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7.04.20)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발 태풍이 한반도에 몰아쳤죠. ‘전략적 인내’가 끝났다며 북한을 압박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을 말하며 한국을 당황케 했습니다. 그 때문에 한반도 안보가 한국의 아킬레스건임을 새삼 곱씹어야 했죠.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운신 폭이 크지 않다는 현실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최선의 정책은 평화의 확장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럴수록 한국의 목소리는 커질 테니까요. 평화의 공간이 줄고 대결이 고조될수록 우리의 목소리는 강대국의 고함 속에 잠기는 법이죠.
안철수 후보는 평화에의 확신이 없어보입니다. ‘국민적 합의’를 강조하며 사드 배치를 반대했던 안 후보는 ‘국가 간 합의’를 외치면서 찬성으로 돌아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개성공단에 대한 입장도 재개에서 유보로 바꿨죠. 전시작전통제권 회수도 시기상조로 돌아섰고 햇볕정책에 대한 입장도 계승에서 침묵으로 바꿨습니다. 하나같이 중요한 외교 사안인데 모두 평화 쪽에서 대결의 방향으로 간다는 점에서 우려스럽습니다.
게다가 그 변신에 대한 설명도 충분치 않습니다. 사드 입장 변화에 대해 안철수 후보 본인도, 박지원 대표도 사정이 바뀌었으니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바뀐 사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 정세나 북한 위협 등 사정은 기본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뚜렷이 달라진 것은 보수층 지지를 받기 시작한, 안철수 후보 본인의 사정입니다. 선거를 위해 안보를 가벼이 대하지 않나 싶어 우려스럽습니다.
말하지 않은 그 무슨 심각한 고려가 있었다 치더라도 걱정이 싹 가시지는 않습니다. 국가 간 합의가 자연의 법칙이 아닌 것은 정작 미국 부통령이 한·미 FTA 개정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확인할 수 있었죠. 미국과 중국이 맞붙을 가까운 미래에는 유연한 입장을 통해 청과 명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광해군의 지혜가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안 후보의 인식은 교조적 외교로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인조의 실수를 떠올리게 해 우려됩니다.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겠다던 안 후보의 호기를 기억하기에 더욱 안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새정치연합은 안철수 대표가 2014년 꾸리자마자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소멸했습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으로 그 이름이 이어졌죠. 안 후보가 탈당하며 더불어민주당이 되면서 ‘새정치’라는 수식어도 사라졌습니다. 그만큼 안 후보 하면 ‘새 정치’였습니다. 그 새 정치를 위해 안 후보는 새정치민주연합을 나와 새 정당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승자독식 선거제가 양당제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과감한 결단이었죠.
안 후보의 새 정치는 딱 여기까지였던 듯합니다. 천정배 의원을 공동대표로 내세우며 호남 민심을 노렸고 박지원 의원을 위시한 동교동계를 대거 받아들였죠. 국민의당은 호남당이 됐고 총선에서 호남을, 호남만을 휩쓸었습니다. 이를 안 후보는 ‘녹색바람’이라 불렀죠. 하지만 승자독식 선거제의 양당제 경향을 지역표로 극복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영국의 양당제하에서 스코틀랜드 민족당이 비슷한 예죠. 노동당과 보수당이 대변할 수 없는 특수한 이익, 즉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이들은 제3당의 입지를 넓혔습니다. 바로 국민의당의 전략이었습니다. 즉 안철수표 새 정치, 국민의당은 한국 특유의 지역정치를 잘 이용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손을 맞잡은 순간을 모두들 기억하실 겁니다. 수많은 이들에게 평화의 희망을 주었고 살육과 대결로 이어진 반세기 남북관계를 돌려놓는 감격적 계기였습니다. 그해 8월 개성공단 사업이 첫걸음을 떼었고 금강산 관광사업도 탄력을 받았죠. 당장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던 남북은 화해의 무지개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남북관계에 한국의 목소리가 커졌고 세계는 노벨 평화상으로 박수를 보냈죠. ‘햇볕정책’은 말 그대로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었습니다.
새 정치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안 후보가 말한 새 정치의 정체가 궁금한 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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