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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28, 2017

개헌 생각 01)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개헌 논의가 심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권력형태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죠.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개헌의 이런 저런 면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현제도의 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권력을 의회에서 선출하는 총리가 나누는 제도죠. 1958년 프랑스 드골이 들고나온 5공화국 제도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요.

‘분권형 대통령제’(semi-presidential government) 논의 선구자인 뒤베르제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2.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이걸 좀 더 살을 붙이면: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대통령이 직접 선출됐으니 허수아비가 아니다)
2. 둘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허수아비가 아닐 뿐 아니라 강력한 권한을 지닌다)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전적으로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행정부 권한을 총리와 나눈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총리를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다만 의회의 지지가 필요하죠. 분권형 대통령제는 이름이 암시하듯 행정부 권력을 대통령과 총리가 나누는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대통령은 국가 원수직과 이른바 외치 영역에 해당하는 외교·안보·국방 정책 등을 담당하며, 총리는 내정과 관련된 그 나머지 정책들을 모두 맡는 형태를 생각하지만, 그것도 정치적 배분이지 법적 강제력은 없습니다.

권력의 분배가 제도적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보니 분권이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대통령이 되고 그 대통령의 정당이 의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죠. 대통령은 자기 수하를 총리로 임명할 테고 의회는 당연히 임명안을 통과할 겁니다. 나랏일, 정부 운영, 의회 활동까지 그 카리스마적 리더가 다 챙길 수 있죠.

한 극단적 예를 들자면 러시아가 좋겠습니다. 현재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이 잠시 총리로 물러나 있을 때 메드베데프 대통령(현재 총리)이 실권을 행사하려다 큰 코를 다쳤죠. 반대로 푸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총리를 압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권력분배가 별 의미가 없죠. 푸틴의 정당, United Russia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떡 주무르듯 합니다.

이런 상황은 사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도의 창안자인 프랑스의 드골이라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면 고안한 제도니까요. 드골은 2차대전 이후 4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받아들이자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후 정치위기가 이어지면서 공화국은 결국 붕괴했고 드골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5공화국 건설을 주도했습니다. 즉 권력을 나누기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 반대죠. (프랑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권한도 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비롯한 비슷한 사정의 구소련 나라들이 이 제도를 선호한 겁니다.

다른 극단적 예는 프랑스처럼 대통령의 정당이 총선에서 지는 경우입니다. 대통령이 임명은 하지만 의회에서 승인이 안 되니 울고 겨자 먹기로 야당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권력을 실제로 나누죠.

한국 내에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여기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앞서 살펴본 대로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개헌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공산이 크다는 점입니다. 드골처럼 제왕적으로 될 수도 있고 푸틴처럼 독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총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정치적 현실에 따라 그 독립성의 크기는 왔다 갔다 합니다. 다당제 도입, 대통령과 총리 간 협의의 제도화 등 보안책을 제시하지만 기본 틀을 바꾸기엔 역부족(협의 제도화)이거나 상관없어(다당제) 보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얼마만큼 변화를 줄까 하는 점을 고려해 보죠. 앞서 살펴본 분권형 대통령제의 정의를 또 한 번 들춰보겠습니다.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제67조 ①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2. 둘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외교(73조), 국군 통수(74조), 대통령령(75조)과 그 외 법률 효력의 명령 발동 (76조), 계엄 선포(77조), 공무원 임명(78조), 사면 복권(79조) 등등 광범위한 권위 보장.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전적으로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63조 ①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제65조 ①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행정 각부의 장·헌법재판소 재판관·법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감사원장·감사위원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쉽게 말해 처음 두 사항은 현재 헌법이 이미 충족하고 있습니다. 즉 국민 직접 뽑는 대통령(조건 1)이 실권이 있죠(조건 2). 조건 3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일단 총리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총리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점도 명시돼 있죠. 국회가 총리 해임할 수는 없지만 건의할 수는 있습니다. 총리 임명과 해임에 의회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봐야죠. (문재인 정부 첫 총리로 이낙연 총리 인준이 통과됐지만, 간신히 됐습니다. 하지만 이전 정부에는 낙마의 쓴 잔을 본 후보도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도 분권형 대통령제를 이미 갖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권력의 분립이 안 되니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는 제도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에 가깝습니다. 즉 한국에서도 정치적 타협만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는 가능하다는 말이죠.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정부의 대주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예를 곱씹어 볼 만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총리도 그 예로 거론됩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후보 시절부터 '책임총리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죠.

