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17, 2014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고집스런 안철수의 낡은 ‘새 정치’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4-17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622&Code1=001


예상했던 대로 안철수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지요. 한국에서 컴퓨터라는 물건을 만져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V3라는 안철수의 놀라운 바이러스퇴치 프로그램을 써보았을 테고 이를 공짜로 나눈 그의 배짱과 긴 안목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의사로 시작해 컴퓨터엔지니어로,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로서 그의 성공적 삶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고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서울 시장과 대통령의 자리를 노렸을 때 흥분했습니다. 아마도 제대로 된, 상식적인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성원에 힘입어 이제 그는 당당히 야당의 한 대표로 성장했습니다. 민주당에 통합의 한 축으로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가 된 것이죠. 제일 야당을 이끌던 김한길 대표가 오히려 밀리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마도 안철수가 가지는 대권후보로서의 잠재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안철수가 갖고 있는 정치적 가능성은 큰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안철수의 새 정치라는 것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요? 기초선거에 정당공천을 하지 않겠다던 그가 결국 새 당내의 볼멘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국민에게 사과를 구했습니다.

박근혜의 공약파기로 인해 생긴 소동인 만큼 비난을 받는다면 박 대통령이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 초등학생도 알 일입니다. 문제는 모두들 이를 갖고 안철수의 새 정치가 퇴색되었다고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어쩌면 안철수 본인마저 기초선거의 정당공천 문제가 새 정치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정당공천처럼 사소한 일이 새 정치의 몸통이라는, 초라한 현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대선의 공약이라는 것이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닙니다. 후보자가 그럴싸한 공약으로 민중의 환심을 사고 권력을 얻은 후에 껌 종이 버리듯 무시하는 행태는 민주체제의 맹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의 고집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죠.

안철수의 실망스러운 고집


사실 대통령이 공약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자기네는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치인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철수의 그 고집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 공약에의 고집은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철수의 대선공약집을 보면 “기초단체장이 해당 선거구 국회의원에게 예속돼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에 종속”되고 “정당공천으로 인한 공천비리 및 부패 만연”되어 “현행 지방자치제도는 풀뿌리 자치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진단하며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국민이 애초에 간절하게 원한 것은 아니었죠. 이 문제에 대해 민중이 깊은 이해를 하고 변화를 갈구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그는 대선을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대통령이 되면 이런저런 것을 하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이 되지 않은 이 마당에 그 약속이라는 것은 개인적 철학의 문제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신뢰와 철학을 위해 당 전체의 운명을 볼모로 대통령과 맞서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고집은 있지만 전략적 사고가 부족함을 엿보게 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 고집을 국회의원 노무현이 질 것을 알면서 서울의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에서 국회의원 자리를 노린 것에 비유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맞지 않는 비유죠. 노무현은 자신의 자리를 걸고 도전했지만 안철수는 남의 자리를 걸고 도박을 했으니까요.

둘째로 그 고집이 보여주는 새 정치의 폭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 훌륭합니다. 정치인들이 쉽게 약속을 어기는 마당에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 것, 새롭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요? 과연 그가 말한 그의 새 정치는 무엇일까요?

그가 내놓은 대선 공약집을 보면 국민을 섬기는 정부, 공공기관의 혁신 등에서 교육, 문화로 이어지는 그의 비젼은 매력적이지만 과연 이게 새 정치인가하는 의문을 없애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강령/정강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근사한 말은 있지만 그것뿐입니다.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곧 새로운 정치일까요?

참신한 아이디어는 새 정치에 필요한 부분이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이들의 말을 잠시 내려놓고 하는 ‘정치’를 보면 새 정치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입니다. 안철수가 한 정치라는 것은, 선거의 승리라는 아주 전형적인 목표를 위해 통합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으로 양당구조라는 전형적인 지형을 구축한 것이죠. 즉 안철수의 정치는 아주 구태의연하며 전형적이고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비극이 이런 실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비극은 안철수는 아직도 자신이 새 정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냥 막연히나마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죠. 더 큰 비극은 정치인들이 짜놓은 그 좁디좁은 새 정치의 틀에 갇혀 어떤 것이 새 정치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나래마저 꺾여버린 우리의 처지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새 정치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요?

