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1, 2014


<영어계급사회> 남태현

오월의봄 2012년 02월 07일


http://www.yes24.com/24/goods/6277458?pid=131297&art_ch=19432







왜 한국인은 평생 영어를 공부해야만 하는가?
영어를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세계화’ ‘국가 경쟁력’의 허구를 밝히고 대안을 찾아본 책

흔히 세계화된 사회에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영어가 필수라고 말한다. 과연 이 이데올로기는 맞는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는 진짜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일 뿐이다. 우리는 미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고, 미국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왔을 뿐이다. 이토록 영어를 숭배하는 것도 미국화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미국은 이미 조각 난 하늘일 뿐이다.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진정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고 싶다면 영어도 일본어, 프랑스어, 러시아, 아랍어 등과 같이 하나의 외국어로 간주해야 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우선 대학입시에서 영어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를 다른 외국어와 동등하게 대우해 똑같은 점수를 책정해야 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원시험에서 영어를 필수과목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꼭 필요한 부서에서만 영어를 필수과목으로 하고 나머지는 영어를 아예 보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보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전 국민이 똑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계급 간의 격차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이와 더불어 경쟁만능주의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모순도 처방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고승덕 후보 딸의 ‘폭로’와 한국의 ‘패거리 문화’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6-01

http://insight.co.kr/content.php?Idx=3345&Code1=001


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딸 고희경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리 남매를 버리고 돌보지 않은 내 아버지 고승덕은 서울시교육감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며칠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고 후보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고 앞으로 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고희경씨의 주장에 고승덕 후보도 할 말이 있을테죠.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주관적인 것이므로 양측의 주장을 들어보고 잘 판단을 할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딸이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고희경씨의 이름은 캔디 고로서 미국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생활을 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고씨의 글도 간결하고 명확한, 좋은 영어로 작성이 되었습니다. 고씨의 지적에 따르면 고후보는 가족을 돌보는데 일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금전적 도움은 고사하고 옆을 지켜주지도 않았고 연락조차 완전히 끊은 채, 사실상 두 자녀와 처를 완전히 내팽개친 것으로 보입니다. 고씨의 주장은 이러한 고 후보의 개인적 행위를 볼 때 다른 자리도 아닌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으로서 고후보는 적합지 않다는 것이죠.

이러한 비판은 고후보의 자질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단서의 일부이며 유권자로서 꼭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씨가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능했겠죠. 하지만 여러분 모두가 짐작하시듯, 그 가능성이라는 것은 사실 한여름 해운대에서 군고구마 찾는 것만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헛점이 너무나 많아 공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한국의 풍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본능적으로 나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연민의식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한국사회에 오래 뿌리를 내린 소위 유교적 전통에 따른 부모 공경의 의무감또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집단을 배신한 개인에 대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한국에선 중요한 것이죠. 이런 식의 공포는 사실 조폭들 뿐 아니라 조직을 중요시 하는 한국사회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선배를 무시한 후배, 고참을 깐 신참, 상사를 재낀 회사원들의 삶이 고달픈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조직의 화합을 해쳤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형태의 형벌을 받습니다. 더우기 형벌은 그 집단 내에서 그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죠. 덕택에 집단의 단결은 공고해 지지만 집단의 결함 또한 깊어지는 까닭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갖고 있지만 누구도 쉽게 던저버리지 못합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니까요. 게다가 적당히 굴러갈 때 떨어지는 떡고물 (연대감, 술자리, 자리, 이권 등) 또한 작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쩌다 한번씩 보는 영웅적 굴레 던저버리기에 환호하게 됩니다. 히딩크 감독의 서열무시에 우리는 찬사를 보냈고, 박칼린의 합리적 지도력에 감탄했습니다. 이들 모두 연줄, 서열 등을 무시한 채 개개인의 능력만을 보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그 집단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는데 새삼 놀랐던 것이죠.

