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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2, 2019

[세상읽기]죽은 제갈량 일화가 떠오르는 이유

경향신문 2019.05.02

<삼국지>를 보면 당대 최고의 재상 제갈량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죽은 제갈량이 적이자 최고의 라이벌이던 사마의를 쫓아낸 일화죠.

오랜만에 들른 광화문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 건물에 걸린 독립운동가 초상화가 크기도 했지만 너무 현대적이고 세련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행사가 많았습니다. 100주년이어서 그랬겠지만, 민간 행사뿐 아니라 정부 주도 포럼, 전시회, 기념회 등이 열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녀상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황사처럼 전국을 강타했죠.

모든 사상은 한계를 갖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것은 한계가 더 도드라집니다. 정체성의 경계는 인위적이지만 결국 절대적이 되니까요.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민족’은 현대국가가 세워지며 생겼죠. 순수한 혈통은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환호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역사에 기대는 사상이다 보니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진보적 미래를 꿈꾸기에는 부족하죠.

그러니 정치판이 과거에 머무를수록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국민은 피곤합니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이 정부는 그릇된 과거를 타파하는 사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것에 집중하는 게 당연했죠. 덕분에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옳고 저쪽은 적폐라는 구분은 그렇게 그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어진 선은 정부를 옭아맸습니다. 적폐로 지목된 이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고, 배수진을 친 이들의 저항은 치열했죠. 과거에 대한 전투가 치열할 때 거리엔 촛불이 꺼졌습니다. 은행빚과 취업난이 그 거리를 채웠죠. 싸움이 힘들어질수록 쉬운 상대가 눈에 띄는 법. 100년 전 일본만큼 만만한 상대가 있을까요. 시선은 자꾸 과거로 가고 미래에서는 멀어졌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가졌던 과거청산의 소명은 이제 그 유효기간이 지난 듯합니다. 박근혜와 주변 인물들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 셈이죠. 이제 정치에 충실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첫째, 정치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총칼 없는 전쟁이죠. 갈등 당사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논의하는 공적 장입니다. 상대가 좋건 싫건 말이죠. 싫다고 배척하는, 내가 옳다고 외면하는 순간 정치의 영역은 좁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갈등의 당사자들은 주먹과 칼에 기댈 수도 있죠. 둘째, 정치적 미래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싸움을 과거로 몰아가도 판을 흔들어야 합니다. 불과 1년 전 평화가 있는 미래를 보여줬을 때 국민은 열광했죠. 남북평화가 중요한 미래이지만 그것뿐이라면 곤란합니다. 문재인 정부 탓만은 아니지만, 정권은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있습니다.

정치판에서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고 그 판마저 좁아지면서 싸움은 국민 사이로 파고든 형국입니다. 정치적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적 공간이 허약해집니다. 분노와 무시당했다는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 쉽죠. 이들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고함에 쉽게 동화해 정치세력화할 수 있습니다. 벌써 그런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태극기부대죠. 오는 토요일이면 태극기집회는 122차에 접어듭니다. 그들은 열정과 확신이 있습니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옵니다. 부산에서,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옵니다. 매주 오는 이도 많습니다. 사비를 털어 시위용 트럭을, 동지들 먹일 식사를 준비합니다. 명확한 비전도 갖고 있습니다. 맨주먹으로 정당을 꾸렸다는 자부심도 강합니다. 하지만 공존을,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보는 이들만큼은 철저하게 무시합니다. 무시당한 이들을 모아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죠. 브라질에서도, 독일에서도,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만 언제까지 예외일까요?

이런 와중에 자유한국당 해산 국민청원이 2일 현재 170만명에 육박한다니 걱정스럽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의 광기가 생각나는 것은 저뿐인가요? 대화와 설득은 좋아서가 아니라 대안이 없어 하는 겁니다. 하루빨리 정치를 복원해야 합니다. 미래에의 비전을 두고 싸워야 합니다.

죽은 박정희 손에 산 문재인이 실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Thursday, April 4, 2019

[세상읽기]국회에서 뭉개진 ‘합리적 의심’

경향신문 2019.04.04 

청문회장, 의원들 말투는 거칠고 언성은 높습니다. 긴 연설과 장황한 훈계 사이로 질문과 답변은 고춧가루처럼 뿌려질 뿐이죠. 위장 전입, 논문 표절, 탈세, 병역 면제, 부동산 투기 등이 드러나면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잘 몰랐다, 배우자가 했다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공수는 바뀌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욕하고 책임지라는 요구도 전형적입니다. 인재풀이 적다는 비판도 빠지질 않죠. 이렇게 식상한 연속극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청와대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냥 한국 지도층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문재인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망과 전문성을 고루 갖췄다는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부동산 의혹을 받았죠. 다운계약서 작성, 아파트 분양권 전매, 부동산 차명 거래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후보자는 처제 탓으로 돌렸고 송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막말 논란이 더해졌습니다. 한 예로 2016년 김종인 당시 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박근혜가 씹다 버린 껌”이라 했다고 논란이 됐죠.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김 후보자의 과거 발언이 문제 됐습니다. 이제 와서 북한 소행이라고 입장을 바꾼 데 대한 추궁이 있었습니다. “편향적 인식”, “친북주의자”, “북한 대변인”, “북한 통일전선부장 후보감” 등 야당 의원들의 원색적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김 후보자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의해 공격을 받아 침몰당했다는 것은 일관적인 입장이었다”고 해명했죠.