Wednesday, March 5, 2014

安 비판마라, 걱정할 일 따로 있다

安 비판마라, 걱정할 일 따로 있다 - 남태현
Insight 2014-3-5

http://insight.co.kr/content.php?Idx=858&Code1=001


지난 3월 2일을 시작으로 한국 정치 뉴스는 거의 한 가지 소식만 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김한길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과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의 통합이 그것이었죠.

당장 있는 지방선거와 다가올 총선,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승리를 막고 새 정치를 구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워낙에 갑작스레 있는 일이어서였는지 논란이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논란들을 살펴보고 한국정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해보로록 하겠습니다.

안철수‧김한길, 밀실정치 구태 답습?


일단은 비난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조선일보(2014.3.3)가 말하듯 ‘구(舊)정치에 대한 새 정치의 백기 투항’이라는 비아냥이 그 것이죠.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안철수와 그의 세력은 민주당을 싸잡아 낡은 정치세력이라고 비난했더랬죠.

그러더니 며칠 사이 그 낡은 정치 세력과 통합이라니 놀랄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비난은 한나라당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에서도 들립니다. 정의당은 3월 2일 논평에서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양당기득권 독점체제를 깨고 '새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열망이 좌초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안철수 의원은 그동안 누차 양당독점체제를 허무는 새로운 정치를 주창해 왔으나 결국 스스로가 기득권 독점체제에 편승한 결과를 낳았다”고 했고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도 3일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신당 창당이 … 혁신 대상인 양당 기득권 체제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새정치) 명분은 상실됐다”고 꼬집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합당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들어난 밀실정치의 구태를 비판합니다. 공적인 정치세력의 합당이란 것이 가벼운 일일 수 없고 최소한 그 조직 내에서만이라도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절차가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밀실통합이었죠. 민주당의 김광진 의원은 "아니! 언제부터 민주당이 당대표 1인에게 당해산, 합당, 신당 창당의 권한을 줬냐"며 "이런 중대차한 일을 당원, 의원단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기자회견 5분 전에 '미리 상의하지 못해 양해를 구한다'는 문자하나 달랑 보내고 끝낼 수 있습니까"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새정치연합 윤여준 의장도 합당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린 2일 오전까지도 신당 창당 결정을 통보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체제의 핵심, 선거의 승리


이러한 비난과 실망의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민주체제의 핵심을 간과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체제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양당기득권의 독점체제를 깨는 것인가요? ‘새정치’를 구현하는 것인가요? 밀실정치를 타파하는 것인가요? 물론 이들 모두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민주체제의 핵심일까요?

민주체제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닌 선거의 승리입니다. 왕정체제에서도 당파정치를 깨는 것이 중요했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밀실정치를 욕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나라를 운영하는 이들의 숙제이었지 체제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왕위의 계승과 유지였습니다. 소위 민주국가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이런 저런 과업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 나라가 추구해야할 숙제이지 체제의 정체성은 아닌 것이죠.

민주체제의 정체성은 선거에서 나오고 권력은 선거의 승리에서 나옵니다. 숙제는 그 후에나 할 수 있는 것이죠. 즉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민주체제라는 것입니다. 이 당위를 곱씹어 본다면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망을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학생이 공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고 뭐라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합당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모두 선거에 고전할 것이라 예견되었었고 합당은 두 당 모두에게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인 것이었던거죠. 그런 면에서 합당의 목표나 대의가 불문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자신의 정치적 취향에 따라 야합, 정치공학, 구국의 결단 등으로 불리는) 합당은 늘 있어왔던 일입니다.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이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을 해 거대 여당을 만들어 정권을 재창출했습니다.

1997년의 대통령 레이스에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과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손을 잡고 신한국당의 이회창을 간신히 이겼습니다. 2002년엔 민주당의 노무현은 국민통합21의 정몽준과 과감하게 손을 잡으면서 이회창을 역전했죠. 합당 또는 그에 준하는 연합이 선거에 힘을 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입니다.

신당창당, 6‧4 지방선거에 활력


당장에 지지부진할 것으로 예상했던 야당의 지방선거에도 활력이 띄고 있습니다. “두 세력이 통합하면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확장할 여지가 많았고, 견제도 협력도 못하는 박근혜 정부와의 관계도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는 관계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경향신문 사설 3.2)가 있고 실제로 야당의 지지율도 치솟았습니다.

