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9.05.02
<삼국지>를 보면 당대 최고의 재상 제갈량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죽은 제갈량이 적이자 최고의 라이벌이던 사마의를 쫓아낸 일화죠.
오랜만에 들른 광화문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 건물에 걸린 독립운동가 초상화가 크기도 했지만 너무 현대적이고 세련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행사가 많았습니다. 100주년이어서 그랬겠지만, 민간 행사뿐 아니라 정부 주도 포럼, 전시회, 기념회 등이 열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녀상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황사처럼 전국을 강타했죠.
모든 사상은 한계를 갖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것은 한계가 더 도드라집니다. 정체성의 경계는 인위적이지만 결국 절대적이 되니까요.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민족’은 현대국가가 세워지며 생겼죠. 순수한 혈통은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환호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역사에 기대는 사상이다 보니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진보적 미래를 꿈꾸기에는 부족하죠.
그러니 정치판이 과거에 머무를수록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국민은 피곤합니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이 정부는 그릇된 과거를 타파하는 사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것에 집중하는 게 당연했죠. 덕분에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옳고 저쪽은 적폐라는 구분은 그렇게 그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어진 선은 정부를 옭아맸습니다. 적폐로 지목된 이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고, 배수진을 친 이들의 저항은 치열했죠. 과거에 대한 전투가 치열할 때 거리엔 촛불이 꺼졌습니다. 은행빚과 취업난이 그 거리를 채웠죠. 싸움이 힘들어질수록 쉬운 상대가 눈에 띄는 법. 100년 전 일본만큼 만만한 상대가 있을까요. 시선은 자꾸 과거로 가고 미래에서는 멀어졌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가졌던 과거청산의 소명은 이제 그 유효기간이 지난 듯합니다. 박근혜와 주변 인물들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 셈이죠. 이제 정치에 충실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첫째, 정치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총칼 없는 전쟁이죠. 갈등 당사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논의하는 공적 장입니다. 상대가 좋건 싫건 말이죠. 싫다고 배척하는, 내가 옳다고 외면하는 순간 정치의 영역은 좁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갈등의 당사자들은 주먹과 칼에 기댈 수도 있죠. 둘째, 정치적 미래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싸움을 과거로 몰아가도 판을 흔들어야 합니다. 불과 1년 전 평화가 있는 미래를 보여줬을 때 국민은 열광했죠. 남북평화가 중요한 미래이지만 그것뿐이라면 곤란합니다. 문재인 정부 탓만은 아니지만, 정권은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있습니다.
정치판에서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고 그 판마저 좁아지면서 싸움은 국민 사이로 파고든 형국입니다. 정치적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적 공간이 허약해집니다. 분노와 무시당했다는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 쉽죠. 이들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고함에 쉽게 동화해 정치세력화할 수 있습니다. 벌써 그런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태극기부대죠. 오는 토요일이면 태극기집회는 122차에 접어듭니다. 그들은 열정과 확신이 있습니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옵니다. 부산에서,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옵니다. 매주 오는 이도 많습니다. 사비를 털어 시위용 트럭을, 동지들 먹일 식사를 준비합니다. 명확한 비전도 갖고 있습니다. 맨주먹으로 정당을 꾸렸다는 자부심도 강합니다. 하지만 공존을,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보는 이들만큼은 철저하게 무시합니다. 무시당한 이들을 모아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죠. 브라질에서도, 독일에서도,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만 언제까지 예외일까요?
이런 와중에 자유한국당 해산 국민청원이 2일 현재 170만명에 육박한다니 걱정스럽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의 광기가 생각나는 것은 저뿐인가요? 대화와 설득은 좋아서가 아니라 대안이 없어 하는 겁니다. 하루빨리 정치를 복원해야 합니다. 미래에의 비전을 두고 싸워야 합니다.
죽은 박정희 손에 산 문재인이 실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Showing posts with label 정치 사상.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정치 사상. Show all posts
Thursday, May 2, 2019
Wednesday, April 1, 2015
[updated] 박근혜 종북몰이 정리
박근혜 정부의 종북몰이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다음의 기준을 세우고 이에 맞는 사례를 모아봤습니다. 앞으로 사례가 더 생기거나 발견되는데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제가 빠뜨린 것을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록의 기준:
- 권력의 비난/행동을 주로 기록.
- 비권력의 비난이 권력의 직접적 행동으로 이어지면 기록.
- 권력의 발언이 권력의 행동으로 이어지면 기록
2015.3.30
학부모
'친환경무상급식지키기 경남본부'에 대해 경남도청은 '반국가적 종북 활동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 간부 출신 등이 대표를 맡고 있는 종북좌파 정치집단'이라고.
극우테러범
새누리 대변인 김영우 의원은 미대사에 대한 테러를 "단순히 정신착란이라든지 개인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용의자 김기종은 "꾸준하게 종북좌파 활동을 해온 이력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2015.2.4
이재명 성남시장
지난 2010년 지방 선거에서 당시 민주노동당과의 후보 단일화 대가로 민노당 사회적 기업 '나눔환경'을 청소용역업체로 선정해 줬다는 의혹, 서울신문 보도. 고소인 겸 피고소인 신분으로 검찰 출석.
2015.1
황현. 신은미
불구속 송치/강제 출국 검토 (2015.1.5). 북한 긍정평가, 북한 고무-찬양.
박근혜, "당사자인 대한민국에서 그 정반대 이야기 나오는 것은 극히 편향되고 왜곡된 것” (2015.12.15); 김진태,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종북녀'들이 전국을 돌며 민심을 어지럽힌다” (2015.12.15)
활빈당 고발 (2014.11)
2014.12.14
19대총선 야권연대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19대 총선 당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야권연대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이뤄졌다고 주장.