사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침몰 직후부터 나왔던 의혹 중 시원하게 풀린 게 거의 없죠. 우선 북한 어뢰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는 정부 설명은 너무 미흡합니다. 배 밑에 긁힌 자국, 깨끗한 절단면, 생존자들에게 고막 파열, 화상 등이 전무한 점 등은 폭발이 있었다면 설명하기 힘듭니다. 정부가 제시한 증거도 미덥지 않습니다. 기껏 찾은, 유일한 증거인 어뢰추진체에는 그 유명한 ‘1번’이라는 글씨가 선명해 논란이 됐죠. 여기서 나온, 폭발 과정에서 생겼다는 알루미늄 산화물은 침전으로 생긴 알루미늄 수화물임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억지로 공개한 CCTV 화면도 조작이고, TOD 화면에 나온 물체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즉 어뢰폭발이 있었는지, 그 증거는 있는지, 다른 원인은 없었는지, 아무 대답도 없는 게 정부의 설명 아닌 설명인 겁니다.

북한 어뢰가 아니면 뭐라는 소리냐고 짜증 낼 수도 있지만, 그 답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아닌, 정부가 내놓아야 합니다. 정부가 설마 거짓말을 했겠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크고 작은 범죄를 돌아보면 이는 그냥 희망 사항일 뿐임을 쉽게 알 수 있죠. 그 반대입니다. 그 많은 거짓과 전횡을 언제 다 되돌아볼까 오히려 걱정입니다. 물론 천안함 침몰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으로 46명의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최소한의 의심을 갖는 게 예의가 아닐까요. 더군다나 정치 엘리트들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청문회에서 그런 모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을 밝히고 거짓을 점검하는 대신 야유와 선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것도 색깔 공세를 펴가며 말이죠. 김 후보자도 자신의 의심이 합리적이었음을 주장하기보다 꼬리를 내리며 이에 동조한 셈이 됐죠.

우리 사회는 반공이 국교인 듯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북한이 범인이라는 믿음을 퍼뜨리고 입맛에 맞는 증거만 축복합니다. 반론과 의심은 불경이라며 처단하죠. 신자들은 멸공의 노래를 부르며 안도합니다. 그 축복 덕택에 우리는 제주도, 광주의 학살에 눈을 감았고 독재를, 그들의 고문과 살인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렇게 피를 불러온 “빨갱이” 딱지를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게 21세기 한국입니다. 그러니 태극기부대가, 박근혜를 향한 그들의 애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공산주의가 몰락한 게 1990년대 초이지만 여의도는 1950년대 초에 아직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그런 국회에 미래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그냥 국민의 생떼가 아닐까요. 그러면, 그 미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그 국회는 왜 있는 걸까요. 그 대답을 위해서라도 국회는, 정부는 천안함 침몰에 대한, 과거 정부의 대응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합니다.

Thursday, October 25, 2018

[세상읽기]트럼프의 ‘승인’ 발언에 대한 씁쓸한 반응

경향신문 2018.10.18

2013년 당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직접 관여를 했습니다. 보잉사 F-15SE로 거의 기울었던 결정을 뒤엎었죠. 경쟁 기종보다 기술 이전, 가격 면에서 모두 뒤진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는 “정무적 결정”이라며 록히드 마틴사의 F-35A를 밀어붙였습니다. 7조원이나 쓸 사업을 이렇게 가볍게 처리해도 되나 싶었죠. 그 의문은 올해 조금 풀렸습니다. 김관진이 록히드마틴사와 연관된 로비업체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났죠. 무기 사업은 역시 복마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복마전의 정말 큰손은 미국입니다. 유럽 전투기는 유독 한국 시장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습니다. 미국 주요 동맹국인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독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유럽산 전투기와 미국 제품을 동시에 사용하죠. 우린 사실상 100% 미국에 의존합니다. 게다가 한국의 미국 무기 쏠림은 전투기뿐 아닙니다. 액수로만 따지면 90%를 미국에서 사들이고 있죠. 기술 이전은 미미하고 품질 시비도 심심하면 터져 나와도 말입니다.

이 묘한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여럿이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주술은 한·미동맹입니다. 미군과 전략적 공조를 이루어야 하니 미국 무기를 쓰는 게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다른 미 동맹국은 그렇지 않은데 왜 한국만 그럴까.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말이 동맹이지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기대고 질질 끌려다니는 게 현실입니다. 군사를 부리는 권한은 한 국가의 고유 권한이자 국가라는 개념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전권은 이미 1950년 미국으로 넘겼고 전쟁이 끝나도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1994년, 겨우 반만 돌려받았죠. 하지만 전쟁이 나면 한국군은 아직도 미군 지휘를 받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논란에도 미국 무기를 묵묵히 사대고, 범죄를 저지른 미군을 조용히 내보내는 게 오히려 당연하죠. 온전한 국가는 아닌 셈입니다.

그래서 트럼프의 승인 논란이 더욱 씁쓸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조치’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우리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거푸 강조했습니다. 트럼프의 평소 태도를 보면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리가 났죠. 그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한편에서는 미국 심기를 건드렸다며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승인 발언은 외교적 결례지만, 정부가 자초한 측면도 크다”며 화살을 미국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로 돌렸죠. 한국당 의원들은 비슷한 성토를 토해냈습니다. 보수당이라면 한 나라의 전통과 민족주의를 중요시하는 게 보통이죠. 그런 정당이라면 성조기를 흔드는 대신 트럼프 발언에 분노를 표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당은 그 정체성이 극우와 종미 사이를 오가니 그런 반응이 무리였다고 할까요.