분권형 대통령제는 개헌이 굳이 필요치 않으니 개헌 논의의 한 대안으로는 적합지 않습니다.

Monday, December 1, 2014

수능과 개헌

학력고사를 보고 난 이후가 생각납니다. 물론 기말고사가 남아있었지만 인고의 세월을 보낸 피끓는 학생들의 해방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죠. 세월은 흘러 학력고사는 수능으로 바뀌고 입시도 복잡해지긴 했지만 수능 다음날의 상황은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수능이 또 끝났습니다. 정답논의가 또 일어났듯, 수험생 사정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한쪽에서는 이곳저곳을 몰려다니며 못다한 유흥을 이어나고 다른쪽에서는 여행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겠죠. 등교를 해도 잠을 자거나 멍하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지친 것은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측도 단축수업이나 각종 변칙운영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학부모들도 애들을 학교에 굳이 보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이때입니다. 교육청에서 아무리 공문을 내려보내고 대응책을 마련해도,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죠.

수능이라는 커다란 시험을 향해 달려온 모든이들에게는 더 이상 학업에 매달릴 여력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는것이 사실입니다. 시험이 없는 학생이 공부할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탈선을 묵인해 주는 것 일테죠. 돌아보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대 가기전 휴학생, 전역을 코앞에 둔 말년병장, 은퇴를 오늘내일하는 직장인 등이 있죠. 모두들 일을 열심히 할 뚜렷한 이유가 없고, 그걸 주변에서도 알고 있다는 것이 비슷합니다.

여기에 추가할 또 하나의 부류가 있습니다. 바로 ‘선거 없는 정치인’입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하고 성실한 학생이여도 시험이 있어야 공부하는 것처럼 아무리 착한 정치인이라도 선거가 있어야 유권자들에게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수능이 끝나면 공부할 의욕도,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 학생이듯, 선거가 없으면 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욕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정치인이죠. 그러니 아무리 민을 향해 도도하고 권위적이여도 다음 선거가 없으면 유권자들로서는 답답할지만 딱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죠. 한국엔 제도적으로 그런 정치인이 딱 하나 있습니다. 한번의 임기로 끝이 나는, 재선이 없는 대통령이죠.



민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낮추려고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도 치를 선거가 없으면 점점 민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다면 그것이 더 빨리, 더 염치없게, 더 확실하게 오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대통령에게 시험을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선거 이전의 겸손을 되찾게 또는 애초에 잃지 않도록 강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죠. 답은 개헌입니다. 4년 중임제면 중간고사가있는 셈이여 낫고, 내각제이면 시험의 불안이 항시 있어 더 좋겠죠.

개헌논의가 정국을 혼란케 하니 논의를할 수 없다는 말은 수능을 마친 학생이 할일도 많은데 학기말 시험이 왠말이냐고 불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 나와도 정국의 핵이 될 개헌논의는 이를 수록 좋고 시험이 많은 방향으로 끝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기왕이면 박정희가 파괴한 제이공화국의 의원내각제를 박근혜의 손으로 복원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Tuesday, September 16, 2014

박통의 지휘봉


박 대통령 “대통령 모독 발언 도를 넘고 있다” (한겨레 2014
.9.16)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지금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자는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결단을 하라고 한다”며 세월호 유족들의 요구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

국무회의에서 마치 국민전체에게 말하는 듯한 말투...
자신의 한마디면 움직일 새누리당 지도부와 의원들을 거느리면서 한다는 소리가 대통령이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특별법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것과 다름이 없죠. 여야합의안에 대한 선을 자상히도 그어주는 것을 보면 청와대가 지휘봉을 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번 여야의 2차 합의안은 여당이 추천할 수 있는 2명의 특검 추천위원을 야당과 유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추천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이는 특별검사 추천에 대한 유족과 야당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여당의 권한이 없는 마지막 결단이라고 생각”