2014.12.23
코리아연대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한 북한 선군정치를 옹호·찬양했다는 혐의
2014.12
통합진보당
헌법재판소, 정당해산. 북한식 사회주의를 폭력으로 추구했다. (2014.12.19)
2014.10
미주 교포
새누리당 이장우 원내대변인, 박근혜 방미중 시위교포가 북한에서 최고 영예인 ‘김일성 상’ 받은 종북 인사로 밝혀졌다”면서 시위대가 종북 단체라고 비난 (10.2).
2014.7.28
야당
김을동 새누리 최고의원, “막장 공천은 노골적 종북연대인 막장 연대로 귀결”되고 있다면서 “지난 총선에서 야합으로 국가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국회에 들어와서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에 있고, 또 그 세력들이 국회에서 지금 활동 중”이라고.
2014-06-30
군대
한민구 국방부 장관 후보자, “극소수 친북·종북 성향의 군 간부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있다”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 “상당수 인원이 군 간부로 들어가 있고 실제로 내부에서도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제보 받고 있다.”
2013.11.20
민주당
박대출 새누리당 의원, 국회 본회의장에서 진성준 민주당 의원에게 “종북하지 말고 월북하지”라고.
2013.11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
NLL 정의, 천안함 북한공격 의심 발언 (2013.11)
활빈당 등 보수단체 고발 (2013) 경찰 소환 불응 (2014.9)
2013.9.9
민주당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민주당의 연대를 가리켜 "종북세력의 숙주노릇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2013.4.25
통합진보당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국회 임시회 대정부질문에서 통진당 의원들의 행태를 말하며 “종북성향 의원” 발언.
이재명 성남시장
지난 2010년 지방 선거에서 당시 민주노동당과의 후보 단일화 대가로 민노당 사회적 기업 '나눔환경'을 청소용역업체로 선정해 줬다는 의혹, 서울신문 보도. 고소인 겸 피고소인 신분으로 검찰 출석.
2015.1
황현. 신은미
불구속 송치/강제 출국 검토 (2015.1.5). 북한 긍정평가, 북한 고무-찬양.
박근혜, "당사자인 대한민국에서 그 정반대 이야기 나오는 것은 극히 편향되고 왜곡된 것” (2015.12.15); 김진태,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종북녀'들이 전국을 돌며 민심을 어지럽힌다” (2015.12.15)
활빈당 고발 (2014.11)
2014.12.14
19대총선 야권연대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19대 총선 당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야권연대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이뤄졌다고 주장.
2014.12.23
코리아연대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한 북한 선군정치를 옹호·찬양했다는 혐의
2014.12
통합진보당
헌법재판소, 정당해산. 북한식 사회주의를 폭력으로 추구했다. (2014.12.19)
2014.10
미주 교포
새누리당 이장우 원내대변인, 박근혜 방미중 시위교포가 북한에서 최고 영예인 ‘김일성 상’ 받은 종북 인사로 밝혀졌다”면서 시위대가 종북 단체라고 비난 (10.2).
2014.7.28
야당
김을동 새누리 최고의원, “막장 공천은 노골적 종북연대인 막장 연대로 귀결”되고 있다면서 “지난 총선에서 야합으로 국가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국회에 들어와서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에 있고, 또 그 세력들이 국회에서 지금 활동 중”이라고.
2014-06-30
군대
한민구 국방부 장관 후보자, “극소수 친북·종북 성향의 군 간부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있다”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 “상당수 인원이 군 간부로 들어가 있고 실제로 내부에서도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제보 받고 있다.”
2013.11.20
민주당
박대출 새누리당 의원, 국회 본회의장에서 진성준 민주당 의원에게 “종북하지 말고 월북하지”라고.
2013.11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
NLL 정의, 천안함 북한공격 의심 발언 (2013.11)
활빈당 등 보수단체 고발 (2013) 경찰 소환 불응 (2014.9)
2013.9.9
민주당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민주당의 연대를 가리켜 "종북세력의 숙주노릇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2013.4.25
통합진보당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국회 임시회 대정부질문에서 통진당 의원들의 행태를 말하며 “종북성향 의원” 발언.
Monday, April 28, 2014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 남태현
한겨레 2014.04.28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34864.html요즘 미국에선 네바다주의 클리븐 번디라는 목장주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정부의 땅에 자신의 가축을 방목하면서도 정부에 돈을 내지 않아 가축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번디는 총을 든 지지자들과 함께 가축을 압수하러 온 연방정부 요원들과 무장 대치를 했습니다. 충돌을 피하고자 정부가 오히려 철수를 하고 맙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연방정부의 간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폭스뉴스> 등의 반오바마 정서 등 여러가지로 논할 것이 많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과 회의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 역사의 특수성 때문일 수 있지만, 어찌되었건 이런 논란 속에 미국민은 연방정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국민과 지방정부, 연방정부 사이에 긴장을 유지합니다. ‘연방정부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며 복종과 희생을 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간 의아한 눈초리와 비웃음을 사기 쉬운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국가가 있어왔죠. 그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정부죠. 정부는 그래서 국가와 동일시되기 일쑤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역사의 부침이 남다른 곳에선 국가와 정부의 존재는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주체라기보다는 내가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국가와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삼가하는 이유는요?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책을 보면, 국가가 없던 시절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죠.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며 간신히 생존해야 했으니까요. 개인들은 결국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대신 국가라는 괴물을 섬기며 안위를 택합니다. 결국 국가의 존재는 개인의 안위를 보장함으로써 성립, 성장, 유지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안위를 보장치 못하는 국가와 정부는 도전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가 시위하는 자국민을 향해 발포하자 더욱 거센 저항을 받은 것은 한 예라 할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박근혜 정부는 무능하다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대응을 했습니다. 구조활동만 보더라도 침몰 직후 정부는 혼란과 관료주의 탓에 오히려 구조활동을 방해만 했습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 감독해야 할 박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람들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만 성공했습니다. 그사이에 수백명의 생명이 울부짖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번디처럼 총을 들고 나서는 무지한 용감함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수백명이 죽는 것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게 하는 정부를 왜 지지해야 하는가? 국민을 지키지는 못하면서 억압할 때만 쓰는 공권력을 왜 용납해야 하는가? 전국민을 이렇게 분노케 했으면 그 정부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사과와 개각, 선거의 패배로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일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애도를 지나 조사, 법적 조치가 따르겠죠. 하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은 정치적 논의를 통한 정치적 처벌과 정치적 개혁입니다. 그것 없이는 지도자들은 또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 웃는 얼굴로 비릿하게 군림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고통을 또다시, 반드시 겪게 될 테니까요.
