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30, 2009

[시론] 정치가 뭔가요? / 남태현

한겨레 기사등록: 2009-10-30 오후 08:42:5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047.html

어느 정치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정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죠. 전공 대학원 수업이니 학생들이 쉬 답을 알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보아하니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더 난처했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거의 매일 하는 우리가 정작 정치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정치하는 사람을 쉽게 찾기 힘듭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하면 큰일 나는 사람들이 대다수니, 도대체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지, 또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죠.

신문을 한번 뒤적여 보죠. 일단 보통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나(“정치투쟁 오염 교사, 교단에 설 자격 없다” <문화일보> 올 7월31일치), 노동자들은(“민노총, 정치투쟁보다 조합원 권익위해 일해야” <서울경제> 올 3월19일치, 신재민 차관 “언론노조 파업은 정치파업” <동아일보> 올 2월28일치) 정치를 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같습니다. 교수나 학생도(“교수이어 학생들도 정치로?” <중도일보> 2007년 7월17일치) 물론 마찬가지인 듯싶습니다. 국가 권력도 정치는 바람직한 것 같지 않습니다. 검찰은 물론 안 되겠지만(검 “박연차 수사 정치적 의도 없다” <파이낸셜뉴스> 올 4월1일치), 심지어 정치를 위해 모인 정당도 정치를 하면 안 되고(안상수 “민주, 정략적 정치투쟁 받아들일 수 없다” <머니투데이> 7월13일치).

그럼 도대체 정치는 누가 합니까? 정치가 뭔가요? 정치는 자신의 뜻을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고 행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 정치는 우리 주변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고, 교실에서도 선생님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므로 보통 우린 공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주로 논합니다. 그렇다면, 공적인 장에서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강을 파겠다고 맘을 먹고 그 지위가 주는 힘을 이용해 그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지요. 모두 다 정치를 하고 있는데, 정치를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 그렇다면 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이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 이유입니다.

“왜?”는 “누구?”를 보면 답이 나올 듯합니다. 정부나 기업들은 노동자가 정치하면 뭐라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적인 사람이 정치하면 그들이 선생님이건 노동자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난리고, 야당은 여당을 정치한다고 뭐라 하고 여당은 야당을 정치한다고 몰아붙이는 것이지요. 정치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정치적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난히 정치하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은 바로 정치적인 힘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도전 자체를 이런 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기들은 글 읽고 공부하느라고 평생을 놀고먹으면서, 일반 백성들이 글을 배우려면 근엄하게 꾸짖던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치가 소수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을 우린 오래 견뎠습니다. 오랜 왕정이 그러했고,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그의 육사 후배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하고픈 유혹은 민주주의가 와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국민 여러분,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행위는 당연한 권리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필요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Friday, September 11, 2009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

[기고]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 남태현한겨레 2009.9.11 


최근 미국 정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에릭 홀더가 지난 부시 행정부의 중앙정보국이 불법 고문을 했는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지요. 조사 대상인 중앙정보국뿐 아니라, 보수파들은 이번 결정이 중앙정보국 요원들을 불안하게 해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면서 홀더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최근 드러나는 문서를 보면 정부의 고위층이 불법행위에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니, 이들의 반발이 이해도 갑니다. 한편으론 진보 진영도 이번 결정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고 있습니다. 홀더의 말대로 명백하게 고문을 한 수사관을 대상으로 조사를 할 경우 이를 실질적으로 지시한 고위층 지도자들은 면죄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이 흥미로운 것은 지난 정권의 흠을 들추는 것이 미덕이 아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마당에 그가 지명한 법무장관이 조사를 지시했다는 것이지요. 오바마 대통령의 가장 큰 공약 사항인 의료보험 개혁만으로도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 이번 일로 그는 국정 운영이 힘들어질까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번 일은 인치가 아닌 법치가 강조되는 미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미국의 법치가 완전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최근 부시나 닉슨의 예를 보면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미국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매번 그들은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회복했습니다. 닉슨의 불법행위는 오히려 의회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이런 법치 민주주의로의 회귀에는 눈을 크게 뜬 언론과 미국 시민들의 분노가 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지키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대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오랜 투쟁으로 마침내 1987년 민주주의는 얻어졌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어 하는 사이에 지난 두 정권이 쌓아둔 민주주의 업적이 퇴색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까? 언제 시민들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언제 힘 있는 사람들은 법 위에서 춤을 추고 있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 밑에 깔려 피를 흘리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혹시 지난 10여년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습관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민주주의가 왔고 그것을 위해 싸우던 분들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를 너무 쉽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분, 시민사회가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줄어드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러시아를 보십시오. 1990년대 혁명적인 정치변혁으로 얻어진 민주주의는 2000년대에 들어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도태된 지 오래입니다. 타이와 터키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시민사회에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백신과도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균을 몸에 넣어 저항력이 생기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의 도전도 그와 같아 우리들이 잠시 생각하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 값을 일깨워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도 습관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기사등록 : 2009-09-11 오후 07:04:12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ERIES/60/376284.html