더불어민주당 쪽에서는 승인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데 초점을 모았습니다. “부적절했다”(심재권 의원), “적절치 않다”(송영길 의원). 정의당 대표 이정미 의원은 “국민에 대한 모욕” “외교적 갑질”이라며 비판의 수위를 최고조로 올렸죠. 하지만 이들도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아무도 미국이 한국 외교, 군사, 안보에 비정상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에 대한 모욕은 트럼프가 어떤 단어를 써서가 아니라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현실임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그 현실을 바꾸려 시도조차 않는 자신들 행태가 더 큰 모독임을 감히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문제든 해결의 시작은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한국의 꼬인 외교를 푸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주권국가라면 할 수 있는 게 우리에겐 너무 모자란, 차가운 현실이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사태를 바닥으로 몰고 간 것도, 그것 말고는 별로 할 게 없어서인 측면이 크죠. 사태를 호전시킬 방도가 마땅치 않으니 호통치고 겁박할 수밖에요. 그만큼 문재인 정부의 노력은 한국시리즈 7차전 9회 말 전력투구입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다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그 노력에 행운이 곁들여져 결실이 하루빨리 나길 고대합니다. 그래서 정상 국가로 한 걸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길 희망합니다. 그 걸음에 딴지를 거는 목소리가 한국 안에서만큼은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Thursday, June 28, 2018

[세상읽기]대통령만 바라보는 시민들에게

경향신문(2018.06.28)

2011년 사극 <뿌리 깊은 나무>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석규가 오랜만에 티브이에 출연해서 관심을 끌었죠. 팬으로서 침체기에 있던 배우가 걱정이었지만 이는 한낱 기우였습니다. 드라마는 세종과 밀본이라는 비밀조직의 다툼을 그렸습니다. 양측은 정반대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추구했죠.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밀본은 정도전의 뜻에 따라 왕이 아닌,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습니다.

실제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군주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고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재상은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을” 임무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능력 없는 이도 임금이 될 수 있으니 능력 위주의 관료가 중심에 서야 한다는 지적이죠.

드라마고, 왕조시대 이야기지만 밀본의 걱정은 오늘날 정치와도 무관치 않습니다. 정치 안정을 한 개인에게 기댈 수 없다는, 그래서 다수가, 민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 국가의 통치, 특히 민주주의와 닿는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점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먼저 북핵 문제를 보면 개인의 영향력이 도드라집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평창 올림픽을 거쳐 남북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렸습니다. 내부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관료들을 제쳐놓고 김여정 부부장, 김영철 부위원장 등 소수의 최측근을 통해 거침없이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죠. 더 특이한 것은 미국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특사를 만나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의 초청을 수락했습니다. 북·미 협상도 국무부는 쏙 빼놓은 채 최측근인 폼페이오 당시 중앙정보부 국장과 트위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의 걱정과 반대도 완전히 무시했죠. 개인 치적과 자존심을 앞세운 트럼프에 의해 지난 반세기를 이어온 대북 정책이 뒤집힌 것입니다.

김정은과 트럼프라는 개인이 주도하는 협상이었던 만큼 일 처리가 KTX처럼 빨랐습니다. 하지만 신속했던 만큼 구체적 성과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웃는 얼굴로 악수했지만, 비핵화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 확인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느 하나도 구체적으로 결정난 것이 없죠. 게다가 두 지도자의 추진력이 주요했던 만큼 둘 중 하나라도, 무슨 이유에서든, 마음만 돌아서면 상황은 쉽게 악화할 수 있습니다. 북·미 협상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입니다.

다행히도 한국이라는 중재자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두 지도자와는 달리 정부를 십분 활용하고 민심을 추스르며 남북 문제를 추진하고 있죠. 불안한 북·미 협상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정치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설마설마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월세 내는 날이 또박또박 오듯 예견된 결과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능숙한 외교를 통해 전에 없던 남북 간 평화를 끌어냈고, 70%를 오가는 지지를 받아왔죠. 자연히 민주당은 문재인마케팅에 올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에 기대기는 민주당뿐 아닙니다. 시민도 대통령만 바라보는 형국입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그 한 예죠. 이는 불통의 아이콘이던 박근혜의 추억을 지우기 위한 방책이었을 겁니다. 덕택에 막힌 하수구가 뚫린 듯 청원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종편방송 허가 취소, 용의자 처벌 등 대통령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일마저 요구합니다. 권력은 나누어져 있고 법과 제도가 있지만, 시민은 대통령이 봐주고 처리해주길 바라는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잘해서 인기도 얻고 국정운영도 잘되고 남북 문제도 잘 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 업적도 쉽게 무너질 수 있죠. 그 여파가 국내정치에 그치지 않고 남·북·미관계에 여파가 미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박근혜에게 환호하며 올인했던 보수의 꼴이 보수만의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21세기, 아직도 덕이 많은 군주 덕에 태평성대가 오고, 폭군 때문에 난세가 오는 중세에 사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Monday, May 21, 2018

[세상읽기]이 땅에서 걷어내야 할, 질기고 오래된 ‘공포’

경향신문(2018.05.03) 

