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29, 2015

[시론]‘삼권분립’ 무색한 대한민국

경향신문 2015-06-29

클린턴 대통령 37회, 부시 대통령 10회, 오바마 대통령 3회. 이건 다름 아닌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입니다. 트루먼 대통령 때부터 치면 총 794회, 미국 건국부터 치면 무려 2564회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의회에서 만들어지지만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줌으로써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에 긴장과 균형을 제도화한 것은 삼권분립이 기본인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합니다. 어느 한쪽이 비대한 권력을 갖게 될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의회가 뒤집을 수 있는 것 또한 비슷합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헌법에 쓰여 있는 것도 두 나라가 같죠. 하지만 거의 같은 제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또한 미국과 한국인 듯합니다.

애초에 긴장과 균형을 권력자 사이에 불어넣고자 했던 것이니만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대통령과 의회 사이를 껄끄럽게 하죠.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3월 말 공화당 주도의 의회가 보낸 노동조합 선거 규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정적인 공화당의 베이너 국회의장은 이에 대해 경제성장은 뒷전이고 정치적이기만 한 대통령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며 독설을 뿜었습니다.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은 2008년 거부권을 행사했던 법안이 의회에서 3분의 2가 훨씬 넘는 표를 받아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죠. 부시의 공화당 의원들도 거든 결과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기쁠 리야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의회가 합의를 해서 법안을 처리하는 것은 민주체제의 꽃이라 할 수 있고 칭찬받을 일입니다. 그 법안에 문제가 있다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죠. 그럼 의회로서는 재심을 하거나 말거나 하면 됩니다. 이번 국회법 개정안 처리도 그럴 수 있었죠. 그래야 했습니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말이죠.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의회의 고유 권한인 입법행위를 ‘배신’이라며 치를 떨었고 야당과의 합의를 이끈 유승민 원내대표를 ‘심판’하자며 정치적 협박을 했죠. 청와대의 진노는 새누리당의


‘송구’와 ‘죄송’으로 이어졌고, 유승민 원내대표의 퇴진을 둘러싼 여진은 정당을 흔들었습니다. 정당한 입법활동에 대통령이 진노하고 국회의원을 공공연하게 뒤흔드는 일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면 상상도 못할 것이죠.

어이없는 사태이지만 한국의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준다는 데서 그 위로를 찾아볼까 합니다. 이번 거부권 행사는 역대 73번째로서 비슷한 기간 미국의 794회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왜일까요? 이는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가 주종의 관계이다시피 했던 불행한 현대사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을 시작으로 박정희와 군대 후배들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김영삼, 김대중의 시대에도 대통령은 곧 주요 정당의 절대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행정부의 수반이자 입법부의 지도자였던 것이죠. 덕택에 이들은 제왕적 대통령의 지위를 누렸고 삼권분립이 무색해지는 전통이 이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이번 사태는 민주제도라도 이를 운영하는 자가 작심을 하고 달려들면 충분히 비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이 가고 누가 오더라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제도의 보완이 시급한 숙제라고 하겠습니다. 소수의, 다양한 목소리가 의회에 넘쳐나고 합의가 일상적일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작심하고 달려드는 권력자들을 막을 수 있는 길, 그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민중의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제도를 당장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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