Wednesday, April 15, 2009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


[왜냐면]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 남태현2009.4.15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 시절인 2001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부시의 고향 텍사스를 방문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접을 받았다. 직접 트럭을 몰고 드라이브도 즐기며 아주 친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부시는 푸틴의 “가슴과 영혼”을 보았다며 정상회담의 성공을 자축한다. 물론 푸틴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치켜세우던 부시는 러시아에서 실제로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 그리고 그 임기가 끝난 뒤에는 총리로서 권력을 이어가는, 민주주의의 “가슴과 영혼”과는 거리가 있는 지도자였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몰랐을 것이 확실하다. 대통령이 모르니 어린 학생들이 알 수가 있나.
나는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하여 미국 학생들과 토론을 하는 것은 늘 새롭다. 많은 학생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선 그런 고정관념을 깨,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보람되다. 내가 좋아하던 토론의 한 예가 푸틴의 러시아였다.
푸틴은 2000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은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내전이라는 호재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일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이후 푸틴은 정치적 반대를 하나하나 잠재웠다. 2003년 가스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회장의 체포는 그 신호탄이었다. 메시지는 아주 분명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그 누구도, 아무리 부유하고 세력이 굳건하더라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정치제도도 그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체첸 지역에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폭압적인 군사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푸틴이 무엇보다 공들인 것은 아무래도 언론에 자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노력은 치밀하고 총체적이었다. 그의 치부를 건드리던 유명 티브이채널 는 하수인을 통해서 길들였고 회사의 사장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체포된 데 이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회사를 포기한 건 물론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지방의 방송사들은 알아서 스스로 푸틴이 싫어할 보도를 자제하기 시작했다. 방송사의 소유권도 하나하나 정부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그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했던 토론이나 야당의 목소리는 불과 수년 만에 러시아 전역의 티브이에서 사라지는 지경에 이른다. 말을 듣지 않는 개개 언론인들 또한 하나하나 길들여지거나 사라져 갔다.
보도지침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기억되는 우리는 아마 다음의 코미디 같은 사건이 그렇게 우습지만은 않을 것이다. 2008년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스톱 리스트’가 존재한다. 이 리스트에 있는 비판적인 인사는 티브이의 인터뷰나 방송 출연이 실질적으로 금지된다. 심지어 유력 야당 지도자들도 티브이에서 보기가 이제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평범한(?) 정권의 비판자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국경 없는 기자회’라는 단체에 따르면 푸틴의 집권기에 18명의 기자가 살해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자기 집 앞에서 살해당한 안나 폴릿콥스카야라는 여성 기자일 것이다. 그는 체첸지역의 전쟁참사를 끊임없이 보도해 모스크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푸틴 비판자였다. 대가는 끊임없는 살해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협에 시달리던 그가 변을 당한 날은 우연인지 푸틴의 생일이었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 두 번의 의회선거를 합법적으로 치른 푸틴. 그가 과연 민주주의의 수호자였을까? 당연히 답은 너무나 뻔한 ‘아니요’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못해 독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음에 답을 하기가 2009년엔 수월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내 학생들은, 특히나 부시를 지지하는 학생들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푸틴의 반민주적인 행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도 치르고, 자신이 지지하는 부시가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떤 학생들은 내가 조목조목 따지면 거의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의 수는 적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하기엔 너무 뻔하게 그의 독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이명박 대통령을 푸틴에 비유한다면, 화를 내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뭐라 그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난 시간이 갈수록 설사 누가 그런 비유를 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길 진심으로 빈다. 왜냐하면 그 반대는 상상하기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람이 방송사를 억지로 장악하고, 대통령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던 뉴스 앵커가 시청자들과 회사 동료의 지지에도 뉴스에서 중도하차하고, 대통령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진행자가 프로그램의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방송을 그만둘 뻔했다. 난 이런 이야기가 러시아만의 것이길 바랐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한겨레 기사등록 : 2009-04-15 오후 10:16:22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50020.html

Thursday, August 28, 2008

Repression Or Repressive Mode?