이들의 리더십을 배우자는 열기는 뜨거웠지만 냄비처럼 식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집단에의 중독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오늘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집단의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요. 일의 능률과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되고 우정과 의리가 쌓이고 쌓여 우리는 세월호 참극을 맞았습니다. 끊임없는 향응과 접대로 쌓아온 집단의식은 그 어떤 규제와 법률, 양심도 무너뜨릴만큼 지독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한 정치의식 또한 마친가지입니다. 정치지도자의 공과는 상관없이 우리편만 찍어온 우리내의 정치는 이제 우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남을 욕할 일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집단의 중독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요?

우리가 절실한 것은 이 집단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대신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토론하고 고처가고, 심지어는 법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지만 산은 산이라하고 물은 물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 이의 세월호 참사, 제 이의 삼풍 백화점 붕괴, 제 이의 성수대교 붕괴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고희경씨에게 힘든 결정을 한 것에 대한 감사와, 아버지가 없어 느꼈던 고통에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Friday, May 16, 2014

선거를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한 심판 나타날까?


선거를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한 심판 나타날까?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5-16


http://insight.co.kr/content.php?Idx=2805&Code1=001




6·4지방선거 후보 등록이 오는 15~16일 이틀간 진행됩니다. 본격적인 선거전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온 셈이죠. 지방자치의 수장을 뽑는 일이니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재정을 바닥내는 자치단체장도 있고 반면에 여러 정책으로 지방정부를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이도 있으니 살펴볼 것이 많죠.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아무래도 세월호의 여파를 피하지 못할 듯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죠.

이미 새정치연합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는 6일 기자회견을 갖고 특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김한길 대표는 “희생자 유가족들이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며 “살릴 수 있었던 아이들과 승객들을 살려내지 못한 책임을 가리는 일은 정부에서 자유로운 특검이 맡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이 바탕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야당으로서는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세월호 여론을 선거 때까지 끌고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생각이고, 야당의 책임이라고 할 것입니다.

정부와 여당으로서는 지방선거와 겹치는 시기이니 이러한 요구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이 “사고 수습 이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역풍에 휘말리자 이를 덮으려는 듯 대통령과 여당을 향해 비겁한 정치공세를 벌이고 있다”며 청와대를 엄호한 것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반응이었습니다. 사고수습을 강조함으로 해서 세월호 사태와 지방선거를 할 수 있는 만큼 분리해 역풍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 또한 여당으로서는 당연한 바람입니다.

정략적 이용


또한편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한 듯 지난 2일 새누리당 당원 등에게 대량 발송한 문자에서 “지금 박 대통령께서는 세월호 참사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힘들어하고 있다”며 “여러분들이 찬바람 속에서 언 발 동동 구르며 만들었던 박 대통령을 저희가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박심을 역설했습니다.

한쪽에서는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여론으로 곧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극대화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박 대통령을 감싸거나 그를 중심으로 뭉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자연히 보이는, 낯익은 풍경입니다.

세월호로 분노한 국민들은 이러한 정치인들의 정치놀음에 지레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여야 모두 이번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한다고 양비론을 들이댈 수도 있죠. 정치는 정치고 지역 일꾼을 뽑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또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이번 세월호 사태는 어느 특정 지방 행정의 수장이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월호 침몰이 처참한 일이긴 하지만 지방선거와는 별도의 일이라고 억울한 하소연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소리입니다. 세월호 사태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었던 청와대, 안전행정부, 해양경찰청 등 중앙국가 기관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서울 시장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 그 후보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이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얼핏 보면 불합리할 수도 있는 이런 현실은 우리 정치체제의 현실과 맞물려 있습니다.

