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8, 2016
[시론]‘백인우월주의’와 미국의 현실
경향신문 (2016.09.28)
지난 26일 오는 11월8일 치러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분수령으로 평가됐던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1차 TV 토론이 열렸다. 토론 때마다 억지와 호통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며 공화당 주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던 트럼프가 백전노장 클린턴을 상대로도 승리할 수 있을까 걱정과 기대가 넘쳤다. 덕택에 미국의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는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 TV를 지켜봤다. 승패는 곧 갈렸다. 한마디로 트럼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클린턴은 사안마다 구체적 사례와 통계, 관련자들의 이름을 제시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정치인과 관료로서의 오랜 관록이 묻어나왔다. 트럼프는 그의 장기라고 여겨지는 임기응변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어물쩍대고, 토론에 임하는 자세에서도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클린턴의 발언 시간에 사사건건 끼어들 뿐 아니라, 난데없이 “아닌데” “틀렸어”라며 김을 빼다가, 나중에는 “내가 대통령이 될 기질이 있다”며 소리쳤다. 그 덕택에 트럼프는 ‘대통령 자질이 없음’을 몸소 보여주며, 토론을 지켜보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황당한 웃음을 선사했다.
TV 토론이 끝나고 나온 CNN 여론조사에서도 60%가 넘는 응답자가 클린턴의 승리였다고 답했다. 이 판정에는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압도적 승리에도 클린턴은 고전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직도 신뢰의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덕택에 많은 잠재적 민주당표가 제3후보에게 가거나, 아예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TV 토론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클린턴으로 마음을 바꿀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무리 트럼프가 횡설수설에 억지, 거짓, 무능력을 보여줬어도, 그를 향한 지지자들의 믿음은 굳건하기 때문이다.
상당수 공화당 지도자와 당원마저 지지를 포기한 트럼프가 이렇게 선전하는 이유가 뭘까. 바로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이 공유하는 ‘백인우월주의’ 덕분이다. 클린턴이 토론에서 지적한 대로 사업가 트럼프가 정치를 시작한 것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출생을 문제 삼으면서였다.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시민이 아니므로 오바마의 대통령직은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트럼프는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국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이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그는 곧바로 이민자 문제에 집중했다. 멕시코에서 범죄자, 강간범들이 몰려온다고 주장하고, 이들을 막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했다. 게다가 국경 수비를 위한 비용도 멕시코 정부가 부담하게 하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지난 26일 열린 1차 TV 토론에서 트럼프가 ‘법과 질서’를 되풀이한 것도 이런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이민정책 말고는 별다른 정책이 없는 것이 트럼프 캠프의 현실이기도 하다.
‘백인우월주의’라는 괴물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눈앞에 놓인 미국의 현실 때문이다. 이민자가 늘면서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있고, 향후 30년, 불과 한 세대 후에는 어쩌면 백인이 소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근거 없는 불안에 휩싸인 일부 백인들은 과거 좋았던 시절, 즉 백인이 절대다수이고 우대받던 시절을 내심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 찍히니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미국인들의 마음을 트럼프가 파고든 것이다. 덕택에 이들은 공화당 지명자라는 정당성 뒤에 숨어 이제껏 발산하지 못했던 ‘뒤틀린 욕망’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그러진 정치이데올로기가 한 사회를 망가뜨린 것은 나치 독일뿐만이 아니다. 트럼프의 등장을 보며 우리네 괴물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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