애끓는 가슴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Monday, December 16, 2013
종북몰이, 한국의 마녀사냥
종북몰이, 한국의 마녀사냥 - 남태현
인사이트 2013-12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51&Code1=001토론을 중시하는 미국대학에서도 사실 학생들의 토론을 이끄는 것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 방법 중 제가 즐겨 쓰는 것 중 하나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것이죠. 가르치는 전공이 정치학이다 보니 정치적 내용이 묻어나는 영화를 보여주는데 그 중 제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파리대왕>이 있습니다.
윌리암 골딩의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1963년과 1990년 두 번에 걸쳐 영화화 되었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1963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저에겐 다행이도 <정치와 영화>라는 과목을 가르칠 기회가 있어서 영화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다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체 없는 공포, 정치판 조장
이 영화는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재빠르게 정치사회를 구성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음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영화가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정치인으로 거듭납니다. 위와 아래의 질서를 확립하고 위에 선 아이들 즉 권력자들은 점점 더 커지는 권력에 심취합니다.
이 과정을 결정적으로 과속화한 것은 산꼭대기의 괴물의 존재였습니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군림을 허용하고 무리들의 복종을 요구했죠. 괴물은 오래된 시체로 밝혀지지만 그 목격자는 죽임을 당하고, 진실은 묻히게 됩니다. 결국 괴물의 공포만 살아남아 이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정치세력만 번성합니다.
소년들은 이 정치체제가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맹신하고 충성을 다합니다. 얼핏 보면 한심한 이 소년들을 보며 제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죠. 이렇게 한심한 예는 물론 현실에도 넘쳐납니다. 그 중 하나는 15세기 말엽 중세유럽의 ‘스페니쉬 인퀴지션(Spanish Inquisition)’이라는 종교재판일 것입니다.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진정으로 했는지 그냥 개종한 척만 하고 계속 유대교를 신봉하는지를 ‘조사’한 것으로 유럽에서 크게 세 차례 그 조사가 있었는데, 그중 스페인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사를 ‘스페니쉬 인퀴지션’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자신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고발당한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이유) 유대인들은 조사관들에게 종교적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어도 증명할 길이 없었죠.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것이 고백 말고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말을 해도 조사관들이 믿지 않기로 하면 이들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고문과 화형이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이 해괴한 일이 당시에는 마녀와의 성전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유대교를 믿는 것이 뭐 어때서라고 비웃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 때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오래된 시체가 됐든, 있지도 않은 마녀가 되었든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는 누구에게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간에 그것(불구덩이, 친불주의, 숭불주의, 미제국주의자)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고 자신의 반대자들을 그 악의 일부로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키고자하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요.
덕택에 대중들은 있지도 않은 것과 싸우느라 정작 자신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권력자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랐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게 남들만의 모습일까요? 실체가 모호한 적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를 키우고 그것을 이용해 반대를 억누르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한국에선 없었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죠. 더욱 슬프게도 그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첫해를 장식하고 있는 ‘종북몰이’가 그것입니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북한과 공조해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9월 구속이 된 것을 시작으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반공의 굿판이 요란하게 시작했습니다. 법무부는 다음 달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하면서 뒤이었고 보수단체들은 통합진보당을 간첩소굴이라며 장단을 맞췄습니다.
통진당 뿐만이 아니죠. 한기총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종북주의자들, 단체 그리고 정당 등이 절대로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며 열변을 토해냈고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은 10월 10일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해 "종북, 친북세력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민들도 잘한다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며 남 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 의원 등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종북세력으로 매도했습니다.
11월 22일 박창신 신부가 시국미사를 통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자 조선일보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 신부’마저 ‘종북구현’ 사제단이라고 비꼬았죠. 뒤이어 검찰은 ‘박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거의 모든 국민이 종북인 셈입니다.
