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 2019

[세상읽기]죽은 제갈량 일화가 떠오르는 이유

경향신문 2019.05.02

<삼국지>를 보면 당대 최고의 재상 제갈량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죽은 제갈량이 적이자 최고의 라이벌이던 사마의를 쫓아낸 일화죠.

오랜만에 들른 광화문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 건물에 걸린 독립운동가 초상화가 크기도 했지만 너무 현대적이고 세련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행사가 많았습니다. 100주년이어서 그랬겠지만, 민간 행사뿐 아니라 정부 주도 포럼, 전시회, 기념회 등이 열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녀상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황사처럼 전국을 강타했죠.

모든 사상은 한계를 갖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것은 한계가 더 도드라집니다. 정체성의 경계는 인위적이지만 결국 절대적이 되니까요.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민족’은 현대국가가 세워지며 생겼죠. 순수한 혈통은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환호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역사에 기대는 사상이다 보니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진보적 미래를 꿈꾸기에는 부족하죠.

그러니 정치판이 과거에 머무를수록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국민은 피곤합니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이 정부는 그릇된 과거를 타파하는 사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것에 집중하는 게 당연했죠. 덕분에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옳고 저쪽은 적폐라는 구분은 그렇게 그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어진 선은 정부를 옭아맸습니다. 적폐로 지목된 이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고, 배수진을 친 이들의 저항은 치열했죠. 과거에 대한 전투가 치열할 때 거리엔 촛불이 꺼졌습니다. 은행빚과 취업난이 그 거리를 채웠죠. 싸움이 힘들어질수록 쉬운 상대가 눈에 띄는 법. 100년 전 일본만큼 만만한 상대가 있을까요. 시선은 자꾸 과거로 가고 미래에서는 멀어졌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가졌던 과거청산의 소명은 이제 그 유효기간이 지난 듯합니다. 박근혜와 주변 인물들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 셈이죠. 이제 정치에 충실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첫째, 정치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총칼 없는 전쟁이죠. 갈등 당사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논의하는 공적 장입니다. 상대가 좋건 싫건 말이죠. 싫다고 배척하는, 내가 옳다고 외면하는 순간 정치의 영역은 좁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갈등의 당사자들은 주먹과 칼에 기댈 수도 있죠. 둘째, 정치적 미래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싸움을 과거로 몰아가도 판을 흔들어야 합니다. 불과 1년 전 평화가 있는 미래를 보여줬을 때 국민은 열광했죠. 남북평화가 중요한 미래이지만 그것뿐이라면 곤란합니다. 문재인 정부 탓만은 아니지만, 정권은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있습니다.

정치판에서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고 그 판마저 좁아지면서 싸움은 국민 사이로 파고든 형국입니다. 정치적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적 공간이 허약해집니다. 분노와 무시당했다는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 쉽죠. 이들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고함에 쉽게 동화해 정치세력화할 수 있습니다. 벌써 그런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태극기부대죠. 오는 토요일이면 태극기집회는 122차에 접어듭니다. 그들은 열정과 확신이 있습니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옵니다. 부산에서,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옵니다. 매주 오는 이도 많습니다. 사비를 털어 시위용 트럭을, 동지들 먹일 식사를 준비합니다. 명확한 비전도 갖고 있습니다. 맨주먹으로 정당을 꾸렸다는 자부심도 강합니다. 하지만 공존을,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보는 이들만큼은 철저하게 무시합니다. 무시당한 이들을 모아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죠. 브라질에서도, 독일에서도,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만 언제까지 예외일까요?

이런 와중에 자유한국당 해산 국민청원이 2일 현재 170만명에 육박한다니 걱정스럽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의 광기가 생각나는 것은 저뿐인가요? 대화와 설득은 좋아서가 아니라 대안이 없어 하는 겁니다. 하루빨리 정치를 복원해야 합니다. 미래에의 비전을 두고 싸워야 합니다.

죽은 박정희 손에 산 문재인이 실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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