Following is an blog post of Christines who continue her fight for her son Andy. Andy died of the mad cow disease. In this posting, she laments the fact that a Korean TV documentary was stopped from being aired out of fear of repression of the government. Well, not so pleasant, but it is a piece of evidence deepening my worry expressed in my previous pos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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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26th August 2008Christine filming documentary for MBC with Chang

Here is a recent email from Chang the producer of the MBC documentary My Lost Boy about Andrew and my quest to get the men and women responsible for his death publicly and legally accountable. It seems the conspiracy of silence, cover up and lies extends internationally as well....when there is huge profits to be made in the beef industry whatever country you reside in....the moneymaking machine that is the beef industry is paramount.....profit always before lives and human health.

I am aware that the men and women named and shamed on this website are using their influence in the UK and beyond to block the campaign and my efforts to put my findings into the media and public arena. I am rattling cages upsetting some of the most powerful people in the establishment who have a lot to hide and also a lot to lose. Whilst there is breath in my body I will continue to be my sons truthful voice from the grave.

The situation in Korea is dire, journalists have been imprisoned because of speaking out about BSE, many are being intimidated and frightened. Its more subtle but s similar tale here. Chang’s private email was blocked to me and he has had to contact me via another address, many Korean websites that carried the link www.justiceforandy.com have had it removed by the Korean government.

Whatever your faith or belief (I feel we are all brothers and sisters of one global family) join me in my support and prayers for Chang and his team who are risking their careers, livelihoods and more by broadcasting the programme highlighting Andrews terrible death and dying and my fight for justice here in the UK.

Dear Christine,

Really sorry to let you know the bad news broadcasting my film is postponed again after the preview and discussion among the director and the chief producers of our department.

The exact decision is that 'we don't give up the broadcasting the film, but we will decide the exact date to air.

I'm totally upset and frustrated...I heard there was an attempt to move me from the documentary team to another program, however I will try to do my best to protect my film and to air the film for the sake of me and you, especially Andrew.

Later, hope sending you good news...

Regards,

Chang

Tuesday, August 19, 2008

South Korean President, copying Putin?

Jackson/AP
Lee Myung-bak (on the left in the photo, Jackson/AP), the first year president of South Korea, is on the steep learning curve. As part of his efforts to quell his opposition, now prosecutors are issuing arrest warrants for those people who organized boycotts. The targets? Citizen activists who urged companies to drop their ads from major newspapers, Chosun daily, Donga daily, and Choong-ang daily, accusing them of mischaracterizing so-called Candle Rallies that dominated South Korean politics for good three months. The protests were against not only the government's lift of ban on the US beef but also, maybe more about, the hasty nature of decision making and its unwillingness to discuss with the public.

Anyway, the public reacted with mass protests and boycotts were part of them. Well, now they are in danger of being prosecuted for them. Boycotts have been used as a weapons of the public throughout the history of many countries. The blacks in the South, the blacks in the South Africa, Americans against Japanese invasion during the WWII, Indians under the British occupation, and so on and on. And of course, Koreans used it against the Japanese colonizers.

Some were more successful than others, but not a lot of them were so successful. They are usually hard to maintain because of "collective action problems." They were useful, however, in creating and maintaining political engine mobilizing the public. Therefore, it is more about political symbols than financial damages that matter.

There were only a handful of companies heeded to the boycott mobilizers. In other words, almost no companies canceled their ads and thus financial damages must be negligible to the three newspaper companies. Nevertheless, the government is in motion to protect the companies. Why? I can't think of any other reason but taming the public who are active in raising their voices.

Putin, the former president of Russia now the prime minister, was skillful in taming the public and the public media. Under his watch, the freedom of expression was taken away bit by bit through legal and illegal ways. As a result, now we have Russia dancing at the Kremlin Polka. It is, then, not so surprising the country is bullying its neighbors as well as its citizens again. Nobody may call the country democratic. (GW may have a different opinion though.)

Will South Korea follow the Russian path turning its clock back to 70s and 80s when generals roams the country killing people? Well, I hope not. But Lee's regime seems, sadly but clearly, similar to the military regimes than not.

Monday, November 3, 2003

송두율의 '낯선' 색깔

남태현 [주장] 송두율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03.11.03 12:28 ㅣ최종 업데이트 03.11.03 14:1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51752&PAGE_CD=

난 송두율 교수를 모른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신문에 난 기사가 고작이다. 그의 철학이나 인생에 관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낯선 그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것은 그의 '경계인', 또는 '회색분자'라는 색깔 때문일 것이다. 회색.