그럼 이들이 말하는 종북세력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논란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도 재판을 기다려야 하고 설사 유죄 판결을 받더라하더라도 그들이 종북인지 무엇인지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도대체 종북이 무엇인가요? 김일성을 욕하지 않으면 종북일까요? 김일성 욕은 하지만 북한의 핵을 막연히 부러워하면 종북인가요? 김일성도 싫고 북핵도 싫지만 외국군대가 없는 나라를 꿈꾸면 종북입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북한의 사상이나 체제에 얼마나 동조를 해야 종북인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들의 사상이 무엇이건 이들과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을 묶어 하나의 세력으로 본다는 것은 억지 내지는 무지일 뿐입니다. 이들 간에는 조직적 연계나 행동의 연대도 전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상적 접점도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종북이라는 말도 세력이라는 말도 아무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수사에 불과한 것이죠. 막연하게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오래 전 죽은 시체나 마녀의 존재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페니쉬 인퀴지션’의 광풍이 잦아진 것은 이성의 발달이 몰아치면서 부터였습니다. 종북의 광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부 정치인과 시민사회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이성을 촉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거꾸로 많은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허황된 정치공세를 벌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몰려있는 궁지의 깊이와 어둠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진정으로 했는지 그냥 개종한 척만 하고 계속 유대교를 신봉하는지를 ‘조사’한 것으로 유럽에서 크게 세 차례 그 조사가 있었는데, 그중 스페인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사를 ‘스페니쉬 인퀴지션’이라고 합니다.
권력의 도구, ‘두려움’
당시 유대인들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자신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고발당한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이유) 유대인들은 조사관들에게 종교적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어도 증명할 길이 없었죠.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것이 고백 말고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말을 해도 조사관들이 믿지 않기로 하면 이들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고문과 화형이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이 해괴한 일이 당시에는 마녀와의 성전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유대교를 믿는 것이 뭐 어때서라고 비웃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 때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오래된 시체가 됐든, 있지도 않은 마녀가 되었든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는 누구에게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간에 그것(불구덩이, 친불주의, 숭불주의, 미제국주의자)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고 자신의 반대자들을 그 악의 일부로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키고자하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요.
덕택에 대중들은 있지도 않은 것과 싸우느라 정작 자신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권력자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랐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게 남들만의 모습일까요? 실체가 모호한 적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를 키우고 그것을 이용해 반대를 억누르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한국에선 없었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죠. 더욱 슬프게도 그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종북인가
박근혜 정부의 첫해를 장식하고 있는 ‘종북몰이’가 그것입니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북한과 공조해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9월 구속이 된 것을 시작으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반공의 굿판이 요란하게 시작했습니다. 법무부는 다음 달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하면서 뒤이었고 보수단체들은 통합진보당을 간첩소굴이라며 장단을 맞췄습니다.
통진당 뿐만이 아니죠. 한기총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종북주의자들, 단체 그리고 정당 등이 절대로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며 열변을 토해냈고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은 10월 10일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해 "종북, 친북세력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민들도 잘한다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며 남 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 의원 등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종북세력으로 매도했습니다.
11월 22일 박창신 신부가 시국미사를 통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자 조선일보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 신부’마저 ‘종북구현’ 사제단이라고 비꼬았죠. 뒤이어 검찰은 ‘박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거의 모든 국민이 종북인 셈입니다.
정치적 궁지의 결과물, ‘종북’
그럼 이들이 말하는 종북세력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논란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도 재판을 기다려야 하고 설사 유죄 판결을 받더라하더라도 그들이 종북인지 무엇인지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도대체 종북이 무엇인가요? 김일성을 욕하지 않으면 종북일까요? 김일성 욕은 하지만 북한의 핵을 막연히 부러워하면 종북인가요? 김일성도 싫고 북핵도 싫지만 외국군대가 없는 나라를 꿈꾸면 종북입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북한의 사상이나 체제에 얼마나 동조를 해야 종북인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들의 사상이 무엇이건 이들과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을 묶어 하나의 세력으로 본다는 것은 억지 내지는 무지일 뿐입니다. 이들 간에는 조직적 연계나 행동의 연대도 전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상적 접점도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종북이라는 말도 세력이라는 말도 아무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수사에 불과한 것이죠. 막연하게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오래 전 죽은 시체나 마녀의 존재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페니쉬 인퀴지션’의 광풍이 잦아진 것은 이성의 발달이 몰아치면서 부터였습니다. 종북의 광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부 정치인과 시민사회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이성을 촉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거꾸로 많은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허황된 정치공세를 벌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몰려있는 궁지의 깊이와 어둠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Friday, October 30, 2009
[시론] 정치가 뭔가요? / 남태현
한겨레 기사등록: 2009-10-30 오후 08:42:5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047.html
어느 정치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정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죠. 전공 대학원 수업이니 학생들이 쉬 답을 알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보아하니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더 난처했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거의 매일 하는 우리가 정작 정치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정치하는 사람을 쉽게 찾기 힘듭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하면 큰일 나는 사람들이 대다수니, 도대체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지, 또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죠.
신문을 한번 뒤적여 보죠. 일단 보통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나(“정치투쟁 오염 교사, 교단에 설 자격 없다” <문화일보> 올 7월31일치), 노동자들은(“민노총, 정치투쟁보다 조합원 권익위해 일해야” <서울경제> 올 3월19일치, 신재민 차관 “언론노조 파업은 정치파업” <동아일보> 올 2월28일치) 정치를 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같습니다. 교수나 학생도(“교수이어 학생들도 정치로?” <중도일보> 2007년 7월17일치) 물론 마찬가지인 듯싶습니다. 국가 권력도 정치는 바람직한 것 같지 않습니다. 검찰은 물론 안 되겠지만(검 “박연차 수사 정치적 의도 없다” <파이낸셜뉴스> 올 4월1일치), 심지어 정치를 위해 모인 정당도 정치를 하면 안 되고(안상수 “민주, 정략적 정치투쟁 받아들일 수 없다” <머니투데이> 7월13일치).
