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에는 ‘판타지’가 산다
Sisain 2016. 02. 01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응답하라 1988>(‘응팔’)이 드라마 장르에 온전히 포섭될 수 있는 성격의 프로그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수많은 시청자가 ‘응팔’을 ‘아련한 추억을 소환해내는 드라마’로서 소비했다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드라마’는 (드라마라면 반드시 있게 마련인) ‘타자’도 ‘갈등’도 따라서 ‘서사’도 없는, 실은 차라리 ‘반(反)드라마’이다.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을 드라마로서 (심지어 케이블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할 만큼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역리가 가능했을까.
주인공 덕선의 시선에서 소환되는 27년 전의 기억은 철저하게 ‘골목 안’으로만 제한된다. 골목 밖의 세상은 (적어도 드라마 안에서는) 그저 풍경으로 스쳐갈 뿐 골목 안과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가령 시청자들은 선우를 괴롭히던 선배 ‘미친개’의 개인사적 배경 따위는 궁금해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렇듯 그 시절을 주인공과 얽혀 함께 살아냈음에 틀림없는 ‘어떤’ 주체의 기억을 손쉽게 배제한 채로도 이 드라마가 그 시절의 ‘공통 기억’을 소환해낸다고 기꺼이 믿는다. 그러나 골목 밖의 세상이 삭제되어 있다는 건 사소한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더 심각한 건 골목 안에조차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점이다. 아이고 어른이고 골목 안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미 충분히 익숙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어떤 새삼스러운 ‘낯섦’의 계기도 없고, 그로 인한 갈등을 통해 좀 더 익숙해져가는 ‘과정’도 없다. 이웃이라기보다는 이미 가족이다.
그나마 덕선과 적잖은 긴장관계에 있는 언니 보라의 성격은 이 드라마가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덕선에게(따라서 덕선의 시선을 따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보라의 ‘더러운 성질머리’는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일 뿐, 가끔 짜증나게는 하지만 굳이 그 내면을 짐작해볼 이유는 없는 ‘익숙함’의 영역에 있다. 고작 세 살 터울의 동세대에 속한 언니가 도대체 무엇을 왜 고민하고 있는지는 부모 세대의 내면만큼도 드라마 내적 구조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덕선과 보라 사이엔 티격거림이 아무리 격렬해도 서로의 내면을 긴장시키는 갈등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현실의 자매라면 설마 그럴 리가 있는가. 그런 계기들은 덕선의 ‘선택적 기억’에서 삭제된 것뿐이다.
‘갈등 없는 세상’으로 숨고 싶은 사람들
물론 선택적 기억이 그 자체로 이상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선택의 기준이고 배경이다. 왜 어떤 기억은 선택하여 굳이 소환하고, 어떤 기억은 그 선택에서 배제하는가. 나아가 그 이전에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시선인가. 가령 그 골목 안 아이들의 우정을 부러워하거나 촌스러워하는 골목 밖의 누군가의 시선이 아니라, 혹은 골목 안 아이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감정선에서 가장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동룡의 시선이 아니라, 왜 하필 덕선이었어야 했는가. 좀 더 노골적으로, 어려서부터 대중의 주목을 받은 독특한 이력의 남편을 둔, 대기업(이 분명한 업종)의 중간관리자임을 짐작하게 하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심지어 소꿉친구 첫사랑과 결혼할 수 있었던 인물이 굳이 소환해낼 수 있는 기억이란 얼마나 일반적인 것일까.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가장 격렬하게 소비한 것은 ‘그 시절의 공통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응팔’은 흔한 비판처럼 ‘복고 취향’의 ‘추억팔이’가 결코 아니다. 현실에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는 ‘갈등 없는 세상’을 향한 ‘판타지’다.
이 점은 주인공들의 성장기에 초점을 두면서도, 정작 ‘사회적 성장’의 기억은 통째로 삭제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전작 <응답하라 1994>(‘응사’)가 비슷한 분량인데도 1996년 초까지 2∼3년의 시간 동안 저마다 성장배경을 달리하는 주인공들이 서로 부대끼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수박 겉핥기로나마 훑고 지나간 것과는 달리, 1년도 채 안 되는 시기의 ‘단면’만을 파편적으로 나열한 뒤에 곧장 6년 뒤로 드라마 속 시간을 ‘점프’해버린 구성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응사’에서도 후반부에 주인공들이 본격적인 ‘짝찾기’에 나서는 시점으로 점프하긴 했지만, 대학생 때와는 조금은 달라진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저마다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낸 그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려는 ‘성의’는 보였다. 그러나 ‘응팔’에서 6년 뒤에 만난 주인공들은 열여덟 살 고등학생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듯 ‘골목 안’에 머물러 있다. 하다못해 골목 밖 세상을 떠돌다 결국 그 골목으로 되돌아왔다는 식의 흔해빠진 ‘복고적’ 서사조차도 과감히 생략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적 성장의 서사’를 삭제해놓고도 마치 자신들이 성장기를 보낸 그 골목이 자신들을 성장시켜주기라도 한 양 회고한다. 그러나 거기엔 ‘타자’도 ‘갈등’도 없었다. 굳이 있었다면 오로지 ‘가족’뿐이었지만, 사실 그런 가족은 왜곡되고 파편화된 기억 속에나 존재하는 환상일 뿐이다. 이 환상 속에서 가족이란 그저 ‘갈등할 이유가 없는’ 타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 판타지’를 탐닉하는 이유다. 타자와 직면하는 것도, 그래서 갈등을 감당하는 것도 버겁기만 한 나머지 ‘갈등 없는 세상’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그 열망이 강할수록 타자와의 갈등은 더 힘겨워진다. 이 판타지 안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성장도 서사도 없다. 흔히 사회적 성장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일컫곤 하지만, ‘응팔’이 소비되는 양상을 곰곰 짚어보면 <피터팬>이 좀 억울할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후크 선장이라는 ‘타자’가 없었다면 아예 이야깃거리조차 안 되었을 테니까. 이러한 퇴행은 사회적 성장이 지체된 개인에게 혹시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심각한 ‘재앙’이다. ‘갈등 없는 세상’의 판타지는 언제나 ‘갈등의 제도화’를 향한 정치적 상상을 봉쇄하고,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는 공공 영역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아예 타자의 존재가 삭제된) 가족을 향한 충족 불가능한 욕망의 악순환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가 누군가에게는 존재를 삭제당한 ‘골목 밖’ 사람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헬조선’의 정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