한국의 유권자는 중앙국가 기관에 책임을 물을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기관의 수장 즉 장관이나 대통령의 잘못은 물을 수가 없죠. 장관이야 여론을 통해 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지만 이미 선거를 이긴 상황에 재선의 걱정이 없는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책임을 묻게 하는 방법은 전무합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는 잘 느끼지 못하는 듯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국정운영에 큰 실망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철옹성 같던 지지율도 40%대로 떨어졌죠. 세월호 침몰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과 비슷한 40대 유권자들에선 더 큰 폭으로 지지율이 떨어졌습니다. 침몰 후 사태 파악에도 미숙했고 관료들뿐 아니라 내각의 장악력도 희미했음을 들어냈습니다. 구조, 원인 조사, 피해자 가족 관리 등 당장 해야 할 정부의 과업뿐 아니라 민심을 달래야 할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의무도 하지 못하는 낯뜨거운 장면만 연출했죠.

정치 참여


대통령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못을 하고 무능한 것으로 드러나도 대통령은 헌법이 규정한 임기를 보장받게 되어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까요? 설사 내각이 총사퇴를 한다 해도 그것은 내각의 사퇴이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위치와 권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이러한 한국의 정치체제하에서 유권자들이 불만을 표시할 다른 방도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시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정치의 참여는 거리뿐 아니라 투표소에서도 진행됩니다. 바로 다음 달의 지방선거가 그 예일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 새누리당이 크게 패한다고 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새누리당이 달라지도 않을 테죠. 이번 세월호 사태를 통해 드러난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적폐’가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성난 민심을 보여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많지 않은 정치참여의 중요한 통로이자 바로 민주체제의 근간입니다. 선거를 비롯해 여러 경로를 통해 성난 민심이 드러나고 이는 정권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 분명히 전달해야 합니다.

만약 이번 사태에서 이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체제 그 자체의 정당성을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죠.

정부와 여당은 이 심각성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Monday, April 28, 2014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시론]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 남태현
한겨레 2014.04.28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34864.html

요즘 미국에선 네바다주의 클리븐 번디라는 목장주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정부의 땅에 자신의 가축을 방목하면서도 정부에 돈을 내지 않아 가축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번디는 총을 든 지지자들과 함께 가축을 압수하러 온 연방정부 요원들과 무장 대치를 했습니다. 충돌을 피하고자 정부가 오히려 철수를 하고 맙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연방정부의 간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폭스뉴스> 등의 반오바마 정서 등 여러가지로 논할 것이 많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과 회의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 역사의 특수성 때문일 수 있지만, 어찌되었건 이런 논란 속에 미국민은 연방정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국민과 지방정부, 연방정부 사이에 긴장을 유지합니다. ‘연방정부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며 복종과 희생을 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간 의아한 눈초리와 비웃음을 사기 쉬운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국가가 있어왔죠. 그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정부죠. 정부는 그래서 국가와 동일시되기 일쑤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역사의 부침이 남다른 곳에선 국가와 정부의 존재는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주체라기보다는 내가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국가와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삼가하는 이유는요?

국가와 정부는 왜 존재할까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책을 보면, 국가가 없던 시절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죠.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며 간신히 생존해야 했으니까요. 개인들은 결국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대신 국가라는 괴물을 섬기며 안위를 택합니다. 결국 국가의 존재는 개인의 안위를 보장함으로써 성립, 성장, 유지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안위를 보장치 못하는 국가와 정부는 도전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가 시위하는 자국민을 향해 발포하자 더욱 거센 저항을 받은 것은 한 예라 할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박근혜 정부는 무능하다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대응을 했습니다. 구조활동만 보더라도 침몰 직후 정부는 혼란과 관료주의 탓에 오히려 구조활동을 방해만 했습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 감독해야 할 박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람들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만 성공했습니다. 그사이에 수백명의 생명이 울부짖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번디처럼 총을 들고 나서는 무지한 용감함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수백명이 죽는 것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게 하는 정부를 왜 지지해야 하는가? 국민을 지키지는 못하면서 억압할 때만 쓰는 공권력을 왜 용납해야 하는가? 전국민을 이렇게 분노케 했으면 그 정부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사과와 개각, 선거의 패배로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일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애도를 지나 조사, 법적 조치가 따르겠죠. 하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은 정치적 논의를 통한 정치적 처벌과 정치적 개혁입니다. 그것 없이는 지도자들은 또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 웃는 얼굴로 비릿하게 군림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고통을 또다시, 반드시 겪게 될 테니까요.

