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12, 2016

제정임, "대한민국 ‘철밥통’ 회장님"

<조선일보> 오피니언 초판에 실렸다 사라진 칼럼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대항마로 잠깐 관심을 끌었던 칼리 피오리나는 1999년 루슨트 테크놀로지 사장에서 HP의 최고경영자(CEO)로 발탁됐을 때 ‘록스타급’ 인기를 누렸다. 포춘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여성 기업인’ 1위를 6년 내리 차지했고 ‘IT의 여제(女帝)’로 불렸다. 하지만 컴팩 인수 후유증 등으로 주가가 추락하자 2005년 굴욕적으로 쫓겨났다. 지난 2007년 폭스바겐 CEO를 맡아 2015년 상반기 판매량 세계 1위까지 키운 마틴 빈터콘은 창업자 가족을 이사회에서 몰아내며 ‘장기집권’의 토대를 다졌다. 그러나 배출가스 조작사건으로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외부 투자펀드 등의 압력으로 지난해 9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화려한 실적과 명성을 자랑하던 CEO라도 경영실패나 과오가 드러나면 사정없이 칼을 맞는 게 서구 기업들에겐 일상이다. 최대주주라고 해서 당연히 회장이 되지 않고, 회장을 맡아도 문제가 있으면 축출된다. ‘잘못하면 쫓겨난다’는 긴장감이 분발을 낳고, 실패한 경영자를 걸러내는 시스템이 혁신을 가속화한다. 하지만 CEO가 무슨 잘못을 해도, 심지어 중범죄로 법의 심판을 받아도 절대 쫓아내지 않는 기업들 역시 세상에는 있다. 바로 한국의 재벌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4월 발표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서 개인 대주주가 지배하는 재벌 순위를 보자. 1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지만 이듬해 사면복권 됐다. 2007년 삼성비자금사건이 터진 후 탈세와 배임 등으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지만 또 사면복권 돼 경영에 복귀했다. 2위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은 2008년 횡령 등으로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지만 금방 사면복권 돼 활동을 재개했다. 3위인 SK의 최태원 회장은 분식회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가 2008년 사면복권 됐고, 2014년 횡령 등으로 징역 4년의 실형이 확정됐지만 다시 사면복권 돼 경영일선을 누빈다. 이밖에도 8위 한진 조양호, 9위 한화 김승연, 12위 CJ 이재현 등 여러 총수들이 횡령, 배임 등을 저지르고도 경영에 복귀하거나 교도소에서도 보수를 챙겼다.

현행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거액의 횡령, 배임, 사기 등을 특별히 무겁게 처벌해야 할 범죄로 보고, 재범을 막자는 취지에서 취업제한 조항을 두었다. 형 집행이 끝났거나 사면된 후 5년까지, 집행유예기간이 끝난 후 2년까지 관련기업에서 일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회장님’들은 ‘복권이 됐으니 문제없다’, ‘미등기 임원이니 상관없다’며 법의 취지를 무시한다. 그들이 같은 범죄를 또 저질렀을 때, 피해는 수많은 외부 주주와 직원, 그리고 국가 경제에 돌아간다.
최근 ‘혼외자 고백’으로 파문을 일으킨 최태원 회장은 특히 눈길을 모은다. 그는 1조5000억원대의 분식회계와 배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사면복권 된 후 ‘윤리경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또 회사 자금을 빼돌려 개인 투자를 했다가 400억원대의 횡령, 배임혐의로 실형을 살았다. 두 번째 사면복권 후인 지난 연말 혼외 관계를 밝힌 다음에는 SK계열사와 하청기업을 동원한 부동산 거래로 내연녀에게 부당이득을 안겼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그의 결혼생활에 어떤 고통이 있었는지 모르니 사생활을 무조건 비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대 경제범죄를 거듭 저지르고, 자신의 ‘두 집 살림’을 위해 회사를 동원했다는 의혹을 명쾌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이가 “솔직과 신뢰의 기업문화를 만들자”고 당당히 연설하는 모습에서는 현기증을 느낀다. ‘무슨 일을 저질러도 반드시 돌아오는 회장님’의 그 신년사를 듣는 직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외국인 중엔 탈세범, 횡령범 등이 한국의 대규모 상장기업 회장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가 많다.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서도 아니고 독재 치하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던 것도 아닌, 개인의 탐욕으로 범법자가 된 이들이 부끄럼 없이 호령하는 현실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흔든다. ‘투명성’과 ‘법의 지배’를 조건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발전을 막는다. 대통령이 올림픽과 세계박람회를 유치하라고, 경제를 살리라고 탈법 경제인 사면복권을 반복하는 한 현실은 더 나빠진다. 국민들이 이에 분노할 줄 모르고 동조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다. 대형 재벌비리가 석연찮은 수사와 재판에 이어 사면복권으로 마무리될 때마다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고 아이들이 배울까 두렵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런 두려움을 절실하게 느끼고 분노해야, 사회가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Monday, January 11, 2016