그럼 도대체 정치는 누가 합니까? 정치가 뭔가요? 정치는 자신의 뜻을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고 행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 정치는 우리 주변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고, 교실에서도 선생님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므로 보통 우린 공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주로 논합니다. 그렇다면, 공적인 장에서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강을 파겠다고 맘을 먹고 그 지위가 주는 힘을 이용해 그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지요. 모두 다 정치를 하고 있는데, 정치를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 그렇다면 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이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 이유입니다.
“왜?”는 “누구?”를 보면 답이 나올 듯합니다. 정부나 기업들은 노동자가 정치하면 뭐라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적인 사람이 정치하면 그들이 선생님이건 노동자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난리고, 야당은 여당을 정치한다고 뭐라 하고 여당은 야당을 정치한다고 몰아붙이는 것이지요. 정치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정치적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난히 정치하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은 바로 정치적인 힘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도전 자체를 이런 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기들은 글 읽고 공부하느라고 평생을 놀고먹으면서, 일반 백성들이 글을 배우려면 근엄하게 꾸짖던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치가 소수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을 우린 오래 견뎠습니다. 오랜 왕정이 그러했고,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그의 육사 후배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하고픈 유혹은 민주주의가 와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국민 여러분,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행위는 당연한 권리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필요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047.html
어느 정치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정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죠. 전공 대학원 수업이니 학생들이 쉬 답을 알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보아하니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더 난처했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거의 매일 하는 우리가 정작 정치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정치하는 사람을 쉽게 찾기 힘듭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하면 큰일 나는 사람들이 대다수니, 도대체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지, 또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죠.
신문을 한번 뒤적여 보죠. 일단 보통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나(“정치투쟁 오염 교사, 교단에 설 자격 없다” <문화일보> 올 7월31일치), 노동자들은(“민노총, 정치투쟁보다 조합원 권익위해 일해야” <서울경제> 올 3월19일치, 신재민 차관 “언론노조 파업은 정치파업” <동아일보> 올 2월28일치) 정치를 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같습니다. 교수나 학생도(“교수이어 학생들도 정치로?” <중도일보> 2007년 7월17일치) 물론 마찬가지인 듯싶습니다. 국가 권력도 정치는 바람직한 것 같지 않습니다. 검찰은 물론 안 되겠지만(검 “박연차 수사 정치적 의도 없다” <파이낸셜뉴스> 올 4월1일치), 심지어 정치를 위해 모인 정당도 정치를 하면 안 되고(안상수 “민주, 정략적 정치투쟁 받아들일 수 없다” <머니투데이> 7월13일치).
그럼 도대체 정치는 누가 합니까? 정치가 뭔가요? 정치는 자신의 뜻을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고 행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 정치는 우리 주변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고, 교실에서도 선생님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므로 보통 우린 공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주로 논합니다. 그렇다면, 공적인 장에서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강을 파겠다고 맘을 먹고 그 지위가 주는 힘을 이용해 그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지요. 모두 다 정치를 하고 있는데, 정치를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 그렇다면 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이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 이유입니다.
“왜?”는 “누구?”를 보면 답이 나올 듯합니다. 정부나 기업들은 노동자가 정치하면 뭐라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적인 사람이 정치하면 그들이 선생님이건 노동자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난리고, 야당은 여당을 정치한다고 뭐라 하고 여당은 야당을 정치한다고 몰아붙이는 것이지요. 정치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정치적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난히 정치하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은 바로 정치적인 힘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도전 자체를 이런 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기들은 글 읽고 공부하느라고 평생을 놀고먹으면서, 일반 백성들이 글을 배우려면 근엄하게 꾸짖던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치가 소수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을 우린 오래 견뎠습니다. 오랜 왕정이 그러했고,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그의 육사 후배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하고픈 유혹은 민주주의가 와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국민 여러분,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행위는 당연한 권리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필요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Friday, September 11, 2009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한겨레 2009.9.11
최근 미국 정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에릭 홀더가 지난 부시 행정부의 중앙정보국이 불법 고문을 했는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지요. 조사 대상인 중앙정보국뿐 아니라, 보수파들은 이번 결정이 중앙정보국 요원들을 불안하게 해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면서 홀더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최근 드러나는 문서를 보면 정부의 고위층이 불법행위에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니, 이들의 반발이 이해도 갑니다. 한편으론 진보 진영도 이번 결정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고 있습니다. 홀더의 말대로 명백하게 고문을 한 수사관을 대상으로 조사를 할 경우 이를 실질적으로 지시한 고위층 지도자들은 면죄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이 흥미로운 것은 지난 정권의 흠을 들추는 것이 미덕이 아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마당에 그가 지명한 법무장관이 조사를 지시했다는 것이지요. 오바마 대통령의 가장 큰 공약 사항인 의료보험 개혁만으로도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 이번 일로 그는 국정 운영이 힘들어질까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번 일은 인치가 아닌 법치가 강조되는 미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미국의 법치가 완전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최근 부시나 닉슨의 예를 보면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미국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매번 그들은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회복했습니다. 닉슨의 불법행위는 오히려 의회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이런 법치 민주주의로의 회귀에는 눈을 크게 뜬 언론과 미국 시민들의 분노가 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지키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대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오랜 투쟁으로 마침내 1987년 민주주의는 얻어졌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어 하는 사이에 지난 두 정권이 쌓아둔 민주주의 업적이 퇴색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까? 언제 시민들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언제 힘 있는 사람들은 법 위에서 춤을 추고 있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 밑에 깔려 피를 흘리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혹시 지난 10여년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습관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민주주의가 왔고 그것을 위해 싸우던 분들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를 너무 쉽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분, 시민사회가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줄어드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러시아를 보십시오. 1990년대 혁명적인 정치변혁으로 얻어진 민주주의는 2000년대에 들어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도태된 지 오래입니다. 타이와 터키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시민사회에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백신과도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균을 몸에 넣어 저항력이 생기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의 도전도 그와 같아 우리들이 잠시 생각하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 값을 일깨워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기사등록 : 2009-09-11 오후 07:04:12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ERIES/60/376284.html
Monday, November 3, 2003
송두율의 '낯선' 색깔
남태현 [주장] 송두율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03.11.03 12:28 ㅣ최종 업데이트 03.11.03 14:1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51752&PAGE_CD=
난 송두율 교수를 모른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신문에 난 기사가 고작이다. 그의 철학이나 인생에 관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낯선 그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것은 그의 '경계인', 또는 '회색분자'라는 색깔 때문일 것이다. 회색.
