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5.02.25)
케첩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미국에 와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것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라디오 음식방송에서 소개하는 것을 통해서야 알았다. 두어 세대 전만 해도 집집마다 토마토케첩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덕분에 김치가 집집마다 맛이 다르듯 케첩도 제각각 전통의 맛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런 집은 보기 드물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브랜드의 케첩을 다들 사 먹는다.
케첩이야 원래 서양 것이니 그렇다 쳐도 어묵도 만들어 먹는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음식이다. 부모님이 부산지역 분들이어서 어묵을 즐겨 먹었다. 슈퍼에서 사 먹고, 길거리에서 사 먹고, 심지어 유명한 부산지역의 어묵집에서 주문해서 먹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도 어묵을 만들어 먹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어느 집에서 식사를 하더라도 어묵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차승원이라는 배우가 케첩과 어묵을 쓱쓱 만들어 내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콩나물국이나 매운탕을 맛있게 끓이는 것(물론 이것도 놀라운 장면이었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신선한 충격을 받은 시청자가 나뿐이 아닌 듯하다. 주변의 반응도 비슷하고 그 인기는 높은 시청률로 나타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가만히 돌이켜 보면 딱히 재미나는 사건이나 게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장소를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지역주민의 삶도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아주 기본적인 모습을, 그것도 요란하지 않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왜일까?
나는 이 인기가 요리라는 기본적인 삶의 요소에서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소외시켰는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식품, 외식산업도 2002년부터 2012년 사이 두배로 성장을 했다고 한다. 둘러보면 들어서는 것은 음식집이나 마시는 곳이기 쉽다. 개업을 구상할 때도 다들 치킨집이다. 김치산업, 도시락산업, 반찬산업, 모두 산업화되고 있다. 그만큼 요리는 소비의 대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고 정성스레 만들고 같이 먹는 것은 같이 먹는 입, 즉 식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자 즐거움이다. 공공보건의 관점에서도, 쓰레기 처리 관점에서도, 지구온난화 관점에서도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현실은 이렇다. 부모는 각각 직장에 나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어딘가에 맞겨져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피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음식을 준비하고 같이 즐겁게 먹는 것은 쉽지 않다. 주말이나 쉬는 날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환경에서 틈을 내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있나. 그만큼 요리는 최소한의 과정만 거치게 되고 대부분의 과정을 소비로 대체하는 것이다.
노동의 환경이 나은 이들도 사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맛집을 찾아 차를 몰고 다니고 수입 와인을 맛보는 클럽에서 모임을 즐긴다. 더 비싼 음식, 더 비싼 와인을 찾게 되고, 더 많은 소비를 자랑스러워한다. 혀는 즐거울 테지만 결국 소비다.
밭에서 파를 뽑고, 토마토를 끓여 케첩을 만드는 것에 열광하는 우리는 그만큼 통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얼마만큼 즐거운 것을 잃고 살고, 빼앗기고 살고 있는지 무의식중으로나마 확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