경향신문과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신당 지지율은 30%로 2월 21~22일 실시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나온 민주당 10.3%, 새정치연합 13.7%를 단순 합산한 24.0%와 비교할 때 지지율이 6%포인트 가까이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지율은 39.9%에서 39.3%로 0.6%포인트 줄어 별다른 변화가 없었죠. 새누리당에서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입니다. 야권이 민주당과 안철수 지지세력, 진보세력으로 갈갈이 나누어져 쉬운 싸움이 예상되었던 새누리당으로선 황당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왜 이렇게 정치판이 돌아가냐는 것입니다. 왜 계속 합당 또는 야합이 나타날까요? 이를 구태적인 정치라고 욕하던 이들도 합당을 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고질적인 병폐인 양당기득권 독점체제를 깨기’가 이렇게 힘든 것은 왜일까요? 질문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실 대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선거제도 때문이죠 (남태현 2014 <왜 정치는 우리는 배신하는가>).

우리의 선거제는 각 선거구에서 최대의 득표를 한 후보만이 승리하는 제도입니다. 당연히 승자는 한 명일 뿐이죠. 그 선거구에서 노태우 후보처럼 36.6%의 득표를 하건 박근혜 후보처럼 과반수를 넘건 일등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거꾸로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명만 이기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솔직한 지지보다는 전략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정당에 투표하고 싶어도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그나마 조금 더 비슷한 민주당에 투표하게 되는 것이죠.

‘새누리당보다는 낫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건 아니건 우리의 선거제도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표형태는 결과적으로 양당제를 공고하게 만듭니다.

한국의 양당제, 안철수 혼자 바꿀 수 없다


좌건 우건 이념의 잣대에 가운데에 서있는 두 정당 말고는 살아남기 힘든 것이죠. 노동정당의 지지가 민주당에 흡수되는 것처럼, 극우정당의 지지도 새누리당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 힘든 것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양당이 무슨 기득권을 조작하고 독점하는 흉계를 꾸미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레 제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거꾸로 양당제는 안철수 혼자 바꿀 수 있는 것도 애초에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실망을 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기대를 한 면이 큽니다. 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판에 반영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정당 둘이 사회의 다양성을 대변할 수는 없죠.

그러므로 다양한 정당이 정권을 다투는 건전한 민주체제를 이루는 길은 선거제도를, 그리고 더 나아가 헌법을 바꾸는데서 찾아야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번 합당을 보고 생각해봐야할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Tuesday, January 14, 2014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 - 남태현
인사이트 2014-01-14

http://insight.co.kr/content.php?Idx=473&Code1=001

뉴스를 보면 ‘사람의 탈을 쓰고 어쩜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탄식을 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건 제 정신이 아냐’, ‘미친 거지’ 하고 혀를 차는 것 또한 흔한 일입니다. 멀리는 딱 20년 전 지존파의 엽기적인 연쇄살인행각이 있었고 작년에도 용인에서 엽기 살인이 있었습니다. 모두 도저히 제정신으로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범행들이었죠. 하지만 과연 제정신이 아니고 미친 사람들이나 끔찍한 일을 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테러 용의자들을 상대로 고문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나 침대에 꼼짝할 수 없이 누워 얼굴을 천으로 가린 채 물을 얼굴에 부어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따라서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물고문(Waterboarding)은 그중 악명 높은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고문이라는 용어 대신 ‘강력한 조사기법’이라고 부르며 합법화 했었죠. 십여 년이 지났지만 고문을 주도했던 미중앙정보국(CIA)의 당시 변호사 존 리죠는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그 조사기법들은 그 당시에도 고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미법무부에서 고문이라고 했다면 중앙정보국이 그런 기법을 이용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미국 내 다수의 목소리에 반하는 것이죠. 미국 내 인권단체까지 볼 것도 없고 우선 오바마 대통령부터 이러한 기법을 ‘고문’이라고 했고 더군다나 미군이 적군의 고문을 소개하는 문건을 보아도 그 ‘강력한 조사기법’들을 고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중들 또한 대테러전 초기만 하더라도 이를 고문으로 보는데 주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조사가 고문이라는 데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런 논란을 다 떠나서 자신이 그런 조사를 받을 상상을 해보면 누구라도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자연히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차분한 목소리로 고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리죠의 인터뷰는 어찌 보면 참으로 끔찍한 것입니다. 미친 사람도 아니고 아이비리그인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조지와싱턴 법대를 나온 수재가 고문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마치 법의 정의를 말하듯 하고 있으니까요.  