“완벽한 군인이다. 늘 용감하고, 잠들지 않으며, 적을 놓치지 않는다.” 로봇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인 지뢰를 평한 말이죠. 이렇게 효과적인 무기가 또 저렴하기까지 합니다. 지뢰 하나를 생산, 설치하는 데 싸게는 3달러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적은 다리를 잃고 목숨마저 잃을 수 있습니다. 인기가 있을 수밖에요. 196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 1억개가 넘는 지뢰가 설치되어왔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뢰의 공포는 전쟁이 끝나도 쉬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죠. 숨겨진 지뢰 제거에는 하나에 300달러에서 1000달러나 듭니다. 비용이 많이 드니 뒷전으로 밀리기 쉽고, 이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커집니다. 밭을 일구다, 공을 차다 지뢰를 밟는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개인과 가정의 비극임은 물론 경제 개발에 큰 걸림돌이기도 하죠. 지뢰 제거는 그래서 인권의 문제이자 사회 발전의 당면 과제이기도 합니다.


한번 심어 놓으면 제거하기 힘든 것은 지뢰뿐 아닙니다. 비 올 때마다 한 뼘씩 솟아나는 대나무도 있고, 날마다 뿜어져 나오는 공장 굴뚝의 검은 연기도 있죠. 공포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 공포의 근원에는 좌우 대립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친일 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몰락의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군정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빨갱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부활하죠. 그 공포는 신앙이고 복음이었습니다. 사활이 달린 문제였으니 필사적으로 전파했죠. 한국전쟁으로 정권을 거의 잃을 뻔했던 이들은 자신도 공포를 마음 깊이 심었습니다. 그 공포가 깊어질수록 미국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갔죠.


그래서 이들은 공화당, 민정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바꿨지만, 친미, 반공 말고는 별 사상적 기반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죠. 그 공포만 지키면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공포 장사는 또 얼마나 쉬웠던가요. 북한은 간간이 도발을 해주었고 필요하면 간첩사건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몸서리 치며 입을 닫고 눈을 감았습니다. 유럽에서도 북한 식당 들어가기 겁이 났고, 온라인에서도 종북이란 딱지가 붙을까 눈치를 봤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K팝이 전 세계를 흔들어도 공포는 그렇게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해방부터 이제껏 공포로 연명해온 자유한국당 대표의 최근 발언들은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위장평화쇼” “주사파들이 남북관계를 보는 눈”이라는 독설을 이어갔죠. ‘비핵화 논의’가 안되면 무의미하다며 투정부리다 논의가 되자 ‘북핵 폐기’가 아니라 소용없다며 생떼도 썼습니다. 극우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의 정치쇼일 수도 있고 민심을 못 읽는 무능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웃을 수만은 없죠. 우리 모두의 공포를 대변하는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그 공포를 걷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촛불집회에서, 미투 운동을 통해서 공포를 극복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용기와 연대가 당장 해결책은 아니지만, 괴물에 대한 공포만큼은 이기게 해준다는 경험을 말이죠. 공포가 없어지면 괴물도 허수아비일 뿐임도 수의를 입은 전직 대통령을 통해 보았습니다.


남북 문제의 절반은 우리 마음속의 공포입니다. 그러니 용기와 남북 연대만 되살릴 수 있다면 문제는 뜻밖에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이 더더욱 성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 용기를, 그리고 연대에의 희망을 주었으니까요. 갈 길은 멀고 험합니다. 실패와 실망에도 대비해야죠. 하지만 ‘빨갱이에 대한 공포’를 걷어낸 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그 질기고 오래된 공포를 없애는 참에 지뢰도 제거해야겠죠. 한반도에는 100만개도 넘는 지뢰가 묻혀있다고 알려졌습니다. 휴전선 지뢰 제거는 꼭 필요한 일이고 남북 간의 연대가 필수적입니다. 남과 북이 더 가까워지고 휴전선 일대가 진정한 평화의 영토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죠. 공포와 지뢰가 없어진 그 땅 너머로 우리의 아이들이 농구공을 주고받고 웃음을 이어갈 미래가 기다려집니다.

Thursday, February 1, 2018

[세상읽기]내각제가 ‘촛불혁명’에 걸맞은 이유

경향신문(2018.02.01)

개헌 논의를 이어 가보겠습니다. 지난 칼럼을 통해 분권형 대통령제에서 분권이 힘들 수 있다고 지적했죠. 더불어 논의되는 내각제는 여론조사에서 늘 꼴찌입니다. 촛불혁명의 의미를 고려할 때 내각제가 가장 알맞은 정부 형태임을 보면 이 또한 정치의 아이러니라 할까요.

2013년 체코의 네차스 총리가 사임했습니다. 임기를 마친 게 아니라 논란에 휩싸여 더 이상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죠. 최측근들이 군 정보국에 이혼 중에 있던 총리 부인을 감시하라고 명령했고 거액의 뇌물수수 등 전횡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의회 해산, 총선이 이어졌고 야당이 승리하며 정권교체가 재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네차스 정부의 전횡은 박근혜 집단에 비하면 그 규모나 죄질이 동네 길고양이 수준이었지만 말이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보가 기가 막힌 지는 참 오래됐었습니다. 정당성에 대한 의심은 대선이 채 치러지기 전에 시작됐죠. 언론 통제 등 권력 남용이 뻔히 지속됐습니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고 한탄과 눈물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JTBC에서 ‘최순실 태블릿피시’가 발견되기까지, 박근혜는 끄떡없었습니다. 그러고도 박근혜는 끝까지 버텼습니다. 100만의 인파가 차가운 광장을 뜨겁게 달구고서야 정치권이 간신히 움직였죠. 한국 민주제도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도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죠.