서울시내는 유난히도 회색이 판을 치는 곳이다. 엉성한 길바닥 보도블록으로부터 시작해서 길모퉁이의 담, 높이는 고층빌딩 옥상까지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회색을 찾을 수 있다. 그나마 눈길은 멀리 가지도 못한다. 왜냐면 회색 공기에 가려 그나마 우리의 시야는 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질려서일까? 우리가 회색을 지독히도 경멸하는 것은?

서울시내가 그렇게 회색으로 덧칠이 된 곳이라면 그 안에 사람들은 원색으로 화려하다. 아닌 거 같은가? TV를 틀라. 거기엔 지역색을 번쩍거리는 정치인들이 즐비하다. 신문을 펴면 무슨 논설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의 파시즘의 핏빛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그렇게 색이 분명한 사람들이 멀리 있는 것만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전라도 출신의 며느리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부모님들, 교내에 장승만 세워 놓으면 목을 베어 버리는 극단적 종교 동아리들, 대학도 안 나온 사람에게 대통령을 줄 수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명문 고등학교 동창들, 외국 근로자를 멸시하는 공장 주인과 동료 근로자들, 후줄근한 옷차림의 손님을 무시하는 고급식당 종업원들 등등 모두가 색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 색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때는 보일 듯 말듯, 어떤 때는 너무나 확연한 그 색은 무엇인가? 눈이 따가운 그 색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속한 패거리의 색이다.

그래서 언뜻 처음에는 색이 구분이 안 가는 것이다. 본색은 혼자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 그 패거리가 조금만 모이기를 기다리라. 그러면 그 튀는 색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될 것이다.

이 패거리의 색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어서 여럿이 모이면 힘이 나게 마련이다. 여럿이 모일 수록 색이 점점 진해지고 더 당당해진다. 그러니 또 그런 패거리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색을 억지로 맞추어 모여들기도 한다.

그리곤 패거리에 있으면서 왠지 모를 묘한 안도감도 느낀다. 누군가와 하나가 된 듯한, 남들과는 비로소 선을 확실하게 그을 수 있을 거 같은 안심이 된다. 그 안도감이라는 것이 전혀 현실적인 근거 없는 것이 또한 아니다. 바로 그 패거리가 주는 현실적 이득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패거리로부터 표도 얻고, 종교적인 우월감과 사명감을 성취하며, 패거리들 덕에 승진도 하고 하다 못해 '꽁짜 술'이라도 얻어 마신다.

이런저런 이유로 패거리가 커 가면서 그 색을 뚜렷이 할 필요가 더욱 커진다. 패거리 스스로에게 뚜렷하고 구별이 되는 동질감을 심어줌으로 해서 패거리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야 한다. 그것 없이는 패거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색을 뚜렷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다른 패거리와 대립을 하는 것이다. 어떤 패거리의 위협이나 도전 또는 상대적인 발전이야말로 "우리" 패거리들에게 "우리"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그 패거리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쉬운 예는 프로야구장에 가보면 볼 수 있다. 응원을 하기 싫어도 내야에 않으면 응원을 해야 한다. 특히나 얼마 전처럼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면 그 응원은 더욱 현실적인 가치가 있고 응원에 참가하라는 유언무언의 압력은 더욱 커져만 간다.

참여하기 싫어도 일단 시작하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옆에서 그 응원의 물결에 참여하고 있는 않은 사람에게로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뻔히 같은 팀의 팬인데 응원을 안 하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노란색 또는 파란색 풍선을 든 손은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응원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색이 분명해 질수록 그들의 힘은 세어지게 마련. 자연히 응원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는 압력도 커져 간다. 이렇듯 패거리간의 다툼은 패거리끼리의 다툼보다는 흔히 각 패거리의 자기단속 또는 내적인 발전이 그 목표일 때가 더 많다.

이렇듯 패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경쟁을 하고 있는 저쪽 패거리가 아니다. 또한 패거리에 속하지 못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안달하는 개인들을 겁내지도 않는다. 패거리들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느 패거리에도 들지 않으려는 색이 없는 개인들이다. 이 개인들이야말로 패거리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서운 적이다.

패거리들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순한 색을 즐겨한다. 그 색은 패거리가 하는 일에 굳이 일일이 설명할 필요를 제거시켜준다. 뭐를 해도 자기 패거리가 하면 다 정당화되고 남의 패거리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마귀일 따름이다.