리죠를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지도자들의 이러한 확신에 찬 지휘하에서 감금, 고문, 살인, 사체유기 등 끔찍한 범행이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막가파’의 만행은 댈 것도 아니었던 것이죠. 이는 자연히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했고 미정부에 대한 신뢰마저 추락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은 고문과 더불어 정치체제를 약화시키는 이중의 심각한 죄를 저지른 셈인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끔찍한 비극은 미치거나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을 해하기 힘든 상황에 있고 정신질환으로 인해 상해를 가하는 경우에도 그 피해는 대부분 극히 제한적입니다.  나쁜 사람도 나빠서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일 뿐입니다. 정말 나쁜 일은 대부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착한 사람들이 벌이죠. 그리고 그 나쁜 정도가 더한 경우—피해자가 수천수만에 이르는 전쟁과 같은 예—는 비범하고 영특한 나라의 엘리트가 벌이는 경우가 거의 다입니다.

 둘째는 너무 끔찍해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라 해도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문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끔찍한 공권력의 행사임에도 미국사람들의 많은 수가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고문을 지지한 것은 좋은 예입니다. 더욱이 아직도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안타깝지만 그런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한민국, 정상적인 민주체제? 

 그런 면에서 1월 6일 하루에 접한 일련의 보도는 한국은 역시 사람 사는 냄새가 정말 진하게 나는 곳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자신을 선출한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권위주의적 행보를 거듭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간신히 마련한 기자회견에서도 “불법으로 막 떼를 쓰면 적당히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런 비정상적 관행에 대해 원칙적으로 대응하는 걸 ‘소통이 안돼서 그렇다’고 말하는 건 저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며 소통인지 호통인지 애매한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교육부의 엄격한 검정을 거쳐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전교조의 테러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나라는 자유대한민국으로 볼 수 없다”며 테러와 자유의 정의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날 한 보수단체 회원이 권총과 실탄을 허리춤에 버젓이 차고 한 반정부 시위대를 위협하는 사진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민주체제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들이었죠. 실망과 개탄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날의 뉴스는 하지만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의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행위이기에 더욱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즉 정신이 나간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죠.  

모두들 자유대한민국을 지킨다는 확신이 있기에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해도, 불법선거를 방치해도, 공존을 거부해도, 역사를 왜곡해도 웃으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있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그 동안 애써 쌓아온 소통, 공정한 선거, 공존, 민족의 역사, 즉 한마디로 민주체제의 초석을 하나하나 파괴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민주체제와 그 전통이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하루 더 가까워진 것이죠.

대한민국의 민주체제는 오늘 아주 안녕치 못합니다.

Monday, December 16, 2013

종북몰이, 한국의 마녀사냥

종북몰이, 한국의 마녀사냥 - 남태현
인사이트 2013-12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51&Code1=001

토론을 중시하는 미국대학에서도 사실 학생들의 토론을 이끄는 것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 방법 중 제가 즐겨 쓰는 것 중 하나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것이죠. 가르치는 전공이 정치학이다 보니 정치적 내용이 묻어나는 영화를 보여주는데 그 중 제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파리대왕>이 있습니다.

윌리암 골딩의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1963년과 1990년 두 번에 걸쳐 영화화 되었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1963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저에겐 다행이도 <정치와 영화>라는 과목을 가르칠 기회가 있어서 영화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다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체 없는 공포, 정치판 조장


이 영화는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재빠르게 정치사회를 구성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음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영화가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정치인으로 거듭납니다. 위와 아래의 질서를 확립하고 위에 선 아이들 즉 권력자들은 점점 더 커지는 권력에 심취합니다.