서울시내는 유난히도 회색이 판을 치는 곳이다. 엉성한 길바닥 보도블록으로부터 시작해서 길모퉁이의 담, 높이는 고층빌딩 옥상까지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회색을 찾을 수 있다. 그나마 눈길은 멀리 가지도 못한다. 왜냐면 회색 공기에 가려 그나마 우리의 시야는 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질려서일까? 우리가 회색을 지독히도 경멸하는 것은?
서울시내가 그렇게 회색으로 덧칠이 된 곳이라면 그 안에 사람들은 원색으로 화려하다. 아닌 거 같은가? TV를 틀라. 거기엔 지역색을 번쩍거리는 정치인들이 즐비하다. 신문을 펴면 무슨 논설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의 파시즘의 핏빛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그렇게 색이 분명한 사람들이 멀리 있는 것만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전라도 출신의 며느리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부모님들, 교내에 장승만 세워 놓으면 목을 베어 버리는 극단적 종교 동아리들, 대학도 안 나온 사람에게 대통령을 줄 수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명문 고등학교 동창들, 외국 근로자를 멸시하는 공장 주인과 동료 근로자들, 후줄근한 옷차림의 손님을 무시하는 고급식당 종업원들 등등 모두가 색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 색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때는 보일 듯 말듯, 어떤 때는 너무나 확연한 그 색은 무엇인가? 눈이 따가운 그 색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속한 패거리의 색이다.
그래서 언뜻 처음에는 색이 구분이 안 가는 것이다. 본색은 혼자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 그 패거리가 조금만 모이기를 기다리라. 그러면 그 튀는 색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것이다.
이 패거리의 색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어서 여럿이 모이면 힘이 나게 마련이다. 여럿이 모일 수록 색이 점점 진해지고 더 당당해진다. 그러니 또 그런 패거리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색을 억지로 맞추어 모여들기도 한다.
그리곤 패거리에 있으면서 왠지 모를 묘한 안도감도 느낀다. 누군가와 하나가 된 듯한, 남들과는 비로소 선을 확실하게 그을 수 있을 거 같은 안심이 된다. 그 안도감이라는 것이 전혀 현실적인 근거 없는 것이 또한 아니다. 바로 그 패거리가 주는 현실적 이득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패거리로부터 표도 얻고, 종교적인 우월감과 사명감을 성취하며, 패거리들 덕에 승진도 하고 하다 못해 '꽁짜 술'이라도 얻어 마신다.
이런저런 이유로 패거리가 커 가면서 그 색을 뚜렷이 할 필요가 더욱 커진다. 패거리 스스로에게 뚜렷하고 구별이 되는 동질감을 심어줌으로 해서 패거리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야 한다. 그것 없이는 패거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색을 뚜렷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다른 패거리와 대립을 하는 것이다. 어떤 패거리의 위협이나 도전 또는 상대적인 발전이야말로 "우리" 패거리들에게 "우리"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그 패거리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쉬운 예는 프로야구장에 가보면 볼 수 있다. 응원을 하기 싫어도 내야에 않으면 응원을 해야 한다. 특히나 얼마 전처럼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면 그 응원은 더욱 현실적인 가치가 있고 응원에 참가하라는 유언무언의 압력은 더욱 커져만 간다.
참여하기 싫어도 일단 시작하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옆에서 그 응원의 물결에 참여하고 있는 않은 사람에게로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뻔히 같은 팀의 팬인데 응원을 안 하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노란색 또는 파란색 풍선을 든 손은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응원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색이 분명해 질수록 그들의 힘은 세어지게 마련. 자연히 응원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는 압력도 커져 간다. 이렇듯 패거리간의 다툼은 패거리끼리의 다툼보다는 흔히 각 패거리의 자기단속 또는 내적인 발전이 그 목표일 때가 더 많다.
이렇듯 패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경쟁을 하고 있는 저쪽 패거리가 아니다. 또한 패거리에 속하지 못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안달하는 개인들을 겁내지도 않는다. 패거리들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느 패거리에도 들지 않으려는 색이 없는 개인들이다. 이 개인들이야말로 패거리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서운 적이다.
패거리들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순한 색을 즐겨한다. 그 색은 패거리가 하는 일에 굳이 일일이 설명할 필요를 제거시켜준다. 뭐를 해도 자기 패거리가 하면 다 정당화되고 남의 패거리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마귀일 따름이다.
대중들은 어려운 논리보다는 그런 단순하고 간편한 색을 쫓아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속한 패거리를 비호한다. 왜 호남사람들이 나쁜가? 왜 유대인이 나쁜가? 비호남인에게나 나찌 치하의 독일인들에게는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머릿수 많고 힘이 센 패거리의 선명한 색이면 다른 패거리에게 가진 미움과 차별을 정당화 하기에 충분했다.