꽉막힌 정국, 세월호 특별법 처리 등에 관한 비난의 화살이 대통령으로 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Friday, September 5, 2014

[기고]억지와 침묵의 답답함

경향신문 2014-09-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9051925205&code=990304

잘잘못을 따지다가 정 안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 뭐야?” 이 말은 연령차가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선 “너 몇 살이야?”로 변형돼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말은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와 너의 관계로 일을 해결해 보겠다는 억지라는 데서 기본적으로 똑같습니다. 당신 뭐야라는 물음은 당신이 어떤 권위가 있어서 이렇게 따지느냐는 물음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권위의 있고 없고의 문제로 변질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죠. 대개 이런 말은 자신의 사회적 권위가 상대방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 먼저 꺼내기 마련입니다. 너 몇 살이냐는 물음도 같습니다. 나이가 곧 계급인 사회에서 계급을 밝히라는 것이죠. 물론 딱 보기에도 나이 든 사람이 묻는 게 보통입니다.

이런 억지에 “내가 누군 줄 알기나 해?” 또는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이렇게 반응하면 그 덫에 걸려드는 셈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뒷전이 되고 상대편의 권위에 맞서는 나의 권위를 찾기에 바쁩니다. ‘내 주장이 옳다’는 ‘내가 더 낫다’로 바뀌는 것이죠. 물론 이는 애초에 상대가 원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상대는 자신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빠르게 깨달은 후이니까요. 논의가 변질되면 애초의 시비를 따지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답답함만 더해가죠.

답답하기는 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데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경우엔 정말 환장할 것 같죠. 그나마 상대방이 친한 사람이거나 아랫사람이라면 불러서 호소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윗사람이어서 불러 앉힐 수도 없는 경우엔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 답답한 침묵은 나와 상대의 힘의 관계를,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힘이 없다는 사실을 더 뼈아프게 보여주기 때문이죠.
상대의 침묵이 지속되면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됩니다. 그 침묵 자체가 논란거리가 되기 때문이죠. 어느덧 시비를 따지고 싶은 쪽은 상대방의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물론 그래야 시비를 따질 수 있어서이기는 하지만 그 침묵이 유지되는 동안 상대방은 논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침묵을 지킬 수 있는 여력 또는 권력이 있는 쪽이라면 그쪽으로선 더 바랄 것이 없겠죠. 

이렇게 교묘한 억지와 간교한 침묵에 빠지는 것을 상상해 보시죠. 정말 답답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낯설지는 않지요? 이 불쾌한 낯설지 않음은 4월16일 이후 세월호 정국을 헤쳐나가고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사생활을 탈탈 털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자격이 있는지, 어떤 흠이 있는지로 논의를 변질시켰죠. 또 다른 한쪽으로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함으로써 ‘대통령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대답하라’고 요구하는 사태를 성공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가, 얼마만큼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고,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그만큼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지금의 사태가 진실을 밝히고 시비를 가리는 데 발목을 잡고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나아가 저렇게 무능한 정부가 왜 필요한지, 어떤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한다는 데 있어서도 큰 걱정인 것이죠. 정부가 정당성을 잃으면 가장 큰 피해는 또다시 민중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떨어지니까요. 이런 걱정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국정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고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커다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을 모르나 봅니다. 억지와 침묵을 당장에 걷어내고 대통령의 의무에 충실할 것을 엄중히 요구합니다.

Tuesday, July 1, 2014

‘예의염치’ 없는 한국 정치

인사이트 2014/07/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4070&Code1=001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화교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건물 정면에 크게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교훈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의는 예절과 의리를 말하는 것이고 염치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갖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일컷는 것이죠.