이 과정을 결정적으로 과속화한 것은 산꼭대기의 괴물의 존재였습니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군림을 허용하고 무리들의 복종을 요구했죠. 괴물은 오래된 시체로 밝혀지지만 그 목격자는 죽임을 당하고, 진실은 묻히게 됩니다. 결국 괴물의 공포만 살아남아 이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정치세력만 번성합니다.

소년들은 이 정치체제가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맹신하고 충성을 다합니다. 얼핏 보면 한심한 이 소년들을 보며 제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죠. 이렇게 한심한 예는 물론 현실에도 넘쳐납니다. 그 중 하나는 15세기 말엽 중세유럽의 ‘스페니쉬 인퀴지션(Spanish Inquisition)’이라는 종교재판일 것입니다.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진정으로 했는지 그냥 개종한 척만 하고 계속 유대교를 신봉하는지를 ‘조사’한 것으로 유럽에서 크게 세 차례 그 조사가 있었는데, 그중 스페인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사를 ‘스페니쉬 인퀴지션’이라고 합니다.

권력의 도구, ‘두려움’


당시 유대인들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자신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고발당한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이유) 유대인들은 조사관들에게 종교적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어도 증명할 길이 없었죠.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것이 고백 말고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말을 해도 조사관들이 믿지 않기로 하면 이들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고문과 화형이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이 해괴한 일이 당시에는 마녀와의 성전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유대교를 믿는 것이 뭐 어때서라고 비웃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 때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오래된 시체가 됐든, 있지도 않은 마녀가 되었든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는 누구에게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간에 그것(불구덩이, 친불주의, 숭불주의, 미제국주의자)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고 자신의 반대자들을 그 악의 일부로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키고자하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요.

덕택에 대중들은 있지도 않은 것과 싸우느라 정작 자신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권력자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랐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게 남들만의 모습일까요? 실체가 모호한 적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를 키우고 그것을 이용해 반대를 억누르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한국에선 없었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죠. 더욱 슬프게도 그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종북인가


박근혜 정부의 첫해를 장식하고 있는 ‘종북몰이’가 그것입니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북한과 공조해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9월 구속이 된 것을 시작으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반공의 굿판이 요란하게 시작했습니다. 법무부는 다음 달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하면서 뒤이었고 보수단체들은 통합진보당을 간첩소굴이라며 장단을 맞췄습니다.

통진당 뿐만이 아니죠. 한기총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종북주의자들, 단체 그리고 정당 등이 절대로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며 열변을 토해냈고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은 10월 10일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해 "종북, 친북세력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민들도 잘한다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며 남 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 의원 등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종북세력으로 매도했습니다.

11월 22일 박창신 신부가 시국미사를 통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자 조선일보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 신부’마저 ‘종북구현’ 사제단이라고 비꼬았죠. 뒤이어 검찰은 ‘박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거의 모든 국민이 종북인 셈입니다.

정치적 궁지의 결과물, ‘종북’


그럼 이들이 말하는 종북세력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논란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도 재판을 기다려야 하고 설사 유죄 판결을 받더라하더라도 그들이 종북인지 무엇인지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도대체 종북이 무엇인가요? 김일성을 욕하지 않으면 종북일까요? 김일성 욕은 하지만 북한의 핵을 막연히 부러워하면 종북인가요? 김일성도 싫고 북핵도 싫지만 외국군대가 없는 나라를 꿈꾸면 종북입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북한의 사상이나 체제에 얼마나 동조를 해야 종북인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들의 사상이 무엇이건 이들과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퍼져있는”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을 묶어 하나의 세력으로 본다는 것은 억지 내지는 무지일 뿐입니다. 이들 간에는 조직적 연계나 행동의 연대도 전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상적 접점도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종북이라는 말도 세력이라는 말도 아무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수사에 불과한 것이죠. 막연하게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오래 전 죽은 시체나 마녀의 존재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페니쉬 인퀴지션’의 광풍이 잦아진 것은 이성의 발달이 몰아치면서 부터였습니다. 종북의 광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부 정치인과 시민사회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이성을 촉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거꾸로 많은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허황된 정치공세를 벌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몰려있는 궁지의 깊이와 어둠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Saturday, September 29, 2012