애끓는 가슴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Thursday, April 17, 2014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4-17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622&Code1=001


예상했던 대로 안철수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지요. 한국에서 컴퓨터라는 물건을 만져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V3라는 안철수의 놀라운 바이러스퇴치 프로그램을 써보았을 테고 이를 공짜로 나눈 그의 배짱과 긴 안목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의사로 시작해 컴퓨터엔지니어로,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로서 그의 성공적 삶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고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서울 시장과 대통령의 자리를 노렸을 때 흥분했습니다. 아마도 제대로 된, 상식적인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성원에 힘입어 이제 그는 당당히 야당의 한 대표로 성장했습니다. 민주당에 통합의 한 축으로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가 된 것이죠. 제일 야당을 이끌던 김한길 대표가 오히려 밀리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안철수가 가지는 대권후보로서의 잠재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안철수가 갖고 있는 정치적 가능성은 큰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안철수의 새 정치라는 것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요? 기초선거에 정당공천을 하지 않겠다던 그가 결국 새 당내의 볼멘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국민에게 사과를 구했습니다.

박근혜의 공약파기로 인해 생긴 소동인 만큼 비난을 받는다면 박 대통령이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 초등학생도 알 일입니다. 문제는 모두들 이를 갖고 안철수의 새 정치가 퇴색되었다고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어쩌면 안철수 본인마저 기초선거의 정당공천 문제가 새 정치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정당공천처럼 사소한 일이 새 정치의 몸통이라는, 초라한 현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대선의 공약이라는 것이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닙니다. 후보자가 그럴싸한 공약으로 민중의 환심을 사고 권력을 얻은 후에 껌 종이 버리듯 무시하는 행태는 민주체제의 맹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의 고집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죠.

안철수의 실망스러운 고집


사실 대통령이 공약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자기네는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치인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철수의 그 고집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 공약에의 고집은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철수의 대선공약집을 보면 “기초단체장이 해당 선거구 국회의원에게 예속돼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에 종속”되고 “정당공천으로 인한 공천비리 및 부패 만연”되어 “현행 지방자치제도는 풀뿌리 자치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진단하며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국민이 애초에 간절하게 원한 것은 아니었죠. 이 문제에 대해 민중이 깊은 이해를 하고 변화를 갈구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그는 대선을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대통령이 되면 이런저런 것을 하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이 되지 않은 이 마당에 그 약속이라는 것은 개인적 철학의 문제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신뢰와 철학을 위해 당 전체의 운명을 볼모로 대통령과 맞서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고집은 있지만 전략적 사고가 부족함을 엿보게 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 고집을 국회의원 노무현이 질 것을 알면서 서울의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에서 국회의원 자리를 노린 것에 비유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맞지 않는 비유죠. 노무현은 자신의 자리를 걸고 도전했지만 안철수는 남의 자리를 걸고 도박을 했으니까요.

둘째로 그 고집이 보여주는 새 정치의 폭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 훌륭합니다. 정치인들이 쉽게 약속을 어기는 마당에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 것, 새롭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요? 과연 그가 말한 그의 새 정치는 무엇일까요?

그가 내놓은 대선 공약집을 보면 국민을 섬기는 정부, 공공기관의 혁신 등에서 교육, 문화로 이어지는 그의 비젼은 매력적이지만 과연 이게 새 정치인가하는 의문을 없애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강령/정강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근사한 말은 있지만 그것뿐입니다.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곧 새로운 정치일까요?