대중들은 어려운 논리보다는 그런 단순하고 간편한 색을 쫓아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속한 패거리를 비호한다. 왜 호남사람들이 나쁜가? 왜 유대인이 나쁜가? 비호남인에게나 나찌 치하의 독일인들에게는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머릿수 많고 힘이 센 패거리의 선명한 색이면 다른 패거리에게 가진 미움과 차별을 정당화 하기에 충분했다.

회색인들은 여기서 바로 질문을 던지고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왜 유대인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학대하고 죽이느냐고. 나찌 독일사람들에게 마땅한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인들의 질문은 나찌 독일인들에게는 대답을 요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나찌 독일인으로서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근거없는 미움을 바탕으로 한 정치집단에게 그 근거없음을 지적하는데 그보다 더한 위협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렇듯 패거리들은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존재적 질문을 가장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만 두지 못한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들에게 색을 덮어씌우던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제거해야만 한다.

송두율 교수의 죄도 다름 아닌 회색인이라는 사실인 듯 싶다. <한겨레> 10월 17일자에 따르면 송 교수를 조사중인 검찰이 지난 17일 "노동당 가입 등에 대해 송 교수가 확실히 반성을 하면 관용 조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정치국 후보위원 부분 등 주요 혐의점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과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한겨레> 2003년 10월 20일자)하고 법정구속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죄라는 게 무엇인가 궁금하다.

검찰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봐도 반성을 안한 게 그 죄인 듯 하다. 사실은 봐주려고 했는데, 반성문 대신 사과문 쓰고 그 사과문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구속이다? 어찌 보면 북쪽의 색을 확실히 털어 버리고 남쪽의 색을 완전히 덮어쓰지 않은 게 그렇게 괘씸한 것이다.

송두율 교수의 죄가 '괘씸죄'와 별 다름이 없음은 그의 죄목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의 죄라는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국가보안법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에 따라 송두율 교수의 죄라는 것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인권의 기준에서 본다면 많은 국제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많다. 법 자체가 정치적인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고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비난이 끊임이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법을 어긴 송 교수의 죄라는 것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단한 법적 기초 위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긴 이런 괘씸죄가 얼마나 혹독한 매를 부르는지 교무실 불려가서 억울한 김에 반성문 쓰기를 거부해본 중교등학생 때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반성문 못쓰겠다고 하면 보통 매의 강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선생님의 분노도 갑자기 그 수위가 높아진다. 그리고 애초에 잘못한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선생님에게 억울한 매를 맞으면서 생각들 할 법 한 것이지만 송두율 교수도 거꾸로 말하면 뭐 그리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큰일을 잘못 했다면, 뭐 예를 들어 군대를 동원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내란을 일으켰다면 검찰이 반성문 하나 잘 쓰면 봐주겠다고 하겠는가?

괘씸할는지도 모르겠다. 무수한 색이 서로 부딪히는 조그만 나라에서 그의 회색 빛깔이 아니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회색인이 필요하다. 패거리를 만들고 사람들을 꼬드겨서 패거리를 키우고 그 패거리를 동원해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을 명명백백 하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도, 그래서 패거리에 속한 사람들이, 그 집단이 근거 없는 미움과 부당한 이득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런 패거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회색인의 존재와 그들이 던지는 질문이 필요하다.

매일 극한 대립과 어정쩡한 타협만 일삼는 이 사회에 회색분자 하나 끼워주자. 처넣고 조용히 시키기보다는 들어보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검찰이길 기원한다.

Sunday, July 6, 2003

미국은 '미첼 위'를 보며 한국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태현 <주장> '위성미'와 'Michelle Wie', 환상과 실망 사이
오마이뉴스 03.07.06 15:12 ㅣ최종 업데이트 03.07.06 13:5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1872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거리에는 애국의 물결이 넘치고 TV에는 영웅의 찬가가 퍼진다.

전쟁영웅의 이야기는 이제는 지난 이야기이고 스포츠의 영웅들이 그간 내준 자리를 되찾고 있다. TV 잠시만 보고 있으면 그날그날의 갖가지 영웅과 그들에 환호하는 '백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묘기에 가까운 야구의 명장면들은 끊임없이 재방송 된다.

어디 야구뿐이랴. 독립기념일 전날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 준결승에서 윌리암 자매들이 벨기에의 숙적들을 물리치고 결승전을 자매들끼리의 것으로 만들자, 올해 처음으로 윔블던 테니스를 중계한 미국 TV 채널 ESPN은 쾌제를 불렀다. 윌리암 자매 말고는 "아무도 초대받지 않았다"고.