회색인들은 여기서 바로 질문을 던지고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왜 유대인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학대하고 죽이느냐고. 나찌 독일사람들에게 마땅한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인들의 질문은 나찌 독일인들에게는 대답을 요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나찌 독일인으로서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근거없는 미움을 바탕으로 한 정치집단에게 그 근거없음을 지적하는데 그보다 더한 위협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렇듯 패거리들은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존재적 질문을 가장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만 두지 못한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들에게 색을 덮어씌우던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제거해야만 한다.
송두율 교수의 죄도 다름 아닌 회색인이라는 사실인 듯 싶다. <한겨레> 10월 17일자에 따르면 송 교수를 조사중인 검찰이 지난 17일 "노동당 가입 등에 대해 송 교수가 확실히 반성을 하면 관용 조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정치국 후보위원 부분 등 주요 혐의점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과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한겨레> 2003년 10월 20일자)하고 법정구속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죄라는 게 무엇인가 궁금하다.
검찰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봐도 반성을 안한 게 그 죄인 듯 하다. 사실은 봐주려고 했는데, 반성문 대신 사과문 쓰고 그 사과문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구속이다? 어찌 보면 북쪽의 색을 확실히 털어 버리고 남쪽의 색을 완전히 덮어쓰지 않은 게 그렇게 괘씸한 것이다.
송두율 교수의 죄가 '괘씸죄'와 별 다름이 없음은 그의 죄목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의 죄라는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국가보안법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에 따라 송두율 교수의 죄라는 것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인권의 기준에서 본다면 많은 국제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많다. 법 자체가 정치적인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고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비난이 끊임이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법을 어긴 송 교수의 죄라는 것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단한 법적 기초 위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긴 이런 괘씸죄가 얼마나 혹독한 매를 부르는지 교무실 불려가서 억울한 김에 반성문 쓰기를 거부해본 중교등학생 때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반성문 못쓰겠다고 하면 보통 매의 강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선생님의 분노도 갑자기 그 수위가 높아진다. 그리고 애초에 잘못한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선생님에게 억울한 매를 맞으면서 생각들 할 법 한 것이지만 송두율 교수도 거꾸로 말하면 뭐 그리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큰일을 잘못 했다면, 뭐 예를 들어 군대를 동원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내란을 일으켰다면 검찰이 반성문 하나 잘 쓰면 봐주겠다고 하겠는가?
괘씸할는지도 모르겠다. 무수한 색이 서로 부딪히는 조그만 나라에서 그의 회색 빛깔이 아니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회색인이 필요하다. 패거리를 만들고 사람들을 꼬드겨서 패거리를 키우고 그 패거리를 동원해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을 명명백백 하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도, 그래서 패거리에 속한 사람들이, 그 집단이 근거 없는 미움과 부당한 이득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런 패거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질문이 필요하다.
매일 극한 대립과 어정쩡한 타협만 일삼는 이 사회에 회색분자 하나 끼워주자. 처넣고 조용히 시키기보다는 들어보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검찰이길 기원한다.
오마이뉴스 03.11.03 12:28 ㅣ최종 업데이트 03.11.03 14:1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51752&PAGE_CD=
난 송두율 교수를 모른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신문에 난 기사가 고작이다. 그의 철학이나 인생에 관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낯선 그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것은 그의 '경계인', 또는 '회색분자'라는 색깔 때문일 것이다. 회색.
서울시내는 유난히도 회색이 판을 치는 곳이다. 엉성한 길바닥 보도블록으로부터 시작해서 길모퉁이의 담, 높이는 고층빌딩 옥상까지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회색을 찾을 수 있다. 그나마 눈길은 멀리 가지도 못한다. 왜냐면 회색 공기에 가려 그나마 우리의 시야는 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질려서일까? 우리가 회색을 지독히도 경멸하는 것은?
서울시내가 그렇게 회색으로 덧칠이 된 곳이라면 그 안에 사람들은 원색으로 화려하다. 아닌 거 같은가? TV를 틀라. 거기엔 지역색을 번쩍거리는 정치인들이 즐비하다. 신문을 펴면 무슨 논설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의 파시즘의 핏빛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그렇게 색이 분명한 사람들이 멀리 있는 것만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전라도 출신의 며느리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부모님들, 교내에 장승만 세워 놓으면 목을 베어 버리는 극단적 종교 동아리들, 대학도 안 나온 사람에게 대통령을 줄 수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명문 고등학교 동창들, 외국 근로자를 멸시하는 공장 주인과 동료 근로자들, 후줄근한 옷차림의 손님을 무시하는 고급식당 종업원들 등등 모두가 색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 색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때는 보일 듯 말듯, 어떤 때는 너무나 확연한 그 색은 무엇인가? 눈이 따가운 그 색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속한 패거리의 색이다.
그래서 언뜻 처음에는 색이 구분이 안 가는 것이다. 본색은 혼자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 그 패거리가 조금만 모이기를 기다리라. 그러면 그 튀는 색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것이다.
이 패거리의 색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어서 여럿이 모이면 힘이 나게 마련이다. 여럿이 모일 수록 색이 점점 진해지고 더 당당해진다. 그러니 또 그런 패거리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색을 억지로 맞추어 모여들기도 한다.
그리곤 패거리에 있으면서 왠지 모를 묘한 안도감도 느낀다. 누군가와 하나가 된 듯한, 남들과는 비로소 선을 확실하게 그을 수 있을 거 같은 안심이 된다. 그 안도감이라는 것이 전혀 현실적인 근거 없는 것이 또한 아니다. 바로 그 패거리가 주는 현실적 이득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패거리로부터 표도 얻고, 종교적인 우월감과 사명감을 성취하며, 패거리들 덕에 승진도 하고 하다 못해 '꽁짜 술'이라도 얻어 마신다.
