 쌓아온 집단의식은 그 어떤 규제와 법률, 양심도 무너뜨릴만큼 지독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한 정치의식 또한 마친가지입니다. 정치지도자의 공과는 상관없이 우리편만 찍어온 우리내의 정치는 이제 우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남을 욕할 일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집단의 중독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요?

우리가 절실한 것은 이 집단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대신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토론하고 고처가고, 심지어는 법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산은 산이라하고 물은 물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 이의 세월호 참사, 제 이의 삼풍 백화점 붕괴, 제 이의 성수대교 붕괴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고희경씨에게 힘든 결정을 한 것에 대한 감사와, 아버지가 없어 느꼈던 고통에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