[왜냐면] 10억엔에 나라 안위까지 팔아넘겼다



위안부 논쟁을 타결하면서 일본 정부가 지원하기로 한 예산은 10억엔, 한화로 약 100억원입니다. 일본이 매해 부담해온 유네스코 예산의 약 10%인 37억엔, 원래 800억엔으로 잡았다 2520억엔으로 커져 문제가 되고 있는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정비예산과 비교해도 참 초라한 금액입니다. 일본은 헐값으로 230여명의 등록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한국 정부의 침묵을 사들인 셈이죠.

한국에서는 100억원으로 무엇을 할까요? 내년 예산안을 살펴보겠습니다. 100억원이 국가보훈처의 유치원 안보교육 예산으로 배정됐습니다. 대전 서구 공영주차장 건설사업 총사업비로, 내년도 달 탐사 사업에, 부천시 인도 정비에, 내년 영농기까지 용수 부족이 예상되는 저수지 103곳의 정비 등에 각각 100억원이 잡혀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100억원에 팔아넘긴 것이 이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 문제에 관한 한-일 외교분쟁의 타결은 미국 정부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중국의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정치적·군사적 팽창은 태평양 세력의 지도국으로 남고 싶어하는 미국에 큰 도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아시아 지역 동맹국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수밖에요. 2013년 미-일 군사동맹 강화조약, 주한미군의 재배치와 제주의 해군기지 건설은 이런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한-미, 미-일 공조는 잘되지만 한-미-일 삼각 공조를 꿈꾸는 미국으로서는 답답한 것이 한-일 관계입니다. 역사 문제로 계속 삐거덕거리고 있으니까요.

이런 정세 판단에 미·일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지난해 4월의 정상회담이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일본·동남아국가들의 분쟁을 지적하며, 중국은 대화가 아닌 무력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했죠. 바로 이어서 아베 신조 총리는 한국과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10월에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바마는 중국이 국제법을 어기면 한국 정부도 미국 정부처럼 이를 비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협박 아닌 협박을 했죠. 이어 그는 한-일 간 역사 문제 타결이 필요하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두달 만에, 몇십년이 지나도 안 되던 타결이 된 것이죠. 당장 수전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공식 성명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환영받을 것”이라며 치켜세웠습니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중국은 우리와 멀어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경제적으로 이미 최대 교역국이고 북한과의 문제에서도 중국의 협조는 절대적이죠. 하지만 대놓고 중국과 각을 세우는 길로 접어드는 형국입니다. 덕택에 한국은 앞으로 펼쳐질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결에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단돈 100억원에 팔아넘긴 것은 위안부 생존자들의 명예, 한국인들의 자존심만이 아닙니다. 나라의 안위까지 떨이로 넘긴 것입니다. 

위안부의 문제가 나라가 없어져서 생긴 일인데, 그 처리를 놓고 또 한번 불장난을 치는 정부가 야속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