[시론]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과 남북한의 미래 - 남태현

한겨레 2012.09.2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3530.html

리언 파네타 미국 국방장관이 일본, 중국,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하필 대만 바로 위에 있는 댜오위다오(센카쿠) 섬을 놓고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 주장으로 감정이 한창 고조될 때 이 지역을 찾은 것이다. 이런 상황을 미국이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두 나라의 영토분쟁에 묘하게 끼어들게 됐다. 하지만 파네타의 일본 방문에서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미·일 양국은 파네타의 방문을 통해 레이더 설치에 합의했다. 혼슈 북쪽에 있는 기지에 이어 미사일 방어 레이더를 하나 더 설치하는 데 기본적인 합의를 한 것이다. 이 ‘AN/TPY-2’로 불리는 레이더는 특히 탄도미사일을 겨냥한 것으로, 모든 종류의 탄도미사일을 포착할 수 있다. 파네타는 이 레이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북한의 위협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는 “레이더의 설치 목적은 미국의 일본방위력을 증가시키고… 미국 본토를 북한의 미사일로부터 지키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을 의식한 듯 이미 중국에 북한의 위협에 대한 미국의 걱정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북한을 겨냥한 이 레이더 설치를 두고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미·일 양국의 대북 인식이다. 계속되는 호전적 발언과 국지적 도발, 핵개발로 인해 두 나라는 북한이 ‘언제 어떤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두 나라 국민들 사이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결과가 두 나라로 하여금 더더욱 안보를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똑같은 야구방망이도 야구선수가 들고 있을 때와 검은 가죽점퍼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이가 들고 있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조처는 파네타의 말대로 두 나라, 더 나아가 이 지역 안보를 위해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실제 힘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북한에 탄도미사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거듭된 실패에서 보이듯 아주 초보적인 수준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면 미국엔 탄도미사일이 몇 개나 있을까? 냉전이 끝난 뒤 수천개에 이르던 것을 줄여 현재는 488개를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지상 탄도미사일만을 말하는 것이고, 잠수함 탄도미사일 288개와 핵폭격기 115대 등을 뺀 숫자다. 그리고 정작 미사일에 실을 내용물, 즉 핵탄두만도 미국은 5000여개를 보유하고 있다. 10개 안쪽으로 추정되는 북한의 초보적인 핵탄두들과는 비교 자체가 되질 않는다.

이 많아야 10개 안쪽인, 그것도 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핵폭탄으로 북한이 미국 본토에 미사일 공격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스스로 초토화될 것을 알면서.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니 이 새 레이더가 겨냥한 것은 북한만이 아닌 것이다. 정작 그 상대는 중국이라고 보는 게 맞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설명을 쓰더라도 북한의 위협은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에 좋은 구실이 된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의 진출은 중국의 군비확장과 일본의 대응을 순차적으로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강대국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한반도는 또 한번 격동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남북간의 긴장 완화가 절실함을 웅변하기도 한다. 새 대통령이 누가 되건 남북간의 긴장 완화는 정치적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을 직시하길 바란다.

Friday, April 8, 2011

[왜냐면] 영어 망국병은 병이 아니라 사기다 2

[왜냐면] 영어 망국병은 병이 아니라 사기다 2 / 남태현
한겨레 기사등록 : 2011-04-08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72092.html

저의 ‘영어 망국병은 병이 아니라 사기다’(<한겨레> 3월26일치 왜냐면)라는 글을 읽고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트위트를 보내주셨습니다. 원래 해도 잘 안되는 것을 내 탓이려니 자책하며 더더욱 열심히 하고, 또 그럴수록 자신이 아닌 사회 기득권층의 권위만 더욱 세워주는 ‘사기’를 당하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공감은 하지만 현실을 어쩔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방법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영어를 배워야 하는 중요성은 타당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국제화 시대의 중요 언어로서 그 쓰임이 확산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시각은 국제화라는 것이 ‘미국화’는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리비아의 내전이 세계 각지의 에너지 수급에 영향을 미치듯 우리는 분명 국제화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모든 것이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미국화된 세상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어의 쓰임과 필요는 한정되어 있고 영어는 그에 맞는 사람들만 하면 되는 것이죠. 소수의 잠재적 영어 우수자를 가리기 위해 사회 전체가 영어로 멍드는 것은 낭비이자 파쇼적인 현상입니다.