참신한 아이디어는 새 정치에 필요한 부분이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이들의 말을 잠시 내려놓고 하는 ‘정치’를 보면 새 정치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입니다. 안철수가 한 정치라는 것은, 선거의 승리라는 아주 전형적인 목표를 위해 통합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으로 양당구조라는 전형적인 지형을 구축한 것이죠. 즉 안철수의 정치는 아주 구태의연하며 전형적이고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비극이 이런 실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비극은 안철수는 아직도 자신이 새 정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냥 막연히나마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죠. 더 큰 비극은 정치인들이 짜놓은 그 좁디좁은 새 정치의 틀에 갇혀 어떤 것이 새 정치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나래마저 꺾여버린 우리의 처지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새 정치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요?

Wednesday, March 5, 2014

安 비판마라, 걱정할 일 따로 있다

安 비판마라, 걱정할 일 따로 있다 - 남태현
Insight 2014-3-5

http://insight.co.kr/content.php?Idx=858&Code1=001


지난 3월 2일을 시작으로 한국 정치 뉴스는 거의 한 가지 소식만 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김한길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과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의 통합이 그것이었죠.

당장 있는 지방선거와 다가올 총선,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승리를 막고 새 정치를 구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워낙에 갑작스레 있는 일이어서였는지 논란이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논란들을 살펴보고 한국정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해보로록 하겠습니다.

안철수‧김한길, 밀실정치 구태 답습?


일단은 비난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조선일보(2014.3.3)가 말하듯 ‘구(舊)정치에 대한 새 정치의 백기 투항’이라는 비아냥이 그 것이죠.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안철수와 그의 세력은 민주당을 싸잡아 낡은 정치세력이라고 비난했더랬죠.

그러더니 며칠 사이 그 낡은 정치 세력과 통합이라니 놀랄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비난은 한나라당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에서도 들립니다. 정의당은 3월 2일 논평에서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양당기득권 독점체제를 깨고 '새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열망이 좌초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안철수 의원은 그동안 누차 양당독점체제를 허무는 새로운 정치를 주창해 왔으나 결국 스스로가 기득권 독점체제에 편승한 결과를 낳았다”고 했고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도 3일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신당 창당이 … 혁신 대상인 양당 기득권 체제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새정치) 명분은 상실됐다”고 꼬집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합당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들어난 밀실정치의 구태를 비판합니다. 공적인 정치세력의 합당이란 것이 가벼운 일일 수 없고 최소한 그 조직 내에서만이라도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절차가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밀실통합이었죠. 민주당의 김광진 의원은 "아니! 언제부터 민주당이 당대표 1인에게 당해산, 합당, 신당 창당의 권한을 줬냐"며 "이런 중대차한 일을 당원, 의원단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기자회견 5분 전에 '미리 상의하지 못해 양해를 구한다'는 문자하나 달랑 보내고 끝낼 수 있습니까"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새정치연합 윤여준 의장도 합당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린 2일 오전까지도 신당 창당 결정을 통보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체제의 핵심, 선거의 승리


이러한 비난과 실망의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민주체제의 핵심을 간과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체제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양당기득권의 독점체제를 깨는 것인가요? ‘새정치’를 구현하는 것인가요? 밀실정치를 타파하는 것인가요? 물론 이들 모두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민주체제의 핵심일까요?

민주체제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닌 선거의 승리입니다. 왕정체제에서도 당파정치를 깨는 것이 중요했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밀실정치를 욕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나라를 운영하는 이들의 숙제이었지 체제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왕위의 계승과 유지였습니다. 소위 민주국가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이런 저런 과업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 나라가 추구해야할 숙제이지 체제의 정체성은 아닌 것이죠.

민주체제의 정체성은 선거에서 나오고 권력은 선거의 승리에서 나옵니다. 숙제는 그 후에나 할 수 있는 것이죠. 즉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민주체제라는 것입니다. 이 당위를 곱씹어 본다면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망을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학생이 공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고 뭐라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합당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모두 선거에 고전할 것이라 예견되었었고 합당은 두 당 모두에게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인 것이었던거죠. 그런 면에서 합당의 목표나 대의가 불문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자신의 정치적 취향에 따라 야합, 정치공학, 구국의 결단 등으로 불리는) 합당은 늘 있어왔던 일입니다.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이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을 해 거대 여당을 만들어 정권을 재창출했습니다.

