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인 오늘, 뉴욕타임즈에 한인이세의 글이 실렸습니다.
일제와 한국전을 겪은 의사가 미국에 와서 추운 미네소타에서 정착하기까지 겪은 훈훈한 이야기죠. 추방 당한 뻔 했지만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불운을 면하고 미국인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그 분은 한국말도 쓰지 않고, 한국문화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죠. 가장 미국적인 명절인 추수감사절은 저자에게 그래서 더욱 추억이 많은 명절인 듯 합니다. 댓글도 따뜻한 이야기다, 고맙다 등 훈훈한 분위기였습니다.
읽는 내내 이민 일세로서 저도 그 아버지의 고통과 좌절, 걱정, 결심 등이 상상이 가더군요.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계속 불편했습니다. 그만큼 미국인이 되기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아버지가 버렸는지, 이 저자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였습니다.
한국인이여서 그걸 자랑스러워 해야한 다거나, 꼭 한국의 무엇을 해야한다거나 생각치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애써 묻어버려야 했던 그분의 쓸쓸함이 상상이 간 것이죠. 물론 저만의 상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분의 추수감사절이 행복하고 미국적인 만큼 그 쓸쓸함이 깊어 보이는 것은 같은 이민일세의 신세인 저의 쓸쓸함이 괜시리 이 글로 스며들어 그런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Thursday, November 27, 2014
Sunday, November 9, 2014
기대와 실망
사람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의 연속이다. 기대에서 오는 실망이 가장 큰 슬픔과 괴로움의 근원일 수 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부모는 부모라서 자식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식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가 무너지는 여러가지의 신호를 자식이 보내면 큰 실망이 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신호가 옳은 것인가? 신호가 옳은 것이고 내가 해석을 잘 한 것일까?
아이들은 아이들이여서 부모의 기대만큼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부모의 공을 보는 것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보내는 공이 100이라면 30정보 보면 대단한 아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애가 60을 보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가 아니라 욕심이 아닐까.
아이가 50을 보고 있어도, 즉 아이들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것을 보고 있어도 보고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전달을 못할 수도 있는 법이다. 만약 그렇다면 성급하게 실망을 들어내는 것은 부모의 큰 실수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30, 아니 그보다 더 작은 것을 보는 아이일 수 있다. 즉 내 실망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경우가 되었건 부모는 참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건 자식, 나에게 전적인 의지를 하고 있는 힘없는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인내하며 고뇌하는 하루를 보낸 부모들에게 박수를!
부모는 부모라서 자식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식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가 무너지는 여러가지의 신호를 자식이 보내면 큰 실망이 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신호가 옳은 것인가? 신호가 옳은 것이고 내가 해석을 잘 한 것일까?
아이들은 아이들이여서 부모의 기대만큼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부모의 공을 보는 것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보내는 공이 100이라면 30정보 보면 대단한 아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애가 60을 보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가 아니라 욕심이 아닐까.
아이가 50을 보고 있어도, 즉 아이들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것을 보고 있어도 보고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전달을 못할 수도 있는 법이다. 만약 그렇다면 성급하게 실망을 들어내는 것은 부모의 큰 실수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30, 아니 그보다 더 작은 것을 보는 아이일 수 있다. 즉 내 실망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경우가 되었건 부모는 참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건 자식, 나에게 전적인 의지를 하고 있는 힘없는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인내하며 고뇌하는 하루를 보낸 부모들에게 박수를!
Wednesday, November 5, 2014
[기고]오늘의 한국, 민주체제 맞습니까?
경향신문 (2014-11-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32032245&code=990304민주체제에서의 정치가 권위주의체제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민주체제는 공정하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해 지도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불편함과 불확실성을 준다는 데에서 그 정치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치란 것이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이라는 것은 민주체제나 권위주의체제나 같죠.
민주체제에서는 정치엘리트 사이의 투쟁은 선거로 결판을 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도적 기제가 없는 권위주의체제에서는 무력을 동반한 암투가 흔하죠. 여기서는 정치엘리트와 인민의 정치투쟁도 폭압적이고 일방적입니다. 민주체제에서는 이런 수직적 정치투쟁도 상대적으로 평화적이고 덜 일방적입니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것일 뿐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민주체제는 그 싸움을 조금이나마 균형 있게 하는 장치들을 허용하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립적인 언론입니다.