이 예의염치는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 난징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국민당 정부가 사용한 국가 통합의 유교이념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실패한 정부의 이념의 핵심이지만 살아남아 화교들 사이에서 그 정신이, 멀리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인상적인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세고 돈이 많아도 신세를 질 수 밖에 없고,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이라도 사회에 공헌을 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게 하니 미안한 것이죠. 미안한 만큼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염치가 있어야 상대방도 귀찮더라도 도와줄 공산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당장 주변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불쾌해진 사람들은 도움에 인색하게 되기 쉽습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늘수록 사회전체가 각박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많은 실정을 되풀이 했습니다. 특히 세월호 정국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 둘이 아니죠. 그 걱정거리 중 하나는 이 정부는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창극 총리 지명자는 교회 등 과거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없다”는 등 일반적 역사적 인식에 반하는 발언으로 국가적 공분을 일으켰죠. 하지만 본인은 아무 문제가 될 태도로 두 주를 버텼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노와 실망은 더욱 커지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사퇴를 하는 마당에도 “언론이 전체의미 왜곡·훼손” 주장하고 “여론은 변하기 쉽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한다며 여론에 굴해야하는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가문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바로 세월호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를 한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킨 것이죠.

새로 구성했다는 내각을 들여다보면 임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논문표절, 병역, 재산 형성, 과거행적 등 전형적인 지도층의 문제를 하나 둘씩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정홍원을 유임시킴으로써 세월호에 책임지는 지도자는 결국 전무한 셈이 되어버렸죠.

이를 보는 국민들은 얼굴이 화끈 거릴 노릇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야 답답하지만 사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간 대국민 사과를 미루어온 박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해하는 국민들이 더 답답할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는지, 왜 자기를 비난하는지 이해가 안 가겠죠. 이해가 안 가니 답답하고, 미안해 할 일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염치가 없는 것이죠.

하긴 평생을 남에게 군림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겨온 이들이 남에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많은 신세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총리, 장관의 권력은 무시무시합니다. 공권력을 주무르고 법과 정의를 재단합니다. 지금처럼 한 정당이 대통령직과 국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을 때는 그 정당의 권력은 정점에 달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릅니다. 안정과 안전을 보호할 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평안을 지켜야합니다.

향응에 취할 때가 아니라 막중한 책임에 잠이 잘 안오는 게 정상일테죠. 게다가 이러한 권력은 국민들의 양해를 통해 잠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민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죠. 권력이 센 만큼 더 몸을 숙이고 겸손해야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담화만 거듭하고 이마저 질문 하나 받지 않는 이 정권은 기본적인 민주적 의무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듯해 안타깝습니다.

한국처럼 소수자들이 살기 힘든 땅에서 살아야 했던 화교들로서는 염치라는 덕목이 더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선 한국인들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앞으로의 처신에도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소수, 약자들에게만 염치가 소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강위의 작은 쪽배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유유히 떠있게 하는 것도 강물이고 배를 뒤집는 것도 강물인 것처럼, 군림하게 하는 것도 국민이고 갈아치우는 것도 국민임을 알아야 하겠죠.

그러니 그 쪽배들은 염치라도 있어야 될 듯합니다.

Monday, June 2, 2014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기고]‘대통령 희화’를 허하라 - 남태현
경향신문 2014-06-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12030465&code=990304

미국은 풍자의 천국입니다. TV에서 코미디언들이 정치인들을 희화화하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입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죠. 인터넷에서 오바마의 사진을 찾아보면 온갖 희화와 조롱이 난무합니다. 심한 것은 화제가 되기도 하고 오바마 또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1년에 한 번 백악관이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모아 만찬을 여는 자리에서 코미디언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것이 백악관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런 풍자를 거의 20년을 보아서 이제는 일상적으로 느끼지만 처음에는 나라의 지도자를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걱정 반, 부러움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님인데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처음에 가졌던 그런 생각은 애초에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은 나라님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안 볼 때는 나라님 욕도 한다죠. 거꾸로 보면 볼 때는 하면 안된다는 소립니다. 이제는 그냥 하는 소리가 됐지만 옛날에는 정말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나라님을 바꾸는 공론만으로도 삼대가 멸하는 조선이었죠. 왕조시대엔 동서 어디나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멀리 아랍의 왕조국가들까지 갈 것도 없이 가까운 데 있는 태국만 가도 국왕을 욕하면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고 실제로 이 법으로 반정부 인사들이 처벌을 받기도 하죠.

