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논의가 심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권력형태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죠.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개헌의 이런 저런 면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현제도의 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권력을 의회에서 선출하는 총리가 나누는 제도죠. 1958년 프랑스 드골이 들고나온 5공화국 제도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요.
‘분권형 대통령제’(semi-presidential government) 논의 선구자인 뒤베르제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2.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이걸 좀 더 살을 붙이면: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대통령이 직접 선출됐으니 허수아비가 아니다)
2. 둘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허수아비가 아닐 뿐 아니라 강력한 권한을 지닌다)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전적으로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행정부 권한을 총리와 나눈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총리를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다만 의회의 지지가 필요하죠. 분권형 대통령제는 이름이 암시하듯 행정부 권력을 대통령과 총리가 나누는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대통령은 국가 원수직과 이른바 외치 영역에 해당하는 외교·안보·국방 정책 등을 담당하며, 총리는 내정과 관련된 그 나머지 정책들을 모두 맡는 형태를 생각하지만, 그것도 정치적 배분이지 법적 강제력은 없습니다.
권력의 분배가 제도적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보니 분권이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대통령이 되고 그 대통령의 정당이 의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죠. 대통령은 자기 수하를 총리로 임명할 테고 의회는 당연히 임명안을 통과할 겁니다. 나랏일, 정부 운영, 의회 활동까지 그 카리스마적 리더가 다 챙길 수 있죠.
한 극단적 예를 들자면 러시아가 좋겠습니다. 현재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이 잠시 총리로 물러나 있을 때 메드베데프 대통령(현재 총리)이 실권을 행사하려다 큰 코를 다쳤죠. 반대로 푸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총리를 압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권력분배가 별 의미가 없죠. 푸틴의 정당, United Russia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떡 주무르듯 합니다.
이런 상황은 사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도의 창안자인 프랑스의 드골이라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면 고안한 제도니까요. 드골은 2차대전 이후 4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받아들이자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후 정치위기가 이어지면서 공화국은 결국 붕괴했고 드골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5공화국 건설을 주도했습니다. 즉 권력을 나누기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 반대죠. (프랑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권한도 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비롯한 비슷한 사정의 구소련 나라들이 이 제도를 선호한 겁니다.
다른 극단적 예는 프랑스처럼 대통령의 정당이 총선에서 지는 경우입니다. 대통령이 임명은 하지만 의회에서 승인이 안 되니 울고 겨자 먹기로 야당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권력을 실제로 나누죠.
한국 내에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여기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앞서 살펴본 대로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개헌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공산이 크다는 점입니다. 드골처럼 제왕적으로 될 수도 있고 푸틴처럼 독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총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정치적 현실에 따라 그 독립성의 크기는 왔다 갔다 합니다. 다당제 도입, 대통령과 총리 간 협의의 제도화 등 보안책을 제시하지만 기본 틀을 바꾸기엔 역부족(협의 제도화)이거나 상관없어(다당제) 보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얼마만큼 변화를 줄까 하는 점을 고려해 보죠. 앞서 살펴본 분권형 대통령제의 정의를 또 한 번 들춰보겠습니다.
1.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로 선출.
"제67조 ①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2. 둘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상당한 실권을 보유.
외교(73조), 국군 통수(74조), 대통령령(75조)과 그 외 법률 효력의 명령 발동 (76조), 계엄 선포(77조), 공무원 임명(78조), 사면 복권(79조) 등등 광범위한 권위 보장.
3.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전적으로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63조 ①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제65조 ①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행정 각부의 장·헌법재판소 재판관·법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감사원장·감사위원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쉽게 말해 처음 두 사항은 현재 헌법이 이미 충족하고 있습니다. 즉 국민 직접 뽑는 대통령(조건 1)이 실권이 있죠(조건 2). 조건 3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일단 총리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총리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점도 명시돼 있죠. 국회가 총리 해임할 수는 없지만 건의할 수는 있습니다. 총리 임명과 해임에 의회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봐야죠. (문재인 정부 첫 총리로 이낙연 총리 인준이 통과됐지만, 간신히 됐습니다. 하지만 이전 정부에는 낙마의 쓴 잔을 본 후보도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도 분권형 대통령제를 이미 갖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권력의 분립이 안 되니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는 제도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에 가깝습니다. 즉 한국에서도 정치적 타협만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는 가능하다는 말이죠.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정부의 대주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예를 곱씹어 볼 만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총리도 그 예로 거론됩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후보 시절부터 '책임총리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죠.
즉 분권형 대통령제는 개헌이 굳이 필요치 않으니 개헌 논의의 한 대안으로는 적합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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