그 짓거리를 하고도 그렇게 오래 버텼다는 게 한계입니다. 이르면 대선의 정당성이 의심됐을 때, 늦어도 세월호 참사 때는 정부를 갈아치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헌법은 대통령의 5년 임기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근혜는 버틸 수 있었고, 버텼기에 국정은 망가져 버렸습니다. 현 제도하에서 대통령은 마치 수능을 끝낸 학생과 비슷합니다. 시험이 없으면 공부할 맛이 안 나죠. 이미 권력의 정점에 와있고 더 이상 선거 걱정도 없는 정치인, 즉 대통령도 남 눈치 볼 이유가 없습니다. 최고 권력자도 국민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의원내각제에는 있습니다. 체코 총리가 스스로 물러난 구조적 배경은 민-의회-정부-총리, 이렇게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권력 구도였습니다. 유권자는 정당에 투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석수를 나눕니다. 다수당이 정부를 구성하고 그 당의 리더가 정부 수반이 됩니다. 여기에 유럽식 선거법을 더하면 다당제 의회가 보통이 되죠. 자연히 한 정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정당연합을 꾸려 다수를 만들면 정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합을 이룬 정당들의 끊임없는 타협과 양보는 필수적이죠. 정부는 의회의 과반을 등에 업고 있으니 일하기도 쉽습니다.

반대로 의회의 신임을 잃으면 정부는 무너지게 됩니다. 물론 총리도 마찬가지죠. 자리를 잃는 것은 간단합니다. 의회가 불신임안을 처리하면 됩니다. 보통 때라면 힘들지만 민심이 싸늘해지면 사정은 돌변합니다. 야당은 불신임안을 처리하자고 목청을 높이고, 여당 측에서도 눈치를 살피다 등을 돌리는 일이 생기죠. 즉 정부와 총리의 해고 가능성이 실존합니다. 아무리 권력의 정점에 있는 총리라도 내각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원내각제가 좋지만 우리 정당의 행태를 보면 아직 안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는 앞뒤가 바뀐 지적일지도 모릅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살아남은 지금의 정당을 바라보고 하는 소리니까요. 제도를 바꾸면 정당들은 빠르게 탈바꿈할 겁니다. 반대로 정당이 지금 같으면 4년 중임제를 해도 대통령에게 끌려다닐 테니까요. 우리 헌정사에서 대통령제를 도입한 이는 이승만과 박정희입니다. 특히 박정희는 쿠데타로 의원내각제 정부의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죠. 박정희가 파괴한 민주주의의 꿈을 되살릴 때가 왔습니다. 다양한 생각이 경쟁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성장한 정당들이 권력을 갖고 제왕이 아니라 인민의 편에 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 촛불혁명에 맞는 이유입니다.

2012년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책임제가 훨씬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대부분 나라들이 내각책임제를 하고 있다”고 한 당시 문재인 후보의 말을 문재인 대통령이 잊지 않았길 바랍니다.

Thursday, December 7, 2017

[세상읽기]분권형 대통령제엔 분권이 없다

경향신문 2017.12.07

지난 11월 국회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투표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도 11월 말 논의를 시작했죠. 일정이 빠듯하지만, 개헌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커녕 특위 내 논의마저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개헌의 주요 주제인 정부 형태는 정치 전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기본적 이해조차 부족하죠. 어떤 형태가 있는지, 그 효과는 어떤지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 국민투표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과 5년 단임으로 요약할 수 있는 현 체제의 수명이 다했다는 공감은 있습니다. 재선 걱정이 없는 대통령이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도 막기 힘들다는 것을 박근혜가 몸소 보여줬죠. 문제는 대안입니다. 지난 대선 전 문재인 후보는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제시했고 안철수 후보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했습니다. 홍준표 후보는 이 둘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주장했죠. 문재인 대통령의 복안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권형 대통령제의 면모를 포함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분권형 대통령제가 개헌 후 정부 형태의 큰 뼈대가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원집정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 제도의 핵심은 국민이 직접 선거하는 대통령의 존재,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의회에 책임을 지는 총리와 정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정부 권력을 대통령과 총리가 나누고 동시에 의회의 행정부 견제를 강화할 길을 열어 놓았죠. 흔히 대통령은 국가원수직과 외교·안보·국방 정책 등을 담당하며, 총리는 내정을 맡는 형태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온전히 맞지도 않습니다.