이들 국가는 나라의 주권이 왕조의 정통성에 근거하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들입니다. 조선왕조는 말할 것도 없고, 헌법이 국민주권을 명시한 태국 같은 경우에도 정치문화가 왕조와 주권을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체제에서는 왕을 욕하고 풍자하는 것은 나라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처벌이 정당화되는 근거죠.

하지만 국가의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체제에서는 정부 지도자를 희화화하는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임받았기에, 다른 국민에 비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희화와 조롱에 너그러워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자리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그런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권력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화와 조롱에 발끈하는 대통령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첫째로 민주체제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라님이라도 됐거나, 나라님을 모시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면 자신 또는 그분에 대한 어떠한 희화나 조롱도 참을 수가 없을 수 있습니다. 나라님인데요. 대통령 개인에 대한 조롱이 아닌 나라 전체의 조롱인 셈이 되는 것이죠.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둘째로 이들은 국민의 조롱에 신경이 쓰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의 권력이 포스터나, 코미디, 농담 등으로 약화되었거나,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정당성에 자신이 없거나, 정당성이 약화되었다고 판단을 했을 수 있죠. 어찌되었건 그런 판단을 했다면 조롱이 실제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정당성이 더욱 약화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들로서는 그런 조롱을 막는 것이 심각한 정치적 사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주체제의 원칙에 충실하고,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으로써, 자신에 대한 희화나 조롱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대통령들이, 그런 대통령을 갖고 있는 국민들이 무척이나 부러운 요즘입니다.

Monday, April 28, 2014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 남태현
한겨레 2014.04.28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34864.html

요즘 미국에선 네바다주의 클리븐 번디라는 목장주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정부의 땅에 자신의 가축을 방목하면서도 정부에 돈을 내지 않아 가축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번디는 총을 든 지지자들과 함께 가축을 압수하러 온 연방정부 요원들과 무장 대치를 했습니다. 충돌을 피하고자 정부가 오히려 철수를 하고 맙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연방정부의 간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폭스뉴스> 등의 반오바마 정서 등 여러가지로 논할 것이 많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과 회의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 역사의 특수성 때문일 수 있지만, 어찌되었건 이런 논란 속에 미국민은 연방정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국민과 지방정부, 연방정부 사이에 긴장을 유지합니다. ‘연방정부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며 복종과 희생을 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간 의아한 눈초리와 비웃음을 사기 쉬운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국가가 있어왔죠. 그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정부죠. 정부는 그래서 국가와 동일시되기 일쑤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역사의 부침이 남다른 곳에선 국가와 정부의 존재는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주체라기보다는 내가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국가와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삼가하는 이유는요?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책을 보면, 국가가 없던 시절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죠.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며 간신히 생존해야 했으니까요. 개인들은 결국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대신 국가라는 괴물을 섬기며 안위를 택합니다. 결국 국가의 존재는 개인의 안위를 보장함으로써 성립, 성장, 유지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안위를 보장치 못하는 국가와 정부는 도전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가 시위하는 자국민을 향해 발포하자 더욱 거센 저항을 받은 것은 한 예라 할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박근혜 정부는 무능하다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대응을 했습니다. 구조활동만 보더라도 침몰 직후 정부는 혼란과 관료주의 탓에 오히려 구조활동을 방해만 했습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 감독해야 할 박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람들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만 성공했습니다. 그사이에 수백명의 생명이 울부짖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번디처럼 총을 들고 나서는 무지한 용감함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수백명이 죽는 것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게 하는 정부를 왜 지지해야 하는가? 국민을 지키지는 못하면서 억압할 때만 쓰는 공권력을 왜 용납해야 하는가? 전국민을 이렇게 분노케 했으면 그 정부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사과와 개각, 선거의 패배로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일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애도를 지나 조사, 법적 조치가 따르겠죠. 하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은 정치적 논의를 통한 정치적 처벌과 정치적 개혁입니다. 그것 없이는 지도자들은 또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 웃는 얼굴로 비릿하게 군림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고통을 또다시, 반드시 겪게 될 테니까요.