1997년의 대통령 레이스에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과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손을 잡고 신한국당의 이회창을 간신히 이겼습니다. 2002년엔 민주당의 노무현은 국민통합21의 정몽준과 과감하게 손을 잡으면서 이회창을 역전했죠. 합당 또는 그에 준하는 연합이 선거에 힘을 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입니다.

신당창당, 6‧4 지방선거에 활력


당장에 지지부진할 것으로 예상했던 야당의 지방선거에도 활력이 띄고 있습니다. “두 세력이 통합하면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확장할 여지가 많았고, 견제도 협력도 못하는 박근혜 정부와의 관계도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는 관계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경향신문 사설 3.2)가 있고 실제로 야당의 지지율도 치솟았습니다.

경향신문과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신당 지지율은 30%로 2월 21~22일 실시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나온 민주당 10.3%, 새정치연합 13.7%를 단순 합산한 24.0%와 비교할 때 지지율이 6%포인트 가까이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지율은 39.9%에서 39.3%로 0.6%포인트 줄어 별다른 변화가 없었죠. 새누리당에서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입니다. 야권이 민주당과 안철수 지지세력, 진보세력으로 갈갈이 나누어져 쉬운 싸움이 예상되었던 새누리당으로선 황당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왜 이렇게 정치판이 돌아가냐는 것입니다. 왜 계속 합당 또는 야합이 나타날까요? 이를 구태적인 정치라고 욕하던 이들도 합당을 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고질적인 병폐인 양당기득권 독점체제를 깨기’가 이렇게 힘든 것은 왜일까요? 질문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실 대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선거제도 때문이죠 (남태현 2014 <왜 정치는 우리는 배신하는가>).

우리의 선거제는 각 선거구에서 최대의 득표를 한 후보만이 승리하는 제도입니다. 당연히 승자는 한 명일 뿐이죠. 그 선거구에서 노태우 후보처럼 36.6%의 득표를 하건 박근혜 후보처럼 과반수를 넘건 일등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거꾸로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명만 이기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솔직한 지지보다는 전략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정당에 투표하고 싶어도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그나마 조금 더 비슷한 민주당에 투표하게 되는 것이죠.

‘새누리당보다는 낫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건 아니건 우리의 선거제도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표형태는 결과적으로 양당제를 공고하게 만듭니다.

한국의 양당제, 안철수 혼자 바꿀 수 없다


좌건 우건 이념의 잣대에 가운데에 서있는 두 정당 말고는 살아남기 힘든 것이죠. 노동정당의 지지가 민주당에 흡수되는 것처럼, 극우정당의 지지도 새누리당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 힘든 것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양당이 무슨 기득권을 조작하고 독점하는 흉계를 꾸미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레 제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거꾸로 양당제는 안철수 혼자 바꿀 수 있는 것도 애초에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실망을 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기대를 한 면이 큽니다. 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판에 반영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정당 둘이 사회의 다양성을 대변할 수는 없죠.

그러므로 다양한 정당이 정권을 다투는 건전한 민주체제를 이루는 길은 선거제도를, 그리고 더 나아가 헌법을 바꾸는데서 찾아야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번 합당을 보고 생각해봐야할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Tuesday, January 14, 2014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1-14