우선 분권이라는 말이 문제입니다. 이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를 보면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배분은 정치적 배분이지 헌법적 강제력은 거의 없으니까요. 정치적 사정에 따라 분권이 일어나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죠. 여당이 총선에서 패하면 분권이 가능합니다. 우선 대통령의 총리 지명이 야당 주도의 의회에서 통과가 안됩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의회를 장악한 야당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요. 복잡한 정치적 타협이 이어지고 이에 따라 행정부 권한도 나눠집니다. 하지만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대통령이 되고 그 여당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는 경우, 대통령은 자기 수하를 총리로 지명하고 의회는 이를 수용합니다. 그러면 대통령은 행정부를 오롯이 지휘하고 의회마저 휘두를 수 있습니다. 분권은커녕 거의 독재에 가까운 대통령이 나올 수 있죠. 오늘날 러시아는 좋은 예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총리를 압도하는, 제왕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즉 분권형 대통령제는 분권을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 반대죠. 그러므로 대통령 권력을 축소한다는 오늘날 한국의 시대 요구와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은 오늘날과 비슷한 정부 형태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되고 있습니다(67조 1항). 정부를 주도하는 총리 또한 존재합니다. 그리고 총리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점도 명시돼 있습니다(86조). 국회가 총리 해임을 할 수는 없지만 건의할 수는 있습니다(63조). 즉 최소한 제도적으로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우리는 이미 갖고 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현 제도로도 정치적 조건만 맞으면 분권은 가능합니다. 실제로 김종필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의 대주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후보 시절부터 ‘책임총리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죠.

결론적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은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데 맞지 않고 굳이 필요치도 않습니다. 이를 대단한 개혁인 양 말하는 것이 의아할 수밖에요. 의아함과 의심을 해소할 활발한 개헌 논의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Thursday, September 28, 2017

개헌 생각 01)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개헌 논의가 심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권력형태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죠.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개헌의 이런 저런 면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현제도의 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권력을 의회에서 선출하는 총리가 나누는 제도죠. 1958년 프랑스 드골이 들고나온 5공화국 제도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요.

‘분권형 대통령제’(semi-presidential government) 논의 선구자인 뒤베르제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2.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이걸 좀 더 살을 붙이면: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대통령이 직접 선출됐으니 허수아비가 아니다)
2. 둘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허수아비가 아닐 뿐 아니라 강력한 권한을 지닌다)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전적으로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행정부 권한을 총리와 나눈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총리를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다만 의회의 지지가 필요하죠. 분권형 대통령제는 이름이 암시하듯 행정부 권력을 대통령과 총리가 나누는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대통령은 국가 원수직과 이른바 외치 영역에 해당하는 외교·안보·국방 정책 등을 담당하며, 총리는 내정과 관련된 그 나머지 정책들을 모두 맡는 형태를 생각하지만, 그것도 정치적 배분이지 법적 강제력은 없습니다.

권력의 분배가 제도적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보니 분권이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대통령이 되고 그 대통령의 정당이 의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죠. 대통령은 자기 수하를 총리로 임명할 테고 의회는 당연히 임명안을 통과할 겁니다. 나랏일, 정부 운영, 의회 활동까지 그 카리스마적 리더가 다 챙길 수 있죠.

한 극단적 예를 들자면 러시아가 좋겠습니다. 현재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이 잠시 총리로 물러나 있을 때 메드베데프 대통령(현재 총리)이 실권을 행사하려다 큰 코를 다쳤죠. 반대로 푸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총리를 압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권력분배가 별 의미가 없죠. 푸틴의 정당, United Russia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떡 주무르듯 합니다.

이런 상황은 사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도의 창안자인 프랑스의 드골이라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면 고안한 제도니까요. 드골은 2차대전 이후 4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받아들이자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후 정치위기가 이어지면서 공화국은 결국 붕괴했고 드골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5공화국 건설을 주도했습니다. 즉 권력을 나누기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 반대죠. (프랑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권한도 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비롯한 비슷한 사정의 구소련 나라들이 이 제도를 선호한 겁니다.

다른 극단적 예는 프랑스처럼 대통령의 정당이 총선에서 지는 경우입니다. 대통령이 임명은 하지만 의회에서 승인이 안 되니 울고 겨자 먹기로 야당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권력을 실제로 나누죠.

한국 내에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여기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앞서 살펴본 대로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개헌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공산이 크다는 점입니다. 드골처럼 제왕적으로 될 수도 있고 푸틴처럼 독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총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정치적 현실에 따라 그 독립성의 크기는 왔다 갔다 합니다. 다당제 도입, 대통령과 총리 간 협의의 제도화 등 보안책을 제시하지만 기본 틀을 바꾸기엔 역부족(협의 제도화)이거나 상관없어(다당제) 보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얼마만큼 변화를 줄까 하는 점을 고려해 보죠. 앞서 살펴본 분권형 대통령제의 정의를 또 한 번 들춰보겠습니다.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제67조 ①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2. 둘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외교(73조), 국군 통수(74조), 대통령령(75조)과 그 외 법률 효력의 명령 발동 (76조), 계엄 선포(77조), 공무원 임명(78조), 사면 복권(79조) 등등 광범위한 권위 보장.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전적으로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63조 ①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제65조 ①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행정 각부의 장·헌법재판소 재판관·법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감사원장·감사위원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쉽게 말해 처음 두 사항은 현재 헌법이 이미 충족하고 있습니다. 즉 국민 직접 뽑는 대통령(조건 1)이 실권이 있죠(조건 2). 조건 3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일단 총리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총리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점도 명시돼 있죠. 국회가 총리 해임할 수는 없지만 건의할 수는 있습니다. 총리 임명과 해임에 의회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봐야죠. (문재인 정부 첫 총리로 이낙연 총리 인준이 통과됐지만, 간신히 됐습니다. 하지만 이전 정부에는 낙마의 쓴 잔을 본 후보도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도 분권형 대통령제를 이미 갖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권력의 분립이 안 되니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는 제도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에 가깝습니다. 즉 한국에서도 정치적 타협만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는 가능하다는 말이죠.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정부의 대주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예를 곱씹어 볼 만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총리도 그 예로 거론됩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후보 시절부터 '책임총리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죠.

