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9.07.25
지난주 어느 더운 오후 아들과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랑>을 골랐죠. 내친김에 다음날 또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인 <아키라>를 봤습니다. 한국뉴스에 아베 총리가 나와 한·일관계에 대해 설명을 해준 뒤였습니다. 한편으로 일본에 비판적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는 아빠의 모습에 아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내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식민지 역사 해석을 두고 시작한 갈등은 결국 양국 간 무역분쟁으로 번지는 양상입니다. 정부 사이 거친 말이 오가고, 감정도 격해졌습니다. 덕분에 21일 열린 참의원 선거에 한국 사회의 관심이 이례적으로 뜨거웠죠. 실권 있는 중의원 선거도 아니고, 일본 유권자의 참여도 시들했지만 말이죠. 선거 결과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논의가 좀 덜 된 부분 세 가지만 돌아보겠습니다.
첫째, 무역분쟁 원인으로서의 선거입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을 에칭가스 등 세 품목에 대한 포괄적 수출 허가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포문을 열었죠. 당황스러웠고 그 배경이 궁금했습니다. 곧 그럴듯한 설명 하나가 나왔습니다. 바로 참의원 선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한국을 때려 반한 감정을 자극, 우파표 모아 의석 3분의 2를 차지, 평화헌법을 개헌해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국가 건설. 아베의 잘 알려진 숙원을 고려할 때 앞뒤가 딱 맞아 보였습니다.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선거용이었던 수출규제는 끝나야겠죠. 하지만 그럴 기미는 안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무역규제 뒤에 선거 말고 다른 그 무엇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그것에 대한 탐구와 토론이 당장 있어야겠죠. 그래야 더 명확한 사태 이해, 더 효과적 대응이 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기존의 주장이 오히려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한 사고가 필요해 보입니다.
둘째, 일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선거였습니다. 일본 사회는 획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은 집단에 희생하고 그 안에서 비슷하게 살려는 구심력이 강합니다. 태평양전쟁에서 보여준 전투력, 남을 배려하는 공공질서 준수, 외국인에 대한 차별 등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죠. 그 반작용일까요. 의외로 놀라울 정도의 다양성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말이죠. 입헌민주당의 이시카와 다이가는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한 후 당선됐습니다. 루게릭병을 앓는 후나고 야스히코, 뇌성마비 장애인인 기무라 에이코도 당선됐죠.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소수자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게 현대사회의 척도라면 이번 선거는 일본의 위상을 돋보이게 한 것이죠.
셋째, 일본 정치구조도 잘 드러난 선거였습니다. 일본 선거, 정당구조는 한국과 아주 다릅니다. 어디가 더 낫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죠. 하지만 눈에 확 띄는 장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다양한 정당의 의회 진출입니다. 우리는 일본 공산당의 존재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7석을 얻어 13석을 유지하게 됐습니다. 한 석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체 의석의 5%를 차지하고 있죠. 중의원에서도 12석(전체의석의 2.5%)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부침은 있지만, 공산당이 의석 획득에 실패한 경우는 전후 딱 한 번밖에 없습니다. 한국에는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유는 많지만, 그중 하나는 국가보안법 때문임에 이견이 없을 겁니다. 국가보안법의 모델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이었습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등에 맞서 ‘천황제’를 지키고자 만들어진 대표적 악법이었죠. 전후 일본에서는 사라졌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마저 일본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죠.
결국 일본은 크고 복잡한 나라입니다. 아베 정부가 주요 세력이지만 거대 사회의 일부일 뿐이죠. 뜨거운 ‘전쟁’의 대상인 일본은 게이, 한인,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 방탄소년단 팬 등을 포함합니다. 서방 경제 제재가 북한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한 데서 볼 수 있듯, 경제 제재는 큰 효과가 없습니다. 수출규제도, 불매운동도 마찬가지죠. 유연한 사고와 깊은 성찰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성찰은 우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돌아보는 데도 미쳐야 합니다. 우리의 발전이 저들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효과적이니 말이죠.
