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17, 2018

[세상읽기]당위가 무너진 정글, 먼 나라 얘기일까

경향신문 (2018.05.31)

시리얼이 몸에 나쁘지야 않겠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 밥상만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바쁜 아침, 아이들 깨우고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시리얼 먹으란 말을 하게 됩니다. 부모 노릇을 하면서 이렇게 타협하는 일이 흔합니다. 우는 애에게 TV를 틀어주고 심심해하는 아이에게 전화를 쥐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집안에서는 현실과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즉 당위의 마찰이 일상적으로 벌어지죠.

늘 현실에만 눌러앉아 있지는 않습니다. 시리얼 준 다음날이면 괜히 미안해 시간을 내 달걀이라도 부치죠. 당위를 향하는 마음은 사랑과 부모의 의무감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개인 노력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파트너의 질책이나 주변의 눈초리도 도움이 되죠. 현실과 당위의 마찰이 너무 심해지면 국가가 간섭하기도 합니다. 아동복지법은 한 예입니다. 

집안 현실과 당위의 마찰은 쉽지 않지만 사회의 그것에 비하면 소소해 보입니다. 특히 법질서의 현실과 그 당위의 괴리는 너무 크고 심각해 보입니다. 나쁜 짓을 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재산과 권력의 유무를 떠나 똑같이 처벌받아야 하죠. 그 당위는 법 집행의 핵심입니다. 법 집행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순간, 사람들은 경찰·검찰·법원 등 법 집행 기관과 법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처벌받는 게 아니고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자연히 돈과 힘에서 정의를 찾을 수밖에 없고 결국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겁니다.

지금 한국이 그런 정글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정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재벌 총수에 대한 처벌은 한없이 관대합니다. 형을 선고받아도 실형을 살지도 않고 집행유예로 끝나기 일쑤죠. 사면 복권도 공식처럼 따라다닙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면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돈 백만원, 천만원으로도 감옥에 가지만 이들은 수십억원의 비자금, 수백억원의 배임·횡령 등에도 끄떡없습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감옥에서 걸어나왔습니다.

특권을 몸에 달고 태어난 이들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언행을 보였습니다. 경주장 셔터를 내리고 4억원이 넘는 고성능 차를 혼자 모는가 하면, 깡패처럼 보복 폭행을 하기도 합니다. 열 받는다고 비행기를 돌리는가 하면,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건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국회의원들도 몸에 특권이 문신처럼 그려져 있는 듯합니다. 자유한국당은 6월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죠. 강원랜드 취업청탁 의혹을 받는 권성동 의원의 체포를 막기 위한 ‘방탄국회’일 가능성이 큽니다. 국회 안에서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특권을 주고받는데 여야가 따로 있을 리가요. 바로 얼마 전 뇌물수수·배임 등 혐의를 받는 홍문종 의원과 강원랜드 채용비리에 연루된 염동열 의원 체포 동의안도 여당 의원들 이탈에 부결됐었죠. 

이런 뉴스를 삼시 세끼 챙기듯 보는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믿었습니다. 현실은 어려워도, 가끔 실수해도, 가끔 잘못해도, 정의의 여신은 당위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요. 그 칼날이 무뎌지고, 저울이 기울어지고, 눈가리개가 헐렁해 보여도 우리는 믿었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알게 됐죠. 그 여신은 일상을 다투며 살아가는 부모보다 못하다는 것을요. 당위를 위해 애쓰다 실수하고 가끔 현실에 타협하는 범부만도 못하다는 것을요. 놀랍게도 당위가 아닌 사익을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뒷거래하고, 아첨하며, 겁박하는 여신을 보았습니다. 그의 뒷발질에 정의는 땅에 떨어지고 힘없는 이들은 절규했습니다. 그 여신의 칼질에 직장을 잃고 목숨마저 잃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그들은 또 법복을 입고 근엄한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울 겁니다. 우리는 압니다. 다행히 조사가 이루어지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더라도 당위가 아득하게 보이는 정글 언저리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을요. 재벌 총수는 수십억원을 횡령하고 초울트라슈퍼 갑질을 계속하고, 권력가들은 방탄국회 노래를 흥얼거릴 것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들어대야 할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 명단이 늘기만 해 마음이 바빠지는 초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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