애끓는 가슴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Monday, March 7, 2011

이명박 대통령 지지도 믿기 어려워

한국일보 (와싱턴 디씨판)"이명박 대통령 지지도 믿기 어려워"
http://dc.koreatimes.com/article/648102

남태현 솔즈베리 대학 정치학 교수, MD
입력일자: 2011-03-07 (월)

한국일보 오피니언란(2월 28일자)에 실린 정진영 경희대 교수의 글 (http://dc.koreatimes.com/article/646621)을 반박하고자 한다.
정 교수의 글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한국국민의 놀라운 지지를 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50% 정도의 지지도를 얻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 지지의 주요한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 “적극적인 경제외교의 전개” 그리고 “한미 관계의 강화와 대북정책의 정상화”를 그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정 교수의 글은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 썼다면 C를 주기도 힘든 글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말하는 이명박에 대한 지지도 자체가 허황되다는 점이다. 그 놀라운 50% 정도의 지지율을 보라. 이 지지율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는 한나라당 의원들조차도 의심하는 것이다. 지역구를 돌아본 많은 의원들이 수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대통령 지지율 50%에 대해 “대체 그런 조사는 어디서 나온 거냐?(한나라당 박성효 최고위원)”는 힐난 섞인 질문이 나왔다(경향신문 2월 16일자).

더구나 지역에 따라서는 민심이반이 더욱 심하다. 그럼, 왜 이렇게 지지도와 실제 피부로 느끼는 지지의 정도가 다른 것일까? 이는 바로 여론조사 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여론조사는 전화로 하는데, 이는 주로 집 전화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요즘 집 전화로 전화를 하는 한국 사람은 대부분 핸드폰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이 대통령의 지지도는 나이 많은 기존 지지층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많이 반영된 조사라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의 지지가 저조한 중년, 청년들의 목소리는 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으로, 이 대통령의 지지가 놀랍다는 그의 관찰은 학자로서는 더욱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결론이 허황되므로, 그 결론을 입증하는 그의 논의는 더욱 허망하다. 사실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살펴보자.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라는 말은 도무지 무슨 소리일까. 여기 계신 동포들은 미국 뉴스를 조금이라도 보셨다면 아실 듯이, 20개국의 정상이 모였다고는 믿어지기 힘들만큼 이 정상회담은 지면을 장식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성공이라면, 아무 탈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 외에는 도대체 무엇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는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는 아무 성과가 없는 것이었다.

“적극적인 경제외교의 전개”라는 것도 한미자유협정을 말하는 것인데, 이 또한 이대통령이 아닌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이었다. 글의 시작에 “세계 금융위기를 조기에 극복”했다는 말도 나오는데, 이건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이겠다. 1997년의 위기라면, 김대중 대통령이 극복했고, 현재의 세계 금융위기라면 미국과 유럽의 위기를 말하는 것일테니까. “녹색성장”이라는 그의 표현은 사실 이 대통령도 들으면 웃을 일이다. 4대강 사업으로 강산이 파헤쳐지고 있는데 이걸 녹색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억지나 무지다.