Showing posts with label 아베.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아베. Show all posts
Thursday, July 25, 2019
Tuesday, November 14, 2017
[세상읽기]미국의 쇠락, 한국은 준비하고 있나
경향신문(2017.11.09)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85년 영화 <란>은 한 영주 집안의 비극적 몰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늙은 영주가 땅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며 시작합니다. 서로 도우라는 당부가 무색하게 내분과 살육으로 이어지죠. 게다가 그 내분으로 가족과 영토를 잃는데, 영주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와 복수를 꿈꾸던 이의 계책이었다는 스토리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강력한 지도자의 강경한 외교가 힘을 얻는 분위기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공산당 내 입지를 굳히면서 더욱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베 일본 총리도 총선 압승을 통해 기존 우경화 외교를 더 밀어붙일 테죠. 북한 김정은 위원장 또한 경제 회복과 군사력 증강에 탄력을 받아 더 큰 목소리를 낼 듯합니다. 여기에 큰 목소리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방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각종 언행과 스캔들, 독단적인 외교 행보 등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일본 방문에서도 노골적으로 미국 무기 구매 확충과 무역적자 해소를 되풀이했죠. 북핵 위기를 장사 기회로 삼는다는 비판이 커지는 만큼 미국의 국제적 지도력에 대한 불신도 늘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이나 한국처럼 국방을 미국에 기대고 있는 처지에서 속앓이가 깊어질 수밖에요. 미국 안에서도 걱정은 깊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서 자질이 있느냐, 대선에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느냐 등의 논란이 그치질 않고 있죠. 게다가 행정부 자체를 위축시키고 있어서 제도적 문제로 번지고, 또 그 여파마저 오래가리라는 걱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걱정과 혼란은 대선 다음 날 바로 시작됐습니다. 각 정부 부처에서는 정권 이양에 분주했습니다. 당장 다음 날 인수위 맞이에 나섰죠. 주차장, 인터넷, 사무실 등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정작 인수팀은 오질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말이죠. 다들 당황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농무부의 경우 한참이 지나 기껏 나타난 이들이 부서 업무에 문외한들이었습니다. 엉성한 준비는 엉성한 부서 구성으로 이어졌죠. 농무부 최고 관료 직책 중 장관 딱 한자리 빼고는 대부분 국회 인준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무부 책임 과학자에 지구 온난화뿐 아니라 과학 자체에 깊은 회의를 가진 이데올로그이자 극우 라디오 진행자가 임명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습니다. 농업과 자원 관리 업무를 떠나 과학 연구에 주요 역할을 하는 농무부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비판이 거세죠.
비슷한 상황은 국방부를 제외한 전 부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핵무기를 관리하는 에너지부, 외교의 난제를 풀어가는 국무부 등 한국의 입장에서 너무나 중요한 부서도 포함해서 말이죠. 에너지부 장관이 된 릭 페리는 후보자 시절 에너지부를 아예 없애겠다고 공언한 인물입니다. 거대 에너지 회사인 엑손모빌 최고경영자로 국무부 장관이 된 틸러슨은 국무부 축소를 주요 목표로 내세워 국무부 관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덕택에 고위 관리들이 은퇴하거나 물러나면서 전문가가 모자라 허덕이고 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가 아직 공석인 게 우연이 아닙니다.
영화 <란>의 며느리처럼 일부러 정부를 약화시키려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 때문에 연방정부는 큰 혼란을 겪고 주요 업무에서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죠. 그사이에 백인우월주의 목소리, 흑백갈등, 좌우대립 등 정부의 개입이 절실한 문제는 악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냐는 논의는 오래됐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지배력이 지속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죠.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정부의 행보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문제는 미국의 세계 질서에 어떤 나라보다 기대왔고 그래서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대응입니다.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논의는 북핵 문제를 넘어 지역 정세를 큰 틀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85년 영화 <란>은 한 영주 집안의 비극적 몰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늙은 영주가 땅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며 시작합니다. 서로 도우라는 당부가 무색하게 내분과 살육으로 이어지죠. 게다가 그 내분으로 가족과 영토를 잃는데, 영주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와 복수를 꿈꾸던 이의 계책이었다는 스토리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강력한 지도자의 강경한 외교가 힘을 얻는 분위기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공산당 내 입지를 굳히면서 더욱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베 일본 총리도 총선 압승을 통해 기존 우경화 외교를 더 밀어붙일 테죠. 북한 김정은 위원장 또한 경제 회복과 군사력 증강에 탄력을 받아 더 큰 목소리를 낼 듯합니다. 여기에 큰 목소리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방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각종 언행과 스캔들, 독단적인 외교 행보 등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일본 방문에서도 노골적으로 미국 무기 구매 확충과 무역적자 해소를 되풀이했죠. 북핵 위기를 장사 기회로 삼는다는 비판이 커지는 만큼 미국의 국제적 지도력에 대한 불신도 늘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이나 한국처럼 국방을 미국에 기대고 있는 처지에서 속앓이가 깊어질 수밖에요. 미국 안에서도 걱정은 깊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서 자질이 있느냐, 대선에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느냐 등의 논란이 그치질 않고 있죠. 게다가 행정부 자체를 위축시키고 있어서 제도적 문제로 번지고, 또 그 여파마저 오래가리라는 걱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걱정과 혼란은 대선 다음 날 바로 시작됐습니다. 각 정부 부처에서는 정권 이양에 분주했습니다. 당장 다음 날 인수위 맞이에 나섰죠. 주차장, 인터넷, 사무실 등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정작 인수팀은 오질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말이죠. 다들 당황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농무부의 경우 한참이 지나 기껏 나타난 이들이 부서 업무에 문외한들이었습니다. 엉성한 준비는 엉성한 부서 구성으로 이어졌죠. 농무부 최고 관료 직책 중 장관 딱 한자리 빼고는 대부분 국회 인준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무부 책임 과학자에 지구 온난화뿐 아니라 과학 자체에 깊은 회의를 가진 이데올로그이자 극우 라디오 진행자가 임명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습니다. 농업과 자원 관리 업무를 떠나 과학 연구에 주요 역할을 하는 농무부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비판이 거세죠.