많은 분들이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들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현실이, 사실은 우리를 속이고 있음을 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타협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방적인 타협일 뿐 다른 쪽에선 애초에 타협할 마음조차 없던 짝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영어가 그냥 하나의 교과 과목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독일어 같은 발음으로 영어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에, 너덜너덜해진 <성문영어>가 다였습니다. 영어를 잘해봐야 거기서 거기였고, 경쟁은 있었지만 비교적 공평했습니다. 영어도 중요했지만 국어·수학·국사도 중요했고, 어제 있었던 축구 내기와 내일 있을 농구 내기도 꽤나 중요했죠. 하지만 이제 한국의 모습을 보면 이건 사람들이 비행기 안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인 듯합니다.

요즘 한국의 영어 공부는 무슨 미래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영어유치원이 있더군요. 금발의 선생님이 영어로 가르치고 아이들은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소풍을 가더군요. 이 아이들에겐 미국의 명절도 낯설지 않습니다. 저도 미국에 와서야 알게 된 핼러윈 데이가 버젓이 학교 행사입니다. 마이클, 클라라 같은 미국 이름도 있습니다. 그 부모는 물론 마이클 엄마, 클라라 아빠입니다. 가는 학교도 외국인학교입니다. 이젠 미국계 학교로 갈지, 영국계 학교로 갈지도 고를 수 있더군요. 물론 외국인이 아니어도 돈이 있으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연수도 갑니다. 휴가 때도 하와이에 해수욕을 가거나 로키산맥에서 스키를 타는 게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 아닙니다. 사는 게 이러하니 친구들을 만나도 “하이, 마이클”이고, 집에서 식구끼리 영어를 써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영어는 그 집에선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주제는 미국의 어느 대학에 갈 것인가도 아닌 미국의 어느 명문 고등학교에 갈 것인가입니다. 고등학교를 고르러 미국에 가서 이곳저곳 탐방도 합니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 고등학생 자녀들을 보러 마이클 엄마, 클라라 아빠는 태평양을 휙 건너기도 합니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사람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고, 있어도 이상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선망의 대상이자 따라가야 할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미친 듯이 뛰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따라가자는 마음으로요. 사교육비로만 7조원을 쓰고, 나라에선 또 따로 원어민 교사를 고용하고, 영어 교사 재교육이다 뭐다 해서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과연 저 사람들의 영어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게 따라가지는 건가요?


한때는 명품이었던 핸드백을 너도나도 들게 되면,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더 귀하고 비싼 물건을 사서 자신들을 ‘차별’하지요. 쇼핑몰에 가면 이젠 읽기도 힘든 브랜드, 들어가기에도 멋쩍은 가게 천지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다들 영어학원을 다니면,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더 어릴 적부터 영어 공부를 시키거나 더 효과적인 그리고 비싼 방법으로 대응합니다. 하는 만큼은 따라해보지만, 빈부 차는 보통사람들의 영어 교육을 제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교육비로 가계가 흔들리고 무리한 기러기 생활로 가정이 무너져도 그렇게 시킨 영어 공부가 결국엔 그들을 따라잡는 데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이죠. 보통사람들에게 영어 격차는 애초부터 극복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 사기입니다.

혹 다들 영어에 성공했다고 칩시다. 모든 젊은이들이 ‘오렌지’ 대신 ‘어륀지’라고 하는 날이 왔다고 칩시다. 그럼 이들은 모두 성공할까요? 아닐 테죠. 또다른 무언가를 찾아 경쟁에 나서겠죠. 그리고 그 경쟁에서 있는 자들은 항상 저 멀리서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중국어가 됐건 독일어가 됐건 또 우리 사회는 이 사기를 되풀이할 겁니다. 그러니 영어망국병의 핵심은 영어 격차가 아닌 벌어져만 가는 빈부 격차와 이를 숨기고자 하는 정치적 최면인 듯합니다.

이것이 사기라면 사기당한 사람이 “어쩌란 말이냐”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피해자니까요. 대신 우리는 피해를 주고 있는, 피해를 방조하고 있는 자들을 추궁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의 정책은 이제까지 이 사기를 악화시키는 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이제라도 정부는 문제가 아닌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영어에 대한 국가적 특혜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학교 교육에서 영어는 하나의 외국어일 뿐임을 강조하고, 대학 입시에서도 영어를 외국어 영역의 여러 외국어 중 선택할 수 있는 한 과목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극단적이고 비뚤어진 경쟁과 갈수록 악화되는 빈부 격차가 우리 모두를 얼마나 아프게 하는가를 돌이켜보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을 당장 마련해야 합니다.

