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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15, 2015

알자지라 아메리카의 통진당 해산 관련 보도

알자지라 아메리카와 통진당 해산에 관해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그 기사가 나왔다.
다음은 기사에 실린 내 인터뷰 인용 부분.

“To me, the most dangerous and worrisome thing in [South] Korean democracy at this moment is that people have nowhere to turn. If you remove political parties, if you remove street protest, what is left?” said Taehyun Nam, a professor of political science at Salisbury University in Maryland whose research focuses on East Asian politics and protest movements.

한국의 민주체제가 휘청이고 있다. 휘청이고서 그만큼 더 성숙하면 다행이지만 휘청이면 쓰러질 수도 있다. 민주체제를 파괴하는 민주정부... 큰 숙제다.

기사전문은 아래 링크에.

"Court dissolution of left-wing party in South Korea raises alarm" January 15, 2015

Friday, December 26, 2014

삐라가 뿌려지는 한국

박근혜의 2002년 방북시 김정일과 찍은 사진과 발언을 담은 삐라가 홍대일대에 뿌려졌다. 삐라에서는 박근혜의 친북발언을 지적하면서 지금의 종북몰이를 꼬집었다. 경찰은 명예회손 등의 혐의가 적용되는지 검토하겠단다.
[속보]서울 홍대 앞서 박근혜 대통령 비난 전단 수백장 살포 - 경향신문 (2014-12-26 )

지금은 21세기다. 한국은 인터넷 최강국으로 꼽히는 나라이다. 그런 곳에서 80년대 유행했던 삐라가 뿌려지고 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은 이미 정부의 모니터링과 조작이 만연하게 되었고, 발언의 자유는 명예회손의 명분으로 심각한 회손이 된지 오래다. 인터넷 초기, 우리는 장미빛 희망으로 들떠있었다. 활발한 토론, 심지어 직접민주주의까지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박근혜의 공안정국의 현실은 그 꿈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가를 빠르게 보여주었다. 결국 길거리 삐라로 나서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일이 뉴스가 된다는 것또한 참담하다. 민주국가에선 반정부 메세지가 잡초처럼 흔한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수첩에 눌려, 경찰버스에 같쳐, 종북몰이에 몰려, 반정부의 목소리는 작고 초라해졌다. 조그만 삐라조차 신기한 세상이 된 것이다. 그나마 경찰의 조사를 무릅써야하는 곳이 지금의 남한이다.

남한은 정말 자유로운 것인가? 자유롭다면 무엇하기에 자유로운 곳인가? 북한에 비해, 프랑스에 비해 얼마만큼 자유로운 것인가?

새해는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Monday, December 1, 2014

수능과 개헌

학력고사를 보고 난 이후가 생각납니다. 물론 기말고사가 남아있었지만 인고의 세월을 보낸 피끓는 학생들의 해방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죠. 세월은 흘러 학력고사는 수능으로 바뀌고 입시도 복잡해지긴 했지만 수능 다음날의 상황은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수능이 또 끝났습니다. 정답논의가 또 일어났듯, 수험생 사정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한쪽에서는 이곳저곳을 몰려다니며 못다한 유흥을 이어나고 다른쪽에서는 여행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겠죠. 등교를 해도 잠을 자거나 멍하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지친 것은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측도 단축수업이나 각종 변칙운영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학부모들도 애들을 학교에 굳이 보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이때입니다. 교육청에서 아무리 공문을 내려보내고 대응책을 마련해도,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죠.

수능이라는 커다란 시험을 향해 달려온 모든이들에게는 더 이상 학업에 매달릴 여력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는것이 사실입니다. 시험이 없는 학생이 공부할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탈선을 묵인해 주는 것 일테죠. 돌아보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대 가기전 휴학생, 전역을 코앞에 둔 말년병장, 은퇴를 오늘내일하는 직장인 등이 있죠. 모두들 일을 열심히 할 뚜렷한 이유가 없고, 그걸 주변에서도 알고 있다는 것이 비슷합니다.

여기에 추가할 또 하나의 부류가 있습니다. 바로 ‘선거 없는 정치인’입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하고 성실한 학생이여도 시험이 있어야 공부하는 것처럼 아무리 착한 정치인이라도 선거가 있어야 유권자들에게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수능이 끝나면 공부할 의욕도,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 학생이듯, 선거가 없으면 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욕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정치인이죠. 그러니 아무리 민을 향해 도도하고 권위적이여도 다음 선거가 없으면 유권자들로서는 답답할지만 딱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죠. 한국엔 제도적으로 그런 정치인이 딱 하나 있습니다. 한번의 임기로 끝이 나는, 재선이 없는 대통령이죠.