분권형 대통령제는 개헌이 굳이 필요치 않으니 개헌 논의의 한 대안으로는 적합지 않습니다.

Friday, July 14, 2017

[세상읽기]광주·세월호에서 보존할 기억 찾기

경향신문 (2017.07.13)

‘광주사태’를 쉬쉬하던 시대에 자라난 저는 우연히 눈에 띈 ‘금서’를 보고 광주의 1980년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 충격적 상흔이 광주시민 가슴에 아직도 절절히 박혀있음을 알게 되기까지 또 많은 시간이 흘렀죠.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이번 여름,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전남도청을 찾았습니다.

광장 앞에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둘러진 테이블과 몇몇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끝에 계신 한 분에게 도청에 관해 여쭤보고 탄원서에 서명했습니다. 계엄군을 상대로 승산은 없지만, 마지막 저항을 벌인 바로 그곳에서 고작 이름과 주소를 적어놓고 뒤돌아서려니 새삼 죄송스럽더군요. 인사를 드린 뒤 멀어져가는 저를 그분이 따라오셨습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손을 내미셨죠. 자그마한 핀과 5·18민주화운동 안내 책자를 건네며 멀리서 온 사람에게 줄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삼일빌딩 앞에서 총을 맞았다며 총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며 멋쩍어하셨죠. 미안하다는 말에, 또 그 멋쩍어하는 얼굴에 터지는 울음을 참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약간은 더운 평일 아침이었습니다. 텅 빈 광장이었지만 혼자는 아닌 듯했습니다.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는 상투적 표현 말고는 달리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죠. 그 함성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 그래서 편안히 살아버린 저의 부채의식만큼이나 크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도청은 깔끔한 ‘아시아문화전당’이 돼 있었습니다. 1980년의 기억을 찾는 저에게 직원은 옆에 있는 기념관으로 가보라고 친절하게 알려줬죠. 그제야 도청을 둘러싼 논란이 기억났습니다. 2008년 시작한 문화전당 공사 탓에 항쟁의 흔적이 훼손되거나 사라져 반발이 심했고 논쟁은 아직 진행형이라는….

광주의 비극은 1980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과 그 부하들은 오랫동안 굴종과 망각을 강제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헐뜯으며 그 장단에 춤을 추었죠. 전라도 출신이어서 승진에 밀리고, 결혼도 못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북한이 사주했다는 악담도 서슴지 않죠. 민주주의를 피와 몸으로 외친 광주 시민들로서는 어처구니없을 수밖에요.

한국 민주주의는 박근혜 정권을 끝내며 재도약할 채비를 하고 있지만 이를 가능케 한 전남도청은 제 모습을 찾지 못한 채 남겨져 있습니다. 다행히도 문재인 대통령이 복원을 약속했지만, 복원의 정도와 비용, 기존 시설 이전 등 문제와 도전 과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약속, 광주 유가족의 염원으로는 부족한 게 현실이죠. 전 국민의 성원이 필요합니다.

전 국민의 성원과 관심은 뉴욕 9·11 박물관을 가능케 했습니다. 정부와 유족, 전문가 사이에 오랜 대화 끝에 들어선 박물관은 참담했던 비극만큼이나 인상적이죠. 부서진 무역센터가 있던 그 자리에 들어선 박물관에는 휘어진 철근, 부서진 계단, 불타버린 소방차 등 건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습니다. 뉴스, 소방관 교신, 희생자에 대한 추억 등도 잘 전시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저리게 합니다. 꼼꼼히 보지 않아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면 그날 느꼈던 충격과 슬픔이 온전히 떠오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 투쟁을 광주는 1980년에 외롭게, 피를 흘리며 해냈습니다. 그 의로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가족과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전문가와 광주 시민의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처절한 기억이 생생히 보존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광주를 지나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은 무엇인가. 광주처럼 지켜야 할 아픔은 무엇인가. 광주처럼 잊고 있는 것은 없는가. 저는 세월호가 그 시작이길 소망합니다. 선체와 유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늘, 기억과 슬픔이 아직 생생한 오늘, 우리는 세월호가 어디서 어떻게 기억돼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수습과 조사가 끝나는 대로 그 기억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우리 손자, 손녀에게 이 아픔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읽기]문재인 정부 갈 길, 민의가 나침반


경향신문 (2017.06.15)

늘 그렇듯 이번 정부 인사청문회도 요란합니다. 비난과 고성이 오가고 사과와 변명이 따릅니다. 지지율이 14%인 제1 야당 대표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위장협치’ ‘독선’을 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죠. 하지만 야당의 고함이 큰 것과는 달리 여론은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가 80% 안팎에 이르고 있죠. 아주 드문 일입니다. 논란이 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임명에 찬성이 62.1%로 반대 의견 30.4%에 두 배가 넘었습니다. 대통령의 임명강행을 주문하는 의견도 과반 이상이죠. 민의가 어디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 민주체제라는 가정을 놓고 보면 야당의 법석 떠는 모습은 이상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이 기이한 풍경이 그렇게 낯설지도 않죠. 민의를 거스르는 자유한국당의 전통은 아주 오래된 탓입니다. 박근혜가 2012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한나라당이었고, 이는 이회창이 1997년 15대 대선을 준비하며 꾸린 정당이었습니다. 그 전신인 신한국당은 1995년 김영삼이 당내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바꾼 이름이었고 그 전에는 민주자유당이었죠. 민자당은 1990년 3당 합당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핵심인 민주정의당은 전두환의 정당으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공화당은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군부 세력이 구 자유당 세력, 일부 시민사회단체를 흡수해 1963년 창당했죠.