골프도 예외는 아니다. 영웅 타이거 우즈의 침체에 초조해 하고 있던 미국 미디어들은 이번주 벌어진 경기에서 그가 보여준 플레이에 안심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우리의 영웅은 괜찮아'라고.

하지만 남자 골프가 미국 영웅들의 자랑스러운 무대가 되어준 것과 달리 여자 골프는 '오랑캐'들의 무대였다. 스웨덴의 아니카 소렌스탐을 선두로 한국의 박세리, 그레이스 박 등 덕에 최근 몇년간 여자 골프에서 미국의 쇠락은 너무나 뚜렸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 오랑캐들의 폭풍이 잠잠해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기대는 새로운 영웅 탄생, 또는 그 탄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 영웅은 다름아닌 바로 미셸 위이다.

미셸 위. 6피트의 장신에서 뿜어저 나오는 가공할 300 야드의 장타, 13살의 어린 나이에서 보여지는 무한한 가능성, 이 모든 것은 그런 기대가 헛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일까. 그녀가 출전하는 경기를 중계할 때면 TV는 줄곧 그녀를 따라 다닌다. 그녀의 스코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선두를 달리는 선수마저도 그녀만큼 카메라를 받지 못하는 수가 종종 있다. TV는 그녀의 미래, 그녀가 구할 미국 여자 골프계의 미래에 흥분해 있고 계속 그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며 즐거워 한다.

미국 독립기념일 아침, ESPN은 그녀와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밝고 자신감에 넘첬다. 패스트 푸드점 같은 데선 일하기 싫어 대학교육을 꼭 받고 싶단다. 하지만 18세가 되어서 프로로 전향하게 되었을 때 수백만불의 계약금이 생기면 어쩌겠냐는 물음엔 행복과 기대에 부푼 미소로 그냥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만 했다.

TV 속 그녀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저임금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거대자본의 속성을 이해 못 해 답답하기 보다는, 그냥 마냥 천진난만하고 맑게만 보였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과 남들의 삶을 이해하기에만 어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나라를 대표해 미국에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에도 아직은 너무나 어린 소녀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그녀가 한민족의 영웅이라도 되는 듯 치켜세우기에 바쁘다. 연일 그녀에 대한 보도, 그녀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에 대한 보도로 그 소녀가 한국을 위해 무슨 큰 일이라도 하는 듯 흥분해 있다. 제목만 보아도 그 관심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다.

<'미셸위 후원회' 결성> (문화일보 2003. 7. 4)
<미셸 위 "프로도 겁 안나요"> (국민일보 2003. 6. 29)
<"올해 화두는 미셸 Wie" NYT등 주요기사 취급> (경향신문 2003. 6. 30)
<'지존'도 위성미 알아주네> (세계일보 2003. 6. 28)
<소녀 위성미 美아마 '퀸'> (세계일보 2003. 6. 24)
<비즈니스위크誌, 미셸 위 상품성 특집…"5000만달러"> (조선일보 2003. 5. 7)

한국 언론은 여기서 지적한 두가지를 잊고 있거나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있다. 첫째, 미국의 그녀에 다한 찬사는 그녀의 미래뿐 아니라 그녀의 미래가 지켜줄 '미국' 여자골프의 부흥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미셸 위를 보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경외나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박세리나 그레이스 박 등을 이야기 할 때면 가끔 그녀들의 모국, 한국에 대한 멘트도 한다. 하지만 미셸 위를 대할 때는 전혀 그녀의 '아버지의 나라'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녀는 독립기념일날 두번째 라운드에서 성조기를 상기시키는 모자를 쓰고 나와서 그런 미국인들의 애정에 응답을 했다.

둘째, 그녀는 아직은 너무도 어린 소녀이다. 잔 다르크도 16세, 유관순도 17세나 되서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모국에서 자국 출신의 2세가 세계최강국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관심을 가져서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그 모국의 위상을 한층 드높히고 한국의 영웅이 되주리라는 무언의 기대는 아직 너무나 버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대이기 보다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녀는 하루하루 경기와 학교생활에 바쁜 13살 미국인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 환상은 가져도 좋다. 하지만 행여나 그녀가 그 환상을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괜히 욕하지 말자. 미셸 위는 '한국의 영웅'이 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이 뭔가? Michelle Wie 아니던가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