민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낮추려고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도 치를 선거가 없으면 점점 민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다면 그것이 더 빨리, 더 염치없게, 더 확실하게 오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대통령에게 시험을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선거 이전의 겸손을 되찾게 또는 애초에 잃지 않도록 강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죠. 답은 개헌입니다. 4년 중임제면 중간고사가있는 셈이여 낫고, 내각제이면 시험의 불안이 항시 있어 더 좋겠죠.

개헌논의가 정국을 혼란케 하니 논의를할 수 없다는 말은 수능을 마친 학생이 할일도 많은데 학기말 시험이 왠말이냐고 불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 나와도 정국의 핵이 될 개헌논의는 이를 수록 좋고 시험이 많은 방향으로 끝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기왕이면 박정희가 파괴한 제이공화국의 의원내각제를 박근혜의 손으로 복원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Wednesday, November 5, 2014

[기고]오늘의 한국, 민주체제 맞습니까?

경향신문 (2014-11-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32032245&code=990304


민주체제에서의 정치가 권위주의체제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민주체제는 공정하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해 지도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불편함과 불확실성을 준다는 데에서 그 정치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치란 것이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이라는 것은 민주체제나 권위주의체제나 같죠.

민주체제에서는 정치엘리트 사이의 투쟁은 선거로 결판을 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도적 기제가 없는 권위주의체제에서는 무력을 동반한 암투가 흔하죠. 여기서는 정치엘리트와 인민의 정치투쟁도 폭압적이고 일방적입니다. 민주체제에서는 이런 수직적 정치투쟁도 상대적으로 평화적이고 덜 일방적입니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것일 뿐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민주체제는 그 싸움을 조금이나마 균형 있게 하는 장치들을 허용하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립적인 언론입니다.

정치엘리트와 민중 간의 수직적 정치투쟁은 미국에서도 일상적인 것이죠. 1971년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만행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정부는 이를 국가안보의 위협이라면서 보도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치열한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은 신문사들의 손을 들어주죠. 곧이어 닉슨 대통령과 신문들은 소위 워터게이트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결국 1974년 닉슨 대통령은 사임하죠. 이 두 사건은 미 행정부, 특히나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미국 사회 전체가 심각한 재고를 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승리 뒤에는 한 사람이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지난 10월21일 93세로 세상을 떠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자 벤 브래들리였습니다. 그는 진실에 대한 끈질기고 열정적인 추구로 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습니다.

브래들리의 진실에 대한 추구는 워싱턴 포스트를 권력자를 감시하고 민중에게 힘을 실어주는 민주체제의 파수꾼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은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훈장을 그에게 수여하였습니다. 강력하고 독립적인 언론이 민주체제에서 그만큼 소중한 것임을 권력자조차 인정한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력하고 독립적인 언론은 민과 권력자들의 정치투쟁에서 최소한의 지원군일 뿐입니다. 민중의 힘은 권력자의 그것에 한참을 못 미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시민들은 최소한의 지원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권력자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언론은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고 사정기관들은 민중의 감시에만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에 나서는 것마저 정부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판에 조용히 하지 않으면 법에 걸리게 생겼죠. 박근혜 정부는 민주체제가 그나마 허용하는 민의 권력을 축소하는 데 열을 내고 있다고 짐작하게 합니다. 대통령에 대한 조롱도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고 대통령의 신임을 업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한국, 권위주의체제로의 미래가 그리 머지않아 보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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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12, 2014

법치와 민주주의

사법계혁은 절실하지만 전문성이 강한 영역인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창비164 (2014년 여름)호의 대화는 그런 면에서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그 중 일부 흥미로운 부분을 간추려 보죠. -- 김두식 (경북대 교수), 백승헌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전수안 (전 대법관)


백승헌: 민주주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의 사회나 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도 ... 법에 의한 통치는 있어오지 않았습니까. 법치주의가 법에 의한 지배만을 말한다면 꼭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붙어 있어야 되는가, 그건 아니라고 봐요.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법에 의한 지배뿐 아니라 법의 평등, 접 앞의 팡등이라는 개념이 법치주의의 필수요소로 인정되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법치주의가 가능해진 것 아닌가 합니다 (195쪽).