비슷한 상황은 국방부를 제외한 전 부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핵무기를 관리하는 에너지부, 외교의 난제를 풀어가는 국무부 등 한국의 입장에서 너무나 중요한 부서도 포함해서 말이죠. 에너지부 장관이 된 릭 페리는 후보자 시절 에너지부를 아예 없애겠다고 공언한 인물입니다. 거대 에너지 회사인 엑손모빌 최고경영자로 국무부 장관이 된 틸러슨은 국무부 축소를 주요 목표로 내세워 국무부 관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덕택에 고위 관리들이 은퇴하거나 물러나면서 전문가가 모자라 허덕이고 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가 아직 공석인 게 우연이 아닙니다.
영화 <란>의 며느리처럼 일부러 정부를 약화시키려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 때문에 연방정부는 큰 혼란을 겪고 주요 업무에서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죠. 그사이에 백인우월주의 목소리, 흑백갈등, 좌우대립 등 정부의 개입이 절실한 문제는 악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냐는 논의는 오래됐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지배력이 지속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죠.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정부의 행보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문제는 미국의 세계 질서에 어떤 나라보다 기대왔고 그래서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대응입니다.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논의는 북핵 문제를 넘어 지역 정세를 큰 틀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Sunday, March 26, 2017
[세상읽기]미국을 향한 비극적 짝사랑
경향신문 (2017.03.23)
짝사랑은 누구나 한번은 하는 경험이지 않을까 싶네요. 새로 오신 선생님을, 이웃 학교 학생을, 이름 모를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성장기에 필요한 경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짝사랑은 비극입니다.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으로 끙끙 앓다가 결국 저 사람은 내게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 각성은 충격적입니다.
미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까, 관심이 적어지지 않을까 걱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15년 리퍼트 미국 대사 테러공격 이후 대응은 좋은 예입니다. 기괴한 부채춤 공연에서부터 엄마부대의 꽃바구니 시위 등 도가 지나친 반응이 이어졌죠. 정치인들의 병문안이 과도해 병원에서 이를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걱정을 넘어 버려짐에 대한 공포의 표출이었죠. 2017년 군가가 울려 퍼지는 태극기집회에서 엉뚱하게 등장한 성조기 또한 비슷한 원인에서 생긴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미국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이 동아시아를 지나가며 남긴 여파가 꼭 초특급 태풍 같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말이죠. 여기저기에서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틸러슨 장관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만찬을 했지만 유독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틸러슨은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불렀지만,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로 지칭했습니다. 오바마 정부 때는 ‘핵심축’으로 불렸는데 말이죠. 결국 한국이 강등된 것은 아닌가, 트럼프 정부는 한·미동맹을 미·일동맹보다 더 낮게 보고 있지는 않나 걱정을 하고 있죠.
우리의 걱정은 온당한 것일까요? 트럼프 정부는 한국을 버리거나 최소한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닐까요?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북한을 “큰 걱정거리”로 보며 “새로운 제재 등 중대한 추가 조치들”을 강조한 것은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죠. 중국과 한국에서 큰 논란이 되는 사드도 오바마 정부 주도로 시작했습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한국을 ‘핵심축’으로 보았을 수 있지만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구상을 떠받드는 축이었죠. 중국의 전략적 위협을 견제하는 첨병으로 한국의 가치는 늘 비슷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른 것은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1994년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려 한 것은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기본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미국의 마음은 애초에 변한 것이 없으니 우리의 걱정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 걱정이 온당치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앞날이죠. 미국이 우리의 앞날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을 가져도, 애원해도, 무기를 사줘도 말이죠. 사실 미국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싸이가 잊혀 가면서 한국은 그냥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나라, 삼성과 현대의 나라 정도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북한 포대에 인질로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미국이 위협적인 발언만 해도 정국이 흔들린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격변하는 세계 정세에서 한반도의 안전을 모색하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죠.