Friday, March 25, 2011

영어 망국병은 병이 아니라 사기다

한겨레 [왜냐면] 남태현 미국 메릴랜드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기사등록 : 2011-03-25 오후 06:21:21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69926.html

얼마 전 캐나다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만난 한국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화제가 영어로 옮겨졌을 때 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영어강의 능력이 신입교원의 필수 조건이다. 프랑스에서 박사를 딴 사람도 영어로 강의를 해야 되고, 동양철학도 영어강의가 있다”는 믿기 힘든 괴담을 서울의 유명 대학의 교수에게서 들으니 기가 막혔습니다.
믿기도 힘들었죠. 그런데 정말이더군요. 한 대학의 철학과 개설 과목을 보니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양사상(영어강의)’, ‘형이상학특강1(영어강의)’가 있었습니다. 일이 이 정도가 되었으니 영어 망국병이라고 한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 이것은 병이 아니라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0년에 영어 사교육비로 7조원이 쓰였답니다. 이는 수학 사교육비를 훨씬 뛰어넘고(6조원) 전체 사교육비(21조원)의 3분의 1입니다. 그리고 부산시의 2010년 예산(7조8000억)에 거의 맞먹는 엄청난 돈입니다. 학원이다, 국제중이다, 연수다 해서 어린 학생뿐 아니라 대학생, 직장인까지 영어에 광기 어린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무엇을 얻었습니까?

제 지인 하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 교육을 마치고 한국에서 유명한 회사를 다닙니다. 그 회사 부장님도 영어를 매일같이 공부한다더군요. 외국인도 회사에 있고, 외국 기업과 왕래도 많아 회사에서 영어를 강조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영어로만 회의를 한답니다. 그런데 회의를 다 하고 나서 같은 회의를 또 한답니다. 이번엔 한국말로요. 아니면 제 지인에게 와서 무슨 회의를 했느냐고 물어본답니다. 물론 조용히요. 광기 시퍼런 영어 투자의 초라한 성적표입니다.

하지만 우린 자신의 초라한 영어 실력을 자책하며 영어 공부를 계속합니다. 아침 라디오를 들어도, 거리의 광고를 봐도 온통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반복합니다. 옆집 애도 연수 갔다 오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뿐입니까? 티브이 쇼를 봐도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가수가 나옵니다. 영어를 못하면, 내 잘못인 듯하고 자괴감은 커져만 갑니다. 하지만 이건 사기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기당한 것입니다.

영어는 우리말과 완전히 다른 언어체계이자 사고체계이기도 하고, 하나의 문화입니다. 문법을 익히고 회화를 연습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제 영어의 밑천은 대학원 수업이었습니다. 영어로 글을 쓰고 토론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식 사고와 문화를 익혀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절박함이 영어선생이었던 셈이죠. 두 시간 죽어라 공부하고 나머지 22시간, 꿈까지 한국말로 꾸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불가능한 것을 하려니 다들 힘들고 괴롭고 돈만 듭니다. 영어는 여건이 되는 사람만, 필요한 사람만 하면 되는 것이죠. 산책을 즐기면 되지 모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국 사회는 성공하려면 무조건 영어를 하라고 강요합니다. 심지어 동양철학을 공부하려고 해도요. 말도 안 되는 것을 왜 강요하느냐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사전에 막는 것은 강요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너도 할 수 있다는 달콤한 사탕발림은 그들의 가장 큰 무기이자 당하는 사람들에겐 처절한 사기입니다.

그들은 영어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미국 교육으로 승진하거나 남보다 많은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영어로 이미 득을 본 사람들이고 자식들에게 미국 문화를 통째로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사회 전체의 영어 숭배가 자기들의 이익인 셈이지요.

한국에서 영어의 고질적 병폐가 고쳐지지 않는 것은 교육의 문제로 보고 교육에서 답을 찾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영어의 문제는 계급과 정치의 문제가 된 지 오래이고 답도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