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9.01.10 20)
미국 연방정부 예산이 처리되지 않아서 필수 분야를 제외한 업무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지 3주가 다 됐습니다. 멕시코 국경 장벽이 이 사태의 발단입니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아무 소용도 없지만, 정치적 이유로 이를 세우겠다는 트럼프 대통령과 야당인 민주당 주도의 의회가 충돌한 겁니다. 트럼프가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탓에 이런저런 탈도 많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엉뚱한 질문을 던지곤 하죠.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후 미군 한국 배치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매년 35억달러나 쓰면서 남을 지켜주는 게 장사꾼 트럼프로서 이해가 안 갔던 겁니다. 당황한 참모들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이해시키려 안간힘을 썼죠. 한 경제참모는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항공모함을 더 배치해야 하며 10배가 넘는 돈이 든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정부 협조 덕에 민감한 첩보도 덤으로 얻는다고 했죠.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은 미국 안보를 위해 매년 40억달러를 후원하는 셈이라고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트럼프의 엉뚱한 질문이 주한미군의 가치를 조명해준 셈입니다.
그 가치는 ‘미국’ 수호입니다. 미군이 미국 이익을 위한다. 이 간단하고 명확한 사실이 유독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군이 한국을 수호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를 것처럼 믿기도 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2017년 4월 이제는 고인이 된 매케인 상원의원과 그레이엄 상원의원을 백악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조언을 구했습니다. 매케인은 “아주 복잡합니다. 북한 재래식 무기 도발로 서울 시민 100만명이 사망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그레이엄은 “100만명이 죽는다면 여기 말고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라고 맞섰죠. 미국 매파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군 주둔은 한국 안보가 그 목적이지만, 한국 안보만을 위하지 않습니다. 애초 주둔 결정도 한국 안보보다는 한국전쟁을 빨리 끝내고 지역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휴전 협정이 마무리되어가자 불안해진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휴전협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미국을 위협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 등 일련의 시위까지 벌이고서 얻어냈습니다. 이 조약은 미군의 남한 주둔 근거가 됐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왔던 미군은 또 그렇게 떠날 겁니다. 영원히 있기야 하겠습니까? 설마 그러랴 하겠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수백년 동아시아를 호령한 청 왕조도 19세기가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졌고, 청일전쟁 패배로 조선에서 군사를 물렸죠.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정권을 지키던 소련군도 무자히딘의 저항에 철수했습니다. 이라크전쟁에서 승리한 미군도 정치적 비용이 커져 철수했죠. 필리핀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1986년 민주혁명으로 탄생한 아키노 정권은 100년간 주둔한 미군에 결별을 선언했죠. 민주체제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민족주의가 정치권을 움직인 덕이었습니다. 미국은 주둔 연장을 사정하며 수억달러를 제시했지만, 필리핀은 거부했습니다. 미군 주둔지 경제, 즉 상권, 임금 등의 손실도 감수하고 말이죠. 자의건 타의건 미군은 한국에서도 떠날 겁니다.
안 가본 길을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곳을 찾고 먼저 가보는 게 지도자의 책무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삐걱대고 있습니다. 9600억원 수준인 한국 분담금을 1.5배, 즉 1조4000억원 정도까지 올리려고 한다죠. 다른 나라에 비해 이미 높은 수준을 부담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당장 한·미동맹을 걱정하는 절규가 터져 나오고 협상은 지지부진합니다. 한국 정부가 이렇게까지 끌려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주한미군을 더 요구하는 게 혹시 미국 아닐까요? 미군이 떠난다고 북한이 쳐내려올까요? 중국이 미사일을 쏠까요? 일본군이 독도를 점령할까요? 미군을 언제,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한·미동맹을 건국신화로, 종교로 숭배하며 반세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고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미국 눈치를 안 볼 수야 없겠죠. 하지만 새로운 사고와 유연한 상상력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2018년 남북 화해는 1953년에 화석처럼 굳어버린 동아시아 정세 전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 변화에 휩쓸리는 대신 변화를 이끄는 정부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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