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2009.4.15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 시절인 2001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부시의 고향 텍사스를 방문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접을 받았다. 직접 트럭을 몰고 드라이브도 즐기며 아주 친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부시는 푸틴의 “가슴과 영혼”을 보았다며 정상회담의 성공을 자축한다. 물론 푸틴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치켜세우던 부시는 러시아에서 실제로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 그리고 그 임기가 끝난 뒤에는 총리로서 권력을 이어가는, 민주주의의 “가슴과 영혼”과는 거리가 있는 지도자였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몰랐을 것이 확실하다. 대통령이 모르니 어린 학생들이 알 수가 있나.
나는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하여 미국 학생들과 토론을 하는 것은 늘 새롭다. 많은 학생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선 그런 고정관념을 깨,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보람되다. 내가 좋아하던 토론의 한 예가 푸틴의 러시아였다.
푸틴은 2000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은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내전이라는 호재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일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이후 푸틴은 정치적 반대를 하나하나 잠재웠다. 2003년 가스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회장의 체포는 그 신호탄이었다. 메시지는 아주 분명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그 누구도, 아무리 부유하고 세력이 굳건하더라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정치제도도 그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체첸 지역에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폭압적인 군사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푸틴이 무엇보다 공들인 것은 아무래도 언론에 자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노력은 치밀하고 총체적이었다. 그의 치부를 건드리던 유명 티브이채널 는 하수인을 통해서 길들였고 회사의 사장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체포된 데 이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회사를 포기한 건 물론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지방의 방송사들은 알아서 스스로 푸틴이 싫어할 보도를 자제하기 시작했다. 방송사의 소유권도 하나하나 정부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그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했던 토론이나 야당의 목소리는 불과 수년 만에 러시아 전역의 티브이에서 사라지는 지경에 이른다. 말을 듣지 않는 개개 언론인들 또한 하나하나 길들여지거나 사라져 갔다.
보도지침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기억되는 우리는 아마 다음의 코미디 같은 사건이 그렇게 우습지만은 않을 것이다. 2008년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스톱 리스트’가 존재한다. 이 리스트에 있는 비판적인 인사는 티브이의 인터뷰나 방송 출연이 실질적으로 금지된다. 심지어 유력 야당 지도자들도 티브이에서 보기가 이제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평범한(?) 정권의 비판자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국경 없는 기자회’라는 단체에 따르면 푸틴의 집권기에 18명의 기자가 살해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자기 집 앞에서 살해당한 안나 폴릿콥스카야라는 여성 기자일 것이다. 그는 체첸지역의 전쟁참사를 끊임없이 보도해 모스크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푸틴 비판자였다. 대가는 끊임없는 살해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협에 시달리던 그가 변을 당한 날은 우연인지 푸틴의 생일이었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 두 번의 의회선거를 합법적으로 치른 푸틴. 그가 과연 민주주의의 수호자였을까? 당연히 답은 너무나 뻔한 ‘아니요’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못해 독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음에 답을 하기가 2009년엔 수월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내 학생들은, 특히나 부시를 지지하는 학생들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푸틴의 반민주적인 행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도 치르고, 자신이 지지하는 부시가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떤 학생들은 내가 조목조목 따지면 거의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의 수는 적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하기엔 너무 뻔하게 그의 독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화를 내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뭐라 그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난 시간이 갈수록 설사 누가 그런 비유를 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길 진심으로 빈다. 왜냐하면 그 반대는 상상하기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람이 방송사를 억지로 장악하고, 대통령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던 뉴스 앵커가 시청자들과 회사 동료의 지지에도 뉴스에서 중도하차하고, 대통령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진행자가 프로그램의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방송을 그만둘 뻔했다. 난 이런 이야기가 러시아만의 것이길 바랐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한겨레 기사등록 : 2009-04-15 오후 10:16:22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50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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