http://insight.co.kr/content.php?Idx=473&Code1=001

뉴스를 보면 ‘사람의 탈을 쓰고 어쩜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탄식을 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건 제 정신이 아냐’, ‘미친 거지’ 하고 혀를 차는 것 또한 흔한 일입니다. 멀리는 딱 20년 전 지존파의 엽기적인 연쇄살인행각이 있었고 작년에도 용인에서 엽기 살인이 있었습니다. 모두 도저히 제정신으로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범행들이었죠. 하지만 과연 제정신이 아니고 미친 사람들이나 끔찍한 일을 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테러 용의자들을 상대로 고문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나 침대에 꼼짝할 수 없이 누워 얼굴을 천으로 가린 채 물을 얼굴에 부어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따라서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물고문(Waterboarding)은 그중 악명 높은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고문이라는 용어 대신 ‘강력한 조사기법’이라고 부르며 합법화 했었죠. 십여 년이 지났지만 고문을 주도했던 미중앙정보국(CIA)의 당시 변호사 존 리죠는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그 조사기법들은 그 당시에도 고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미법무부에서 고문이라고 했다면 중앙정보국이 그런 기법을 이용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미국 내 다수의 목소리에 반하는 것이죠. 미국 내 인권단체까지 볼 것도 없고 우선 오바마 대통령부터 이러한 기법을 ‘고문’이라고 했고 더군다나 미군이 적군의 고문을 소개하는 문건을 보아도 그 ‘강력한 조사기법’들을 고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중들 또한 대테러전 초기만 하더라도 이를 고문으로 보는데 주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조사가 고문이라는 데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런 논란을 다 떠나서 자신이 그런 조사를 받을 상상을 해보면 누구라도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자연히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차분한 목소리로 고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리죠의 인터뷰는 어찌 보면 참으로 끔찍한 것입니다. 미친 사람도 아니고 아이비리그인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조지와싱턴 법대를 나온 수재가 고문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마치 법의 정의를 말하듯 하고 있으니까요.  

리죠를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지도자들의 이러한 확신에 찬 지휘하에서 감금, 고문, 살인, 사체유기 등 끔찍한 범행이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막가파’의 만행은 댈 것도 아니었던 것이죠. 이는 자연히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했고 미정부에 대한 신뢰마저 추락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은 고문과 더불어 정치체제를 약화시키는 이중의 심각한 죄를 저지른 셈인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끔찍한 비극은 미치거나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을 해하기 힘든 상황에 있고 정신질환으로 인해 상해를 가하는 경우에도 그 피해는 대부분 극히 제한적입니다.  나쁜 사람도 나빠서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일 뿐입니다. 정말 나쁜 일은 대부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착한 사람들이 벌이죠. 그리고 그 나쁜 정도가 더한 경우—피해자가 수천수만에 이르는 전쟁과 같은 예—는 비범하고 영특한 나라의 엘리트가 벌이는 경우가 거의 다입니다.

 둘째는 너무 끔찍해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라 해도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문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끔찍한 공권력의 행사임에도 미국사람들의 많은 수가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고문을 지지한 것은 좋은 예입니다. 더욱이 아직도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안타깝지만 그런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한민국, 정상적인 민주체제? 

 그런 면에서 1월 6일 하루에 접한 일련의 보도는 한국은 역시 사람 사는 냄새가 정말 진하게 나는 곳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자신을 선출한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권위주의적 행보를 거듭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간신히 마련한 기자회견에서도 “불법으로 막 떼를 쓰면 적당히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런 비정상적 관행에 대해 원칙적으로 대응하는 걸 ‘소통이 안돼서 그렇다’고 말하는 건 저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며 소통인지 호통인지 애매한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교육부의 엄격한 검정을 거쳐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전교조의 테러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나라는 자유대한민국으로 볼 수 없다”며 테러와 자유의 정의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날 한 보수단체 회원이 권총과 실탄을 허리춤에 버젓이 차고 한 반정부 시위대를 위협하는 사진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민주체제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들이었죠. 실망과 개탄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날의 뉴스는 하지만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행위이기에 더욱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즉 정신이 나간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죠.  

모두들 자유대한민국을 지킨다는 확신이 있기에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해도, 불법선거를 방치해도, 공존을 거부해도, 역사를 왜곡해도 웃으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있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그 동안 애써 쌓아온 소통, 공정한 선거, 공존, 민족의 역사, 즉 한마디로 민주체제의 초석을 하나하나 파괴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민주체제와 그 전통이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하루 더 가까워진 것이죠.

대한민국의 민주체제는 오늘 아주 안녕치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