놀라운 것은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한국 내 목소리입니다. 아무리 제한적 군사행동도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큰 나라의 외교부 장관인 윤병세는 “군사적 억제방안”까지 언급했습니다. 미국의 시각이 한국 지도자들에게 투영돼 있음을 알 수 있죠. 문제는 이런 정치 지도자가 윤병세 장관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선주자들의 입을 지켜봐야겠습니다.
짝사랑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을 따라 해보기도 합니다. 비슷한 옷도 입어보고 그 사람 단골집도 가봅니다.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진 듯하고 그만큼 흐뭇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짝사랑은 여전히 짝사랑으로 남습니다. 게다가 그런 노력과 공을 많이 들일수록 짝사랑의 결말은 더욱 비참하죠. 하지만 이런 짝사랑의 진실을 마주하기 힘든 것은 청소년뿐만은 아닌 듯합니다.
Friday, January 27, 2017
[세상읽기]트럼프 시대와 남북 평화
경향신문 2017.01.2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훨씬 더 요란했습니다. 미국 전역(토요일 워싱턴DC에서만 50만명)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반트럼프 시위가 퍼져나갔고 최저의 지지율(37%)로 취임하는 기록도 갖게 됐죠. 트럼프는 캠페인 내내 여성,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조롱했고 인종차별주의 언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는 무역 정책이 가장 걱정스러운 주제인 듯합니다. 보호무역을 공언했기 때문이죠. 높은 관세로 국내 산업과 노동자들을 보호하겠다고 큰소리도 쳐왔습니다. 실제로 첫 업무날인 지난 23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명령했습니다. 기존 국제 무역질서를 흔들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역 의존이 심각한 한국으로서는 큰일이죠. 하지만 이것이 발등의 불이라면 머리에 붙은 불길도 있습니다. 트럼프의 대중국 적개심이 그것입니다.
트럼프는 지구온난화를 중국의 사기라고 말해서 비웃음을 샀지만 여기서 그의 중국관이 비쳤죠. 선거전 내내 중국 환율정책을 걸고넘어지며 무역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바로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1979년 미·중 외교 정상화 이후 처음 있던 일이죠. 미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해왔고, 이는 대만은 반란 상태에 있는 중국 영토라는 중국의 시각을 수용해왔던 겁니다. 그러니 대만 총통과의 전화 통화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기였었죠. 게다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무역 불공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하나의 중국 정책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경고도 보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이 걱정스러운 것은 중·미 간 긴장이 이미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중국의 힘은 나날이 커져 왔습니다. 경제적 성장은 군사적 팽창으로 이어졌고, 그 결실 중 하나는 항공모함 랴오닝입니다. 이달 초 랴오닝 함대는 태평양에 진출해 대만해협을 통과했죠. 대만과 미국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외교력 성장도 눈부십니다. 특히 필리핀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남중국해 영토분쟁 상대국들의 연합전선을 무력화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가만히 있을 미국이 아닙니다. 작년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12월 화답으로 아베 신조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했습니다. 이들의 외교적 춤사위는 미·일 군사 협력 강화라는 장단에 맞춘 겁니다. 일본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에 조응하고 군사동맹을 강화했습니다. 자위대는 항공모함급 헬기 호위함, 이지스함, F-15 등 최첨단 무기를 갖추었고 일본 방위비 지출은 세계 6위로 성장했죠. 게다가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법 개정을 통해 아프리카에 파견된 일본 자위대가 적극적으로 무기를 사용해 전투를 벌일 수 있게 했습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의 긴장이 높아만 가리라는 전망은 각국의 국내 사정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아베와 우파는 숙원이던 정상국가화의 꿈이 중국, 북한과의 대립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직감했죠. 일본의 군사 대국화는 저물어 가는 미국으로서는 환영할 일입니다. 서로의 국익이 맞아 떨어지죠. 중국도 물러설 자리는 넓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로 빠르게 대체돼왔습니다. 특히 시진핑 정권에서 그 경향은 더 짙어졌습니다. 중국의 부활은 곧 외세의 배척과 이어져 있죠. 미국의 간섭과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좌시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 시점에 하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겁니다.