미처 생각치 못한 부분이였습니다. 그리고 참 공감이 가더군요. 진시황의 법가통치는 법이 칼이였던 사회였죠. 한국의 군사독제체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주체제가 들어서면서 법의 칼날을 민의로 길들이기 시작한 것인데요... 하지만 아직 그 길들이기가 진행중이라는 것은 명확하고요. 이런 면에서 법치주의가 민주체제의 밑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 민주체제라는 것의 권력이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면 법치주의가 법가통치와 구분이 힘들어 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승헌: 법치주의란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잡든, 어떤 검찰이 있든, 어떤 사법부 판사가 사건을 담당하든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198쪽) 

말 그대로 법에 의한, 사람에 의하지 않은 통치... 사람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성 있는 법의 잣대가 사용되는 그런 통치.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일관성이 커지는 방향으로는 가야하는 것이 맞겠죠. 우리가 이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삼심제도 그런 면에서 발전이라고 봐야할테고요.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되면서 돌변한 검찰을 보며 제도의 강화가 더 필요하다는 것, 많은 분들이 공감하셨을 것입니다. 법치주의의 길이 멀다는 것을 검찰이 몸소 보여주고 있으니 참 역설적입니다.

전수안: 대의민주주의가 선출된 권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라면 법치주의는 권력이 솟아오르는 순간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밖에요 (199쪽). 백승헌: 선출된 권력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권력행사가 정당하다는 순환논리에 빠진다면 법치주의는 설 길이 없습니다 (205쪽). 

법은 힘있는 자의 횡포를 막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힘 없는 사람은 법이 있거나 없거나 사실 비슷하거든요. 남에게 해를 입혀도 그 범위가 좁은 것이 보통이고 힘이 있는 자를 두려워 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힘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이 입히는 사회의 해악이 크고 범위도 넓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할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없으니 사회의 근본적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권력자에게 더욱 엄정하게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김두식: 누구를 믿느냐는 것은 결국 증명력 판단 문제인데, 한쪽은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되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조직에서 살아 남는 걸 포기한 채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혼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누구를 믿어야 할지가 자명한데 ... (201쪽) 

이런 상황의 전반을 살펴보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혜를 사법부의 관리들이 없는 것은 아닐테죠. 없지 않다면, 어떤 이유로 그 상황을 왜곡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요?

전수안: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가 위조된 증게에 의해 수사를 받고 어쩌면 유죄판결을 받을지도 모르는 사회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요. (204쪽)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은 우리가 그만큼 독재의 과거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 함을 보여줍니다.

전수안: 범인을 모두 기소하겠다는 정의감도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기소하지 않겠다는 정의감도 소중하다는 것을 더욱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 결국 검찰의 개혁은 검찰 인사의 객관성과 투명성 확보 없이는 어렵다고 봅니다. 공정하고 정의감 넘치는 개별 검사들을 인사권자의 부당한 지시와 압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장치가 필요하다는 거죠.  (221-2쪽).   

김두식: 검사가 판사보다 더 일찍 승진하고 일찍 물러나야 하는 구조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간 상태에서는 현정부 5년 안에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게 아주 중요해집니다. 그러지 못하면 몇년 안에 지금 자리에서 옷을 벗고 나와야 하니까요. 검찰 상층부는 인사권을 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결국 자꾸 무리한 기소를 하게 됩니다. (224쪽) 

그러나 이 개혁의 필요성을 몰랐던가요.. 다들 권력을 쥐면 검찰의 맛에 길들여 지고, 개혁은 뒷전이 되는 것이 보통이였죠. 그러다 정권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다시 검찰의 눈치를 보게 되고.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맬 쥐가 필요합니다..  






 







Sunday, June 1, 2014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 : 선거만능주의의 함정> 남태현
창비 2014년 04월 01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파헤치며 현 한국사회의 정치를 진단하는 책이다. 저자는 정치의 참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 즉 우리 안에 굳게 뿌리내린 선거만능주의의 함정을 직시해야 한다고 명쾌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믿고 있는 선거제도 자체가 민의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한계 안에서 진정한 변화는 ‘나는 투표했다’라는 자위를 넘어선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근래 한국정치에서 보인 ‘다른 정치’의 증후군들을 점검함으로써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Friday, October 30, 2009

[시론] 정치가 뭔가요? / 남태현

한겨레 기사등록: 2009-10-30 오후 08:42:5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047.html

어느 정치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정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죠. 전공 대학원 수업이니 학생들이 쉬 답을 알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보아하니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더 난처했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거의 매일 하는 우리가 정작 정치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정치하는 사람을 쉽게 찾기 힘듭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하면 큰일 나는 사람들이 대다수니, 도대체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지, 또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죠.