이런저런 이유로 패거리가 커 가면서 그 색을 뚜렷이 할 필요가 더욱 커진다. 패거리 스스로에게 뚜렷하고 구별이 되는 동질감을 심어줌으로 해서 패거리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야 한다. 그것 없이는 패거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색을 뚜렷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다른 패거리와 대립을 하는 것이다. 어떤 패거리의 위협이나 도전 또는 상대적인 발전이야말로 "우리" 패거리들에게 "우리"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그 패거리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쉬운 예는 프로야구장에 가보면 볼 수 있다. 응원을 하기 싫어도 내야에 않으면 응원을 해야 한다. 특히나 얼마 전처럼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면 그 응원은 더욱 현실적인 가치가 있고 응원에 참가하라는 유언무언의 압력은 더욱 커져만 간다.
참여하기 싫어도 일단 시작하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옆에서 그 응원의 물결에 참여하고 있는 않은 사람에게로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뻔히 같은 팀의 팬인데 응원을 안 하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노란색 또는 파란색 풍선을 든 손은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응원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색이 분명해 질수록 그들의 힘은 세어지게 마련. 자연히 응원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는 압력도 커져 간다. 이렇듯 패거리간의 다툼은 패거리끼리의 다툼보다는 흔히 각 패거리의 자기단속 또는 내적인 발전이 그 목표일 때가 더 많다.
이렇듯 패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경쟁을 하고 있는 저쪽 패거리가 아니다. 또한 패거리에 속하지 못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안달하는 개인들을 겁내지도 않는다. 패거리들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느 패거리에도 들지 않으려는 색이 없는 개인들이다. 이 개인들이야말로 패거리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서운 적이다.
패거리들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순한 색을 즐겨한다. 그 색은 패거리가 하는 일에 굳이 일일이 설명할 필요를 제거시켜준다. 뭐를 해도 자기 패거리가 하면 다 정당화되고 남의 패거리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마귀일 따름이다.
대중들은 어려운 논리보다는 그런 단순하고 간편한 색을 쫓아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속한 패거리를 비호한다. 왜 호남사람들이 나쁜가? 왜 유대인이 나쁜가? 비호남인에게나 나찌 치하의 독일인들에게는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머릿수 많고 힘이 센 패거리의 선명한 색이면 다른 패거리에게 가진 미움과 차별을 정당화 하기에 충분했다.
회색인들은 여기서 바로 질문을 던지고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왜 유대인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학대하고 죽이느냐고. 나찌 독일사람들에게 마땅한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인들의 질문은 나찌 독일인들에게는 대답을 요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나찌 독일인으로서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근거없는 미움을 바탕으로 한 정치집단에게 그 근거없음을 지적하는데 그보다 더한 위협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렇듯 패거리들은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존재적 질문을 가장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만 두지 못한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들에게 색을 덮어씌우던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제거해야만 한다.
송두율 교수의 죄도 다름 아닌 회색인이라는 사실인 듯 싶다. <한겨레> 10월 17일자에 따르면 송 교수를 조사중인 검찰이 지난 17일 "노동당 가입 등에 대해 송 교수가 확실히 반성을 하면 관용 조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정치국 후보위원 부분 등 주요 혐의점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과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한겨레> 2003년 10월 20일자)하고 법정구속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죄라는 게 무엇인가 궁금하다.
검찰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봐도 반성을 안한 게 그 죄인 듯 하다. 사실은 봐주려고 했는데, 반성문 대신 사과문 쓰고 그 사과문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구속이다? 어찌 보면 북쪽의 색을 확실히 털어 버리고 남쪽의 색을 완전히 덮어쓰지 않은 게 그렇게 괘씸한 것이다.
송두율 교수의 죄가 '괘씸죄'와 별 다름이 없음은 그의 죄목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의 죄라는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국가보안법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에 따라 송두율 교수의 죄라는 것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인권의 기준에서 본다면 많은 국제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많다. 법 자체가 정치적인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고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비난이 끊임이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법을 어긴 송 교수의 죄라는 것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단한 법적 기초 위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긴 이런 괘씸죄가 얼마나 혹독한 매를 부르는지 교무실 불려가서 억울한 김에 반성문 쓰기를 거부해본 중교등학생 때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반성문 못쓰겠다고 하면 보통 매의 강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선생님의 분노도 갑자기 그 수위가 높아진다. 그리고 애초에 잘못한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선생님에게 억울한 매를 맞으면서 생각들 할 법 한 것이지만 송두율 교수도 거꾸로 말하면 뭐 그리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큰일을 잘못 했다면, 뭐 예를 들어 군대를 동원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내란을 일으켰다면 검찰이 반성문 하나 잘 쓰면 봐주겠다고 하겠는가?
괘씸할는지도 모르겠다. 무수한 색이 서로 부딪히는 조그만 나라에서 그의 회색 빛깔이 아니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회색인이 필요하다. 패거리를 만들고 사람들을 꼬드겨서 패거리를 키우고 그 패거리를 동원해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을 명명백백 하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도, 그래서 패거리에 속한 사람들이, 그 집단이 근거 없는 미움과 부당한 이득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런 패거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질문이 필요하다.
매일 극한 대립과 어정쩡한 타협만 일삼는 이 사회에 회색분자 하나 끼워주자. 처넣고 조용히 시키기보다는 들어보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검찰이길 기원한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