양측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멀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가까이는 한국전쟁, 군사독재까지 고래 싸움에 배와 등이 다 터져본 한국으로서는 심각한 고민이 절실한 때입니다. 우리가 고래가 될 수는 없죠. 하지만 새우로 남을 수도 없습니다. 어느 쪽에도 빌미를 주지 않을 정치력이 필요합니다. 한편에서는 사드도 재고하고 주한미군도 위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발 위협도 누그러뜨려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모두에게 간섭할 이유를 주지 않을 수 있죠. 그 시작은 남북 간 평화이고 그것만이 우리에게 남은 절박한 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훨씬 더 요란했습니다. 미국 전역(토요일 워싱턴DC에서만 50만명)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반트럼프 시위가 퍼져나갔고 최저의 지지율(37%)로 취임하는 기록도 갖게 됐죠. 트럼프는 캠페인 내내 여성,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조롱했고 인종차별주의 언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는 무역 정책이 가장 걱정스러운 주제인 듯합니다. 보호무역을 공언했기 때문이죠. 높은 관세로 국내 산업과 노동자들을 보호하겠다고 큰소리도 쳐왔습니다. 실제로 첫 업무날인 지난 23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명령했습니다. 기존 국제 무역질서를 흔들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역 의존이 심각한 한국으로서는 큰일이죠. 하지만 이것이 발등의 불이라면 머리에 붙은 불길도 있습니다. 트럼프의 대중국 적개심이 그것입니다.
트럼프는 지구온난화를 중국의 사기라고 말해서 비웃음을 샀지만 여기서 그의 중국관이 비쳤죠. 선거전 내내 중국 환율정책을 걸고넘어지며 무역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바로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1979년 미·중 외교 정상화 이후 처음 있던 일이죠. 미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해왔고, 이는 대만은 반란 상태에 있는 중국 영토라는 중국의 시각을 수용해왔던 겁니다. 그러니 대만 총통과의 전화 통화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기였었죠. 게다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무역 불공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하나의 중국 정책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경고도 보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이 걱정스러운 것은 중·미 간 긴장이 이미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중국의 힘은 나날이 커져 왔습니다. 경제적 성장은 군사적 팽창으로 이어졌고, 그 결실 중 하나는 항공모함 랴오닝입니다. 이달 초 랴오닝 함대는 태평양에 진출해 대만해협을 통과했죠. 대만과 미국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외교력 성장도 눈부십니다. 특히 필리핀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남중국해 영토분쟁 상대국들의 연합전선을 무력화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가만히 있을 미국이 아닙니다. 작년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12월 화답으로 아베 신조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했습니다. 이들의 외교적 춤사위는 미·일 군사 협력 강화라는 장단에 맞춘 겁니다. 일본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에 조응하고 군사동맹을 강화했습니다. 자위대는 항공모함급 헬기 호위함, 이지스함, F-15 등 최첨단 무기를 갖추었고 일본 방위비 지출은 세계 6위로 성장했죠. 게다가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법 개정을 통해 아프리카에 파견된 일본 자위대가 적극적으로 무기를 사용해 전투를 벌일 수 있게 했습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의 긴장이 높아만 가리라는 전망은 각국의 국내 사정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아베와 우파는 숙원이던 정상국가화의 꿈이 중국, 북한과의 대립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직감했죠. 일본의 군사 대국화는 저물어 가는 미국으로서는 환영할 일입니다. 서로의 국익이 맞아 떨어지죠. 중국도 물러설 자리는 넓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로 빠르게 대체돼왔습니다. 특히 시진핑 정권에서 그 경향은 더 짙어졌습니다. 중국의 부활은 곧 외세의 배척과 이어져 있죠. 미국의 간섭과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좌시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 시점에 하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겁니다.
양측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멀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가까이는 한국전쟁, 군사독재까지 고래 싸움에 배와 등이 다 터져본 한국으로서는 심각한 고민이 절실한 때입니다. 우리가 고래가 될 수는 없죠. 하지만 새우로 남을 수도 없습니다. 어느 쪽에도 빌미를 주지 않을 정치력이 필요합니다. 한편에서는 사드도 재고하고 주한미군도 위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발 위협도 누그러뜨려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모두에게 간섭할 이유를 주지 않을 수 있죠. 그 시작은 남북 간 평화이고 그것만이 우리에게 남은 절박한 길입니다.
곧 다가올 대선, 정치인들의 입을 지켜봐야겠습니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