신문을 한번 뒤적여 보죠. 일단 보통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나(“정치투쟁 오염 교사, 교단에 설 자격 없다” <문화일보> 올 7월31일치), 노동자들은(“민노총, 정치투쟁보다 조합원 권익위해 일해야” <서울경제> 올 3월19일치, 신재민 차관 “언론노조 파업은 정치파업” <동아일보> 올 2월28일치) 정치를 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같습니다. 교수나 학생도(“교수이어 학생들도 정치로?” <중도일보> 2007년 7월17일치) 물론 마찬가지인 듯싶습니다. 국가 권력도 정치는 바람직한 것 같지 않습니다. 검찰은 물론 안 되겠지만(검 “박연차 수사 정치적 의도 없다” <파이낸셜뉴스> 올 4월1일치), 심지어 정치를 위해 모인 정당도 정치를 하면 안 되고(안상수 “민주, 정략적 정치투쟁 받아들일 수 없다” <머니투데이> 7월13일치).

그럼 도대체 정치는 누가 합니까? 정치가 뭔가요? 정치는 자신의 뜻을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고 행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 정치는 우리 주변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고, 교실에서도 선생님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므로 보통 우린 공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주로 논합니다. 그렇다면, 공적인 장에서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강을 파겠다고 맘을 먹고 그 지위가 주는 힘을 이용해 그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지요. 모두 다 정치를 하고 있는데, 정치를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 그렇다면 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이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 이유입니다.

“왜?”는 “누구?”를 보면 답이 나올 듯합니다. 정부나 기업들은 노동자가 정치하면 뭐라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적인 사람이 정치하면 그들이 선생님이건 노동자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난리고, 야당은 여당을 정치한다고 뭐라 하고 여당은 야당을 정치한다고 몰아붙이는 것이지요. 정치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정치적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난히 정치하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은 바로 정치적인 힘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도전 자체를 이런 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기들은 글 읽고 공부하느라고 평생을 놀고먹으면서, 일반 백성들이 글을 배우려면 근엄하게 꾸짖던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치가 소수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을 우린 오래 견뎠습니다. 오랜 왕정이 그러했고,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그의 육사 후배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하고픈 유혹은 민주주의가 와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국민 여러분,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행위는 당연한 권리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필요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Friday, September 11, 2009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한겨레 2009.9.11 


최근 미국 정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에릭 홀더가 지난 부시 행정부의 중앙정보국이 불법 고문을 했는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지요. 조사 대상인 중앙정보국뿐 아니라, 보수파들은 이번 결정이 중앙정보국 요원들을 불안하게 해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면서 홀더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최근 드러나는 문서를 보면 정부의 고위층이 불법행위에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니, 이들의 반발이 이해도 갑니다. 한편으론 진보 진영도 이번 결정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고 있습니다. 홀더의 말대로 명백하게 고문을 한 수사관을 대상으로 조사를 할 경우 이를 실질적으로 지시한 고위층 지도자들은 면죄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이 흥미로운 것은 지난 정권의 흠을 들추는 것이 미덕이 아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마당에 그가 지명한 법무장관이 조사를 지시했다는 것이지요. 오바마 대통령의 가장 큰 공약 사항인 의료보험 개혁만으로도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 이번 일로 그는 국정 운영이 힘들어질까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번 일은 인치가 아닌 법치가 강조되는 미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미국의 법치가 완전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최근 부시나 닉슨의 예를 보면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미국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매번 그들은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회복했습니다. 닉슨의 불법행위는 오히려 의회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이런 법치 민주주의로의 회귀에는 눈을 크게 뜬 언론과 미국 시민들의 분노가 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지키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대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오랜 투쟁으로 마침내 1987년 민주주의는 얻어졌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어 하는 사이에 지난 두 정권이 쌓아둔 민주주의 업적이 퇴색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까? 언제 시민들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언제 힘 있는 사람들은 법 위에서 춤을 추고 있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 밑에 깔려 피를 흘리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혹시 지난 10여년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습관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민주주의가 왔고 그것을 위해 싸우던 분들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를 너무 쉽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분, 시민사회가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줄어드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러시아를 보십시오. 1990년대 혁명적인 정치변혁으로 얻어진 민주주의는 2000년대에 들어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도태된 지 오래입니다. 타이와 터키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시민사회에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백신과도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균을 몸에 넣어 저항력이 생기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의 도전도 그와 같아 우리들이 잠시 생각하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 값을 일깨워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기사등록 : 2009-09-11 오후 07:04:12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ERIES/60/3762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