정치엘리트와 민중 간의 수직적 정치투쟁은 미국에서도 일상적인 것이죠. 1971년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만행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정부는 이를 국가안보의 위협이라면서 보도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치열한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은 신문사들의 손을 들어주죠. 곧이어 닉슨 대통령과 신문들은 소위 워터게이트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결국 1974년 닉슨 대통령은 사임하죠. 이 두 사건은 미 행정부, 특히나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미국 사회 전체가 심각한 재고를 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승리 뒤에는 한 사람이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지난 10월21일 93세로 세상을 떠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자 벤 브래들리였습니다. 그는 진실에 대한 끈질기고 열정적인 추구로 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습니다.
브래들리의 진실에 대한 추구는 워싱턴 포스트를 권력자를 감시하고 민중에게 힘을 실어주는 민주체제의 파수꾼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은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훈장을 그에게 수여하였습니다. 강력하고 독립적인 언론이 민주체제에서 그만큼 소중한 것임을 권력자조차 인정한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력하고 독립적인 언론은 민과 권력자들의 정치투쟁에서 최소한의 지원군일 뿐입니다. 민중의 힘은 권력자의 그것에 한참을 못 미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시민들은 최소한의 지원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권력자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언론은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고 사정기관들은 민중의 감시에만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에 나서는 것마저 정부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판에 조용히 하지 않으면 법에 걸리게 생겼죠. 박근혜 정부는 민주체제가 그나마 허용하는 민의 권력을 축소하는 데 열을 내고 있다고 짐작하게 합니다. 대통령에 대한 조롱도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고 대통령의 신임을 업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한국, 권위주의체제로의 미래가 그리 머지않아 보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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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4, 2014
풋볼, 미국정치 양극화의 또하나의 모습
Football, the Newest Partisan Divide - NYT (NOV. 4, 2014)
풋볼이 보수층과 진보를 가르는 새로운 척도로 떠올랐다는 기사가 흥미롭습니다. 부상 등 이슈가 되자 풋볼을 하는 학생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요즘 뇌진탕으로 학생이 죽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이 되고 있죠. 문제는 진보적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일 수록 아들들의 풋볼을 더더욱 꺼려한다는 것이죠.
기사에서 지적하듯 사실 풋볼은 거의 세속종교의 위치에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모이고, 숭배하고, 이를 중심으로 작은 사회가 구성이 되는 등 종교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죠.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종교적 위치를 유지한 풋볼의 그 지위에 서서히 금이가기 시작한 듯 합니다. 물론 그 세력이 한동안은 지속되겠지만요.
또한 경제적,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또 한번 확인한 듯 해서 씁씁하네요.
풋볼이 보수층과 진보를 가르는 새로운 척도로 떠올랐다는 기사가 흥미롭습니다. 부상 등 이슈가 되자 풋볼을 하는 학생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요즘 뇌진탕으로 학생이 죽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이 되고 있죠. 문제는 진보적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일 수록 아들들의 풋볼을 더더욱 꺼려한다는 것이죠.
기사에서 지적하듯 사실 풋볼은 거의 세속종교의 위치에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모이고, 숭배하고, 이를 중심으로 작은 사회가 구성이 되는 등 종교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죠.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종교적 위치를 유지한 풋볼의 그 지위에 서서히 금이가기 시작한 듯 합니다. 물론 그 세력이 한동안은 지속되겠지만요.
또한 경제적,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또 한번 확인한 듯 해서 씁씁하네요.
Sunday, November 2, 2014
드가의 '소녀댄서'
가을이라 단풍놀이겸 읍내에 다녀왔습니다. 아내의 제안 덕에 오랫만에 내셔널 아트 갤러리를 갔습니다. 주로 보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잘 있나 확인하고 드가의 특별전으로 향했습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은 익숙하지만 미술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드가의 조각은 생각도 못했죠. 덕분에 그 충격은 신선하고 유쾌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거친 드가의 손길이었습니다. 매끄럽고 하얀 피부대신 드가는 이 소녀의 몸을 어둡고 거칠게 표현했습니다. 마치 화폭에 붓자국이 남은 그림을 보는 듯 했죠. 그런 거침은 그녀가 겪었을 힘든 연습과 삶과 맞겠다고 혼자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지 그 작은 몸집이 더더욱 당당해 보이더군요.
전시관은 이 작품의 연습인 듯한 조각과 다른 발레 그림도 전시되어 있고 그 중 한 사진은 이 조각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진도 전시되 있어 흥미로왔습니다. 그 속을 보니 조각으로서 볼 법도 한데 어쩐지 더 사람같더군요.
한참을 들여다 보고서야 곧 몸풀기를 마치고 담담한 얼굴로 연습을 시작할 듯한 발레리나와 아쉬운 작별을 했습니다.
National Gallery of Art October 5, 2014–January 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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