굳이 독재와 총칼의 과거를 들추지 않아도 됩니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의 염원을 뿌리치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4대강 사업을 강행했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병적 독단과 저열한 음모로 헌법을 짓밟았습니다. 그의 정치보복은 정치세력을 넘어 문화예술인까지 무자비하게 짓밟았죠. 그 탓에 지지도가 4%까지 내려간 박근혜를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하겠다는 신념 하나”뿐이라며 감싼 이가 바로 자유한국당의 정우택 원내대표입니다.

억압과 의전에 익숙해져 온 사람들에게 민의는 다만 어르고 다스려야 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르죠. 민의를 듣고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듯합니다. 그러니 협치는 언감생심 꿈도 꾼 적이 없을 테죠. 여의도로 입성하는 첫날 한강 중간쯤에서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1961년 한강 다리를 건넜을 때, 또는 1950년 인도교 폭파 때 이미 버렸을지도 모르죠.

2009년 이상적이고 젊은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게다가 첫 흑인 대통령이었으니 여러 소외계층의 기대가 컸죠.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 또한 정권 초기 협치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의료보험 개혁에 상당한 공을 들였죠. 야당이 된 공화당과 재계를 상대로 설득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공화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이어갔고 결국 개혁안에 한 표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공화당은 오바마의 제안을 무조건 반대하는 정당으로 변모했고 오바마 정부도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죠. 애초에 그런 기대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현실을 직시했더라면 오바마 정권의 성과가 더욱 빛났을 겁니다.

자유한국당 또한 반대를 위한 반대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홍준표의 억지가 사그라지던 당의 불씨를 되살렸고, 청문회 분탕질에 보수층 지지가 모이는 것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20% 안팎의 지역표가 있는 이상 독단의 유전자는 활개칠 것이 분명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협치의 기억이 없어 협치할 의지도 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 한가한 때가 아닙니다. 그 손길은 대신 그간 소외됐던 이들을 향해야 하죠. 노동자, 실업자, 성소수자, 이민자, 여성, 양심수 등의 손을 잡고 당당히 나가야 합니다. 길이 험하고 멀겠지만 도도한 민의의 물결에 몸을 싣고 가다 보면 이를 거슬러온 자의 쪽배와는 다른 내일을 맞이할 겁니다. 이는 얼마전 박근혜가 직접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죠. 그런 세상을 온전히 만드는 것이 문재인 정권의 사명입니다.

Thursday, April 20, 2017

파파이스 <더 플랜> 초간단 정리

파파이스 <더 플랜> https://www.youtube.com/watch?v=aGGikPMNn2w&t=1269s
일단 영화 관람을 강력히 권한다. 친절한 해석과 뛰어난 그래프로 이해가 아주 쉽다. 

전희경, 현화신, 김현승, 김어준, “A Master Plan 1.5 Using Optical Scan Counters: An Analysis of the 2012 Presidential Election Data in South Korea.” MPSA 2017.   


중심 주장은 '미분류'가된 표에 있다. 
일단 의심은 미분류표가 너무 많다는 것. 미분류표 비율 3.6%, 너무 높다. 보통은 1%정도. 그러니 정상이 아니다. 

여기서 시작된 의구심은 미분류표의 차이를 향한다. 아무 문제, 간섭, 이유가 없다면 정상표에서의 차이와 같아야된다. 하지만 분류표 득표율은 두 후간간 차이가 3.32%인데 비분류표 득표율에선 그 차이가 무려 17.2%로 커진다. 


박근혜 분류표 득표 51.48 - 문재인 분류표 득표 48.16 = 3.32
박근혜 미분류표 득표 52.79 - 문재인 미분류표 득표 35.77 = 17.02

이걸 돌려서 이게 얼마나 다른가를 측정하기 위한 공식을 만들었다:

박 미분류표/문 미분류표
박 분류표/문 분류표


정상이라면 이 수치는 1이여야 맞다. 분자(미분류표의 비율)와 분모(분류표의 비율)이 같아야 하니까.

그러나 251개 개표소를 보니 1.5에 수렴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 


즉 어떤 강제나 간섭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한두군데도 아니고 보편적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여기서 선거에 어떤 강제나 간섭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운데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개표기가 어떤 조정에 의해 특정 수치만큼 읽기도 하고 안 읽기도 했다는 (분류표로 보내고 미분류표로 보냈다는) 추측을 한다.

읽을 수 있는 (분류표가 됐어야 했을) 표를 미분류표로 지정하고 ... 


저 빈자리는 무효표로 몰래 채웠다. 그리고 해당 후보의 분류표로 둔갑했다는 것.
    
연구자들은 이 가정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 돌려봤다. 그리고 거의 실제와 맞는 결과를 얻었다. 즉 이들의 가정이 맞다는 증거를 확보한 것. 뒤에 기계를 가지고 헤커가 시연을 해보이기도. 



학자로서 몇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하지만 일단 멋진, 용감한 작업을 했다는데 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