“한미관계의 강화와 대북정책의 정상화” 또한 이명박 대통령의 치적일 수 없다. 한미 관계는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지 한국의 대통령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결국은 손을 들고 미국에 굴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북정책의 정상화 또한 정 교수의 안목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북한에 적대적이건 아니건, 현재 이명박의 정책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그의 정책은 결국 평화를 지키는데 실패했고, 이를 가리켜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태풍으로 무너진 집터에 남아 짖고 있는 개를 보고 집 잘 지켰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말도 안 되는 근거로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뒷받침하려는 정 교수의 글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 평생 공부와 글쓰기로 시간을 보낸 정진영 교수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편없는 글이 한국 어디도 아닌, 이 먼 타향에 실린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Wednesday, April 15, 2009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2009.4.15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 시절인 2001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부시의 고향 텍사스를 방문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접을 받았다. 직접 트럭을 몰고 드라이브도 즐기며 아주 친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부시는 푸틴의 “가슴과 영혼”을 보았다며 정상회담의 성공을 자축한다. 물론 푸틴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치켜세우던 부시는 러시아에서 실제로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 그리고 그 임기가 끝난 뒤에는 총리로서 권력을 이어가는, 민주주의의 “가슴과 영혼”과는 거리가 있는 지도자였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몰랐을 것이 확실하다. 대통령이 모르니 어린 학생들이 알 수가 있나.
나는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하여 미국 학생들과 토론을 하는 것은 늘 새롭다. 많은 학생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선 그런 고정관념을 깨,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보람되다. 내가 좋아하던 토론의 한 예가 푸틴의 러시아였다.
푸틴은 2000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은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내전이라는 호재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일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이후 푸틴은 정치적 반대를 하나하나 잠재웠다. 2003년 가스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회장의 체포는 그 신호탄이었다. 메시지는 아주 분명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그 누구도, 아무리 부유하고 세력이 굳건하더라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정치제도도 그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체첸 지역에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폭압적인 군사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푸틴이 무엇보다 공들인 것은 아무래도 언론에 자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노력은 치밀하고 총체적이었다. 그의 치부를 건드리던 유명 티브이채널 는 하수인을 통해서 길들였고 회사의 사장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체포된 데 이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회사를 포기한 건 물론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지방의 방송사들은 알아서 스스로 푸틴이 싫어할 보도를 자제하기 시작했다. 방송사의 소유권도 하나하나 정부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그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했던 토론이나 야당의 목소리는 불과 수년 만에 러시아 전역의 티브이에서 사라지는 지경에 이른다. 말을 듣지 않는 개개 언론인들 또한 하나하나 길들여지거나 사라져 갔다.
보도지침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기억되는 우리는 아마 다음의 코미디 같은 사건이 그렇게 우습지만은 않을 것이다. 2008년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스톱 리스트’가 존재한다. 이 리스트에 있는 비판적인 인사는 티브이의 인터뷰나 방송 출연이 실질적으로 금지된다. 심지어 유력 야당 지도자들도 티브이에서 보기가 이제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평범한(?) 정권의 비판자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국경 없는 기자회’라는 단체에 따르면 푸틴의 집권기에 18명의 기자가 살해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자기 집 앞에서 살해당한 안나 폴릿콥스카야라는 여성 기자일 것이다. 그는 체첸지역의 전쟁참사를 끊임없이 보도해 모스크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푸틴 비판자였다. 대가는 끊임없는 살해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협에 시달리던 그가 변을 당한 날은 우연인지 푸틴의 생일이었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 두 번의 의회선거를 합법적으로 치른 푸틴. 그가 과연 민주주의의 수호자였을까? 당연히 답은 너무나 뻔한 ‘아니요’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못해 독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음에 답을 하기가 2009년엔 수월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내 학생들은, 특히나 부시를 지지하는 학생들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푸틴의 반민주적인 행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도 치르고, 자신이 지지하는 부시가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떤 학생들은 내가 조목조목 따지면 거의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의 수는 적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하기엔 너무 뻔하게 그의 독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화를 내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뭐라 그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난 시간이 갈수록 설사 누가 그런 비유를 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길 진심으로 빈다. 왜냐하면 그 반대는 상상하기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람이 방송사를 억지로 장악하고, 대통령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던 뉴스 앵커가 시청자들과 회사 동료의 지지에도 뉴스에서 중도하차하고, 대통령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진행자가 프로그램의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방송을 그만둘 뻔했다. 난 이런 이야기가 러시아만의 것이길 바랐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한겨레 기사등록 : 2009-04-15 오후 10:16:22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500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