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왜냐면] 남태현 미국 메릴랜드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기사등록 : 2011-03-25 오후 06:21:21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69926.html
얼마 전 캐나다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만난 한국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화제가 영어로 옮겨졌을 때 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영어강의 능력이 신입교원의 필수 조건이다. 프랑스에서 박사를 딴 사람도 영어로 강의를 해야 되고, 동양철학도 영어강의가 있다”는 믿기 힘든 괴담을 서울의 유명 대학의 교수에게서 들으니 기가 막혔습니다.
믿기도 힘들었죠. 그런데 정말이더군요. 한 대학의 철학과 개설 과목을 보니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양사상(영어강의)’, ‘형이상학특강1(영어강의)’가 있었습니다. 일이 이 정도가 되었으니 영어 망국병이라고 한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 이것은 병이 아니라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0년에 영어 사교육비로 7조원이 쓰였답니다. 이는 수학 사교육비를 훨씬 뛰어넘고(6조원) 전체 사교육비(21조원)의 3분의 1입니다. 그리고 부산시의 2010년 예산(7조8000억)에 거의 맞먹는 엄청난 돈입니다. 학원이다, 국제중이다, 연수다 해서 어린 학생뿐 아니라 대학생, 직장인까지 영어에 광기 어린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무엇을 얻었습니까?
제 지인 하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 교육을 마치고 한국에서 유명한 회사를 다닙니다. 그 회사 부장님도 영어를 매일같이 공부한다더군요. 외국인도 회사에 있고, 외국 기업과 왕래도 많아 회사에서 영어를 강조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영어로만 회의를 한답니다. 그런데 회의를 다 하고 나서 같은 회의를 또 한답니다. 이번엔 한국말로요. 아니면 제 지인에게 와서 무슨 회의를 했느냐고 물어본답니다. 물론 조용히요. 광기 시퍼런 영어 투자의 초라한 성적표입니다.
하지만 우린 자신의 초라한 영어 실력을 자책하며 영어 공부를 계속합니다. 아침 라디오를 들어도, 거리의 광고를 봐도 온통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반복합니다. 옆집 애도 연수 갔다 오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뿐입니까? 티브이 쇼를 봐도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가수가 나옵니다. 영어를 못하면, 내 잘못인 듯하고 자괴감은 커져만 갑니다. 하지만 이건 사기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기당한 것입니다.
영어는 우리말과 완전히 다른 언어체계이자 사고체계이기도 하고, 하나의 문화입니다. 문법을 익히고 회화를 연습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제 영어의 밑천은 대학원 수업이었습니다. 영어로 글을 쓰고 토론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식 사고와 문화를 익혀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절박함이 영어선생이었던 셈이죠. 두 시간 죽어라 공부하고 나머지 22시간, 꿈까지 한국말로 꾸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불가능한 것을 하려니 다들 힘들고 괴롭고 돈만 듭니다. 영어는 여건이 되는 사람만, 필요한 사람만 하면 되는 것이죠. 산책을 즐기면 되지 모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국 사회는 성공하려면 무조건 영어를 하라고 강요합니다. 심지어 동양철학을 공부하려고 해도요. 말도 안 되는 것을 왜 강요하느냐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사전에 막는 것은 강요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너도 할 수 있다는 달콤한 사탕발림은 그들의 가장 큰 무기이자 당하는 사람들에겐 처절한 사기입니다.
그들은 영어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미국 교육으로 승진하거나 남보다 많은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영어로 이미 득을 본 사람들이고 자식들에게 미국 문화를 통째로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사회 전체의 영어 숭배가 자기들의 이익인 셈이지요.
한국에서 영어의 고질적 병폐가 고쳐지지 않는 것은 교육의 문제로 보고 교육에서 답을 찾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영어의 문제는 계급과 정치의 